식민지의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마닐라, 그리고 지속 가능한 생태관광과 자연을 품은 세부를 통해 바라본 필리핀의 새로운 매력에 대하여.
●MANILA 마닐라
인트라무로스
Intramuros
성벽을 타고 흐르는 레트로 마닐라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는 16세기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로, 필리핀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1571년 파시그강 하류에 0.67km2 규모의 성곽 도시를 건설했다. 인트라무로스는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외세의 통치 거점이었으며, 1945년 마닐라 전투의 참혹함을 겪어 낸 다크투어리즘의 현장이기도 하다.
인트라무로스를 여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대나무 자전거(Bambike) 투어’다.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대나무 자전거는 지역의 문화적 상징성과 친환경적 가치를 함께 담고 있다. 인트라무로스의 도로에서는 ‘느림’이 우선순위다. 보행자를 먼저 배려하고, 전통 이동 수단인 깔레사(마차)와 자전거는 서로 충분한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탐방은 가이드의 리딩에 따라 일렬로 주행하고, 또 멈춰 서기를 반복한다. 약 1시간 30분~3시간이 소요되는 순환 코스는 산티아고 요새, 마닐라 대성당 등 핵심 유적지 6~8곳을 연결하며, 곳곳에서 해설이 곁들여진다.
인트라무로스 탐방의 핵심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산 아구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이다. 1607년 완공된 이곳은 기둥을 강화하고 구조를 낮게 설계한 ‘지진 바로크(Earthquake Baroque)’ 양식 덕분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원형을 유지하며 견고함을 입증해 왔다. 포트 산티아고(Fort Santiago) 역시 필리핀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국민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 독립 영웅 호세 리잘(José Rizal)이 처형 직전까지 수용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인트라무로스는 이렇듯 고난의 역사를 대변하는 공간이지만, 현재는 사람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광장에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 카페 창가에 드리운 평온한 풍경, 산 아구스틴 성당에서 웨딩 스냅사진을 찍는 예비부부들까지. 여행자들은 대나무 자전거를 타고 성벽을 누비며 필리핀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비논도 & 파시그강
Binondo & Pasig River
공존이 비전으로 흐르는 통로
16세기 말,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인트라무로스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파시그강 너머로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그렇게 형성된 곳이 바로 비논도(Binondo)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 푸젠성(福建省) 출신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고향의 음식 문화와 상업적 전통, 종교적 관습을 그대로 가져왔고, 필리핀 원주민들과 혼인하며 메스티소(Mestizo)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존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비논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기반이 됐다.
비논도의 가치는 400년 역사를 품은 미식에도 있다. 이곳의 음식은 중국의 조리법과 현지 식재료가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낸다. 달콤한 팥이나 녹두를 채워 구운 빵 호피아(Hopia), 닭고기와 채소를 넣어 볶아 낸 찰밥 키암퐁(Kiampong), 고기소를 가득 채운 찐빵 시오파오(Siopao), 그리고 육즙을 머금은 수제 만두는 비논도에서 꼭 맛봐야 할 별미다.
한편, 파시그강(Pasig River)은 대대적인 수변 재생 사업인 ‘파시그 리버 에스플라나드(Pasig River Esplanade)’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4년 존스 브리지(Jones Bridge) 일대 1단계 구간을 시작으로, 2026년 현재는 플라자 멕시코를 거쳐 포트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보행망이 형성됐다. 과거 산업화로 오염돼 방치됐던 강변은 이제 친환경 조경과 자전거 도로, 태양광 조명을 갖춘 세련된 프롬나드로 탈바꿈했다.
존스 브리지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은 연간 200만명이 찾아든다는 일본 후쿠오카현의 레트로 모지코를 연상시킨다. 모지코가 ‘완성된 레트로’라면 파시그는 ‘살아 있는 레트로’에 가깝다. 도색이 벗겨진 낡은 창고와 끊임없이 오가는 작은 배들, 그리고 강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날것의 풍경이다. 문득 여행의 지향점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낡음도, 투박함도,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찌르는 쿱쿱한 냄새마저도 결국 이 도시를 이루는 풍경이었다.
마카티 Makati
마닐라를 즐기는 유연한 여행방식
필리핀 경제의 심장부인 마카티는 고층 빌딩 숲과 도심의 정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마카티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문 도시 설계다. 쇼핑몰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그린벨트 성당(Greenbelt Chapel)’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둥근 돔 형태의 개방형 성당은 도시인의 활기찬 일상과 종교의 경건함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아얄라 트라이앵글 가든(Ayala Triangle Gardens)에서는 마카티가 지향하는 휴식의 미학이 더욱 선명해진다. 삼각형 형태의 이 녹지는 주변을 에워싼 빌딩들과 대비를 이루며, 마치 도심의 허파 같은 역할을 한다. 안과 밖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곳에서 시민들은 쇼핑의 즐거움과 정서적 안정감을 동시에 누린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를 마주하는 순간에는 공존이라는 다정한 정서에 자연스레 빠져들게 된다.
이뿐만 아니다. 마카티는 필리핀의 정체성이 응축된 아카이브도 품고 있다. 고대 문명부터 근현대 예술까지 필리핀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큐레이션한 ‘아얄라 뮤지엄(Ayala Museum)’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박물관 관람의 백미는 단연 ‘골드 컬렉션(Gold of Ancestors)’. 10~13세기 필리핀 초기 문명의 금 장신구들은 당시 원주민들이 구현했던 고도의 야금술과 지배계층의 화려한 삶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아얄라 뮤지엄의 또 다른 축은 예술이다. 페르난도 아모르솔로(Fernando Amorsolo), 후안 루나(Juan Luna) 등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필리핀 근현대 미술의 궤적을 촘촘히 짚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교역의 역사를 품은 도자기와 토착 직물 등을 통해 당시 필리핀이 흡수하고 녹여낸 문화적 다양성까지 이해하게 된다.
마카티는 하루를 오롯이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이다. 여행자는 애쓰지 않아도 명품 쇼핑몰과 수준 높은 문화, 공원의 평온함을 두루 누릴 수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여행 속에서 마카티는 조금은 천천히 머물러도 괜찮다는, 유연한 여행의 방식을 제안한다.
Other Spots
허브 메이크 랩
HUB: Make Lab
마닐라 에스콜타 거리의 ‘퍼스트 유나이티드 빌딩(First United Building)’은 필리핀 아르데코 건축의 정수로 꼽힌다. 1928년 완공 이후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이곳은 최근 ‘변형적 재생(Transformative Reuse)’ 프로젝트를 통해 문화의 거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기존 건물을 보존하면서도 지역의 사회·문화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도시 재생의 대표 사례다.
변화의 핵심은 건물 안에 자리한 ‘허브 메이크 랩(Hub Make Lab)’이다. 2016년 예술가 그룹 ‘98B 콜라보레이터리’와 건물 관리 주체인 실리안텡 가문의 협업으로 조성된 이곳은 낙후된 구도심을 예술과 창업이 공존하는 생태계로 탈바꿈시켰다. 1층은 독립 상인들의 수공예 제품을 판매하는 마켓이자 주민들의 소통 공간으로 활용된다.
다양한 국적의 크리에이터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프로젝트를 논의하는 풍경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메자닌층의 ‘FUB 커뮤니티 박물관(FUB Community Museum)’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다. 실리안텡 가문의 기록과 예술가들의 활동상을 통해 에스콜타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아로세로스 도시 숲 공원
Arroceros Forest Park
마닐라 도심, 파시그강변에 자리한 자그마한 녹지 공원이다. 1993년 당시 마닐라시 정부와 비영리단체의 협력으로 조성된 이 공간은 과거 정부 청사가 있던 자리를 시민을 위한 공공 숲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다. 공원은 필리핀 국목인 나라(Narra)를 포함해 2만 그루 이상의 나무와 60종 이상의 조류가 서식하는 생태적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인위적인 조경을 최소화한 채 오랜 시간 천이 과정을 거쳐 온 결과다.
아로세로스 도시 숲 공원에서는 일상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가족과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는 모습은 이곳의 흔한 풍경이다. 여행자에게는 아열대 식생의 표본을 관찰하고, 마닐라가 도심 속 자연을 어떻게 보전하고 공유하는지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안티도트 Antidote
마카티의 포블라시온(Poblacion)은 낮보다 밤이 더욱 화려한 구역이다. 지역의 가장 높은 곳, 아임 호텔(I’M Hotel) 최상층에 자리한 안티도트는 야경 명소로 통한다. 루프톱 바 특유의 개방감을 갖춘 데다 마카티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360° 파노라마 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야경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 배치 덕분에 사진가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안티도트는 미식과 풍경이 결합된 ‘가스트로펍’을 지향한다. 감각적인 음악과 칵테일, 셰프의 정성이 담긴 요리는 마카티의 밤을 더욱 풍성하게 채우는 요소다.
Food
카벨 Cabel
2026년 미셸린 가이드 빕 구르망(Bib Gourmand)에 선정된 곳. 카벨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의 향토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선보인다. 대표 메뉴인 피양강 마녹(Piyanggang Manok)은 검은색 양념장인 파마파 이툼(Pamapa Itum)으로 맛을 낸다.
코코넛 과육을 태워 만든 숯가루에 강황, 갈랑갈, 레몬그라스 등 7가지 이상의 향신료를 섞어 만든, 일종의 페이스트다. 이 양념에 닭고기를 충분히 재운 뒤 요리한다. 직접 먹어 보면 고기에 배어든 숯불의 훈연 향과 향신료의 다채로운 풍미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Stay
더 마닐라 호텔 The Manila Hotel
1912년 완공된 필리핀 최초의 5성급 호텔로, 필리핀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비틀즈도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흔적은 호텔 곳곳에 아카이브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맥아더의 집무실과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가 세계 최초로 8체급을 석권했을 당시 입었던 저지 역시 그중 일부다. 호텔이 가진 가장 큰 자산 가운데 하나는 마닐라만을 향한 탁 트인 조망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곳에 머물 이유가 된다. 호텔 내부는 고전적인 품격과 현대적인 세련미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특히 역대 국가 원수와 국빈들이 머물렀던 스위트룸은 더 마닐라 호텔의 품격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더 마닐라 호텔은 오늘날에도 필리핀의 전통과 정체성을 보존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닐라에서 세련된 하루를 계획한다면 마닐라 파라냐케 ‘엔터테인먼트 시티’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더 솔레어 리조트’도 좋은 선택지다. 포브스 트래블 가이드 5스타를 8년 연속(2017~2024년) 획득했으며, 숙박과 미식, 쇼핑, 엔터테인먼트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의 기준을 제시해왔다. 솔레어 리조트는 필리핀 현대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로비와 공용 공간은 필리핀 거장들의 작품부터 현대 추상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으로 채워져 있다.
●CEBU 세부
카오하간 Caohagan
아무것도 없는 풍족한 섬이라니
필리핀 세부 막탄섬 앞바다, 올랑고 군도의 카오하간은 자연과 로컬의 삶을 원형 그대로 간직한 섬이다. ‘시세이도’ 화장품 광고 촬영지로도 유명하지만, 오히려 섬이 지켜 온 고유한 정체성으로 더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카오하간까지는 막탄섬 푼타 엥가뇨(Punta Engaño) 선착장에서 전통 보트 방카(Bangka)로 약 1시간이 걸린다. 섬의 자태는 출중하다. 마치 모니터 배경화면을 보는 듯한 선명함을 품고 있다.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백사장과 청량한 바다, 그리고 야자수가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답다’라는 한마디로는 부족하다.
카오하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사키야마 가쓰히코가 펴낸 <카오하간, 아무것도 없는, 풍족한 섬>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그는 전기와 수도가 귀하고 통신조차 원활하지 않은 환경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치’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오가가미 나오코의 영화 <안경>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통찰은 카오하간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사키야마는 카오하간을 매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상업적 개발을 최소화하고 원주민의 삶을 지켜내는 방패막이가 됐다.
최대 폭이 400m에 불과한 작은 산호섬에는 약 600명의 주민이 살아 간다. 좁은 공간에 조밀하게 모여 살아 가는 이들의 일상은 있는 그대로 공존의 미학이다.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어업을 이어 왔지만, 최근에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퀼트 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며 공동체의 자립을 이어 가고 있다.
카오하간은 호핑투어의 주요 기착지지만, 여행자에게 무엇을 소비할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롭다. 그래서 카오하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치’를 가장 충실하게 누릴 수 있는 섬이다.
보호강
Bojo river
마을 공동체가 되살린 지속 가능한 여행
세부 알로귄산(Aloguinsan) 지역의 보호강은 과거 무분별한 어업 활동과 벌목으로 심각한 환경 파괴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주민들은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됐다. 이는 단순한 자연 훼손을 넘어 지역 공동체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운 생존의 위기였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방 정부와 마을 주민들은 ‘생태 관광’이라는 대안을 선택했다. 강과 숲을 마을의 자산으로 복원해 낸 치유의 노력은 필리핀 최초로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최우수 관광 마을에 선정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보호강 투어는 양쪽에 대나무 지지대가 달린 전통 보트 방카(Bangka)에 올라 약 1.4km의 강줄기를 따라 이동한 뒤, 바다를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다. 울창한 맹그로브 숲과 하구의 정취, 시시각각으로 마주하는 생태적 다양성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한 자원이다. 그뿐만 아니다. 방카의 투명 바닥에 비친 바닷속 풍경 속에는 형형색색의 산호와 열대어, 그리고 큼지막한 거북까지 등장한다.
보호강 투어는 자연의 속도를 존중하고, 주민들이 지켜 온 생태적 가치를 여행자와 공유하는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이다. 투어 수익 또한 마을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쓰인다니, 뿌듯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올드타운
Cebu City Old Town
내밀한 아카이브, 그 풍경을 따라 걷는 길
올드타운은 16세기 스페인 탐험대부터 19세기 필리핀 상류층의 일상까지, 도시의 역사가 모여 있는 기록 보관소다. 좁은 골목마다 종교적 경외감과 시대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다. 이곳의 주요 유적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밀집해 있어, 돌아보기에 도보로도 충분하다.
동선의 시작점인 산토니뇨 성당(Santo Niño)은 필리핀 가톨릭의 심장으로 통한다. 1565년 레가스피(Legaspi) 장군이 건립한 이곳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로마 가톨릭 교회다. 내부에 안치된 ‘아기 예수상’은 마젤란이 1521년 추장 후마본과 그 부인에게 세례 선물로 건넨 것이다. 1565년 화재 현장에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이후, 현지인들의 수호자로 받들어지고 있다. 성당 앞마당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활기가 넘친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이들은 ‘캔들 벤더(Candle Vendors)’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당의 허가를 받아 활동하는 일종의 신앙 조력자들이다. 단순히 초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신도들을 위해 기도문을 읊어 주거나 촛불을 켜는 의식을 돕는다. 성당 바로 옆 광장에는 ‘마젤란의 십자가’가 자리한다. 1521년 4월14일,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원주민들에게 처음으로 가톨릭 세례를 거행한 뒤 세운 것이라 전해진다.
산토니뇨 성당에서 카사 고로르도 박물관(Casa Gorordo Museum)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다. 박물관은 1850년대 세부의 첫 번째 필리핀인 주교였던 후안 고로르도(Juan Gorordo) 가문의 저택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당시 상류층의 건축 양식인 바하이 나 바토(Bahay na Bato)는 필리핀 전통 가옥의 실용성과 스페인의 유럽식 석조 건축 기술이 결합한 형태다.
탐방의 마지막 스폿은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다. 본래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세부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스페인의 최후 방어 거점이다. 16세기 목조 요새로 시작해 18세기에 이르러 석조 구조로 완성된 이곳은 스페인 통치 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미국 식민지 시대에는 병영으로 활용됐다. 이어 일본 점령기에는 포로수용소로 사용되는 등 필리핀의 험난한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Other Spots
케네스 코본푸
Kenneth Cobonpue
세부의 기후와 자연 소재는 케네스 코본푸 디자인의 주된 요소다. 그의 쇼룸과 공장은 필리핀 전통 수공예가 현대 가구로 구현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장소다. 이곳은 제조와 전시,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공장에서는 등나무, 대나무, 마닐라삼 같은 자연 소재가 가공된다. 대부분 엮고 다듬는 작업으로, 숙련된 장인들의 손을 거친다.
쇼룸은 필리핀 자연의 유기적인 곡선과 현대적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는 갤러리다. 이곳에서는 가구가 단순한 기능을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이끄는 오브제로 작용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케네스 코본푸의 제품은 한국 내 공식 수입원을 통해서도 유통되고 있다.
아투아 미드타운 Atua Midtown
과거 호텔이었던 유휴 공간을 복합 문화 허브로 재생한 스폿이다. 2024년 9월 개관 이후, 이곳은 세부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로컬브랜드숍, 카페가 결집한 핫플레이스로 부상했다. 단순히 건물을 개조하는 차원을 넘어, 창의적 콘텐츠와 예술적 활력을 불어넣는 감각적 블렌딩이 성공한 케이스다. 아투아 미드타운은 여행자에게는 세부의 젊은 감각을 밀도 있게 경험할 기회를, 지역민에게는 교류의 플랫폼을 제공한다. 아투아 미드타운은 세부의 가장 세련된 오늘을 기록해 나가는 공간이다.
Stay
래디슨 블루 세부
Radisson Blu Cebu
세부 시티 중심부에 있는 5성급 호텔이다. 이곳의 가장 큰 경쟁력은 필리핀 최대 복합 쇼핑몰 ‘SM 시티 세부’와 직통으로 연결된 구조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여행자는 수백 개의 브랜드와 대형 마트, 다채로운 미식 공간을 편안하게 누릴 수 있다.
호텔의 로비 라운지와 올데이 다이닝 레스토랑인 ‘페리아(Feria)’ 역시 수준급이다. 이곳에서 제공하는 필리핀 현지식과 세계 각국의 요리를 결합한 뷔페는 투숙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효율을 중시하는 여행자에게 래디슨 블루는 안락한 숙소이자 도심을 연결하는 완벽한 플랫폼이다.
Food
유어 로컬 Your Local
세부 현지 미식 지형도에서 아세안 컨템퍼러리 비스트로의 기준점으로 평가받는 식당이다. ‘와규 큐브 스테이크(Wagyu Cubes Steak)’는 필리핀인들에게 친숙한 길거리 음식을 고급 다이닝으로 업그레이드해서 내놓은 상징적 메뉴다. 또, 칠리 크랩과 토르티야 칩을 곁들인 세비체는 아시아 전역의 풍미를 세부의 식탁 위에서 묶어 낸 것들이다. 미셸린 가이드의 빕 구르망은 ‘익숙함의 파격’이란 그들의 음식 설계에 주목했다. 현지 미식가와 젊은 세대가 세련된 한 끼를 위해 이곳을 찾는 이유다.
아토아 Ato-ah
미쉐린 가이드 셀렉티드(Selected)에 이름을 올린 레스토랑으로 필리핀의 친숙한 맛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캐주얼 다이닝을 선보인다. ‘아토’는 세부아노어로 ‘우리의 것’을 의미한다. 전통 ‘레촌’의 풍미를 활용한 타코 요리나 제철 해산물을 활용한 세비체 스타일의 샐러드는 이곳의 창의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메뉴 대부분은 자극적인 향신료를 절제하고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조리법을 사용하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인의 입맛에도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레이크 뷰 레 자댕
Lake View Les Jardin
2021년 디자이너 부부가 문을 연 이곳은 정원 산책과 미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스트로 보타니컬’ 레스토랑이다.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계단식 정원은 고산지대의 선선한 공기를 품고 있으며, 말루복 호수의 파노라마 뷰까지 갖췄다. 테라스형 식당의 곳곳에는 정크 조형물들이 놓여 있다. 버려진 금속을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시킨 디자인이다. 이곳의 요리는 프렌치 조리법에 발람반 지역의 허브와 식용꽃, 현지 채소를 재료로 완성된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앵거스 비프 패티로 만든 ‘레이크뷰 버거(Lakeview Burger)’와 수제 초리조와 레촌 카왈리를 듬뿍 얹어 낸 ‘레이크뷰 피자(Lakeview Pizza)’다.
아블리 세부 ABLI CEBU
미쉐린가이드 셀렉티드(Selected)에 선정된 디저트 숍이다. 세부 아르가오 지역의 전통 스펀지케이크인 ‘토르타(Torta)’를 기반으로 메뉴를 구성한다. 시그니처 메뉴는 ‘모르타(Morta)’. 아블리는 코넛 꽃 수액 발효주를 천연 효모로 사용하는 전통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세부 특산의 재료들을 더해 한 차원 높은 디저트로 완성했다. 이 외에도 세부아노 전통 요리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스낵, 샌드위치, 파스타, 면류 등 다채로운 메뉴를 선보인다.
아바카 베이킹 컴퍼니
Abaca Baking Company
2006년 세부에서 작은 브런치 카페로 시작해 현재는 세부를 대표하는 미식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바카 그룹’의 핵심 브랜드로, 수준 높은 크루아상을 선보이며 현지 베이커리 시장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곳으로 유명하다. 핵심 철학은 ‘스크래치(Scratch) 베이킹’에 있다. 냉동 생지 대신 매일 직접 반죽하고 구워 내는 방식을 고수하며, 최고급 재료와 36시간 발효 공정을 거쳐 빵 본연의 맛을 구현한다.
펀치드 커피 Punched Coffee
펀치드 커피의 가장 큰 특징은 로스터리 카페로서의 전문성이다. 매장에서 직접 원두를 선별하고 로스팅하여 최상의 풍미를 구현한다. 특히 호주식 플랫 화이트는 직접 추출한 에스프레소의 깊은 바디감과 부드러운 밀크 폼이 정교하게 어우러진다. 이 외에도 피스타치오 라떼 등 창의적인 시그니처 메뉴와 정통 브런치 요리가 외국인 여행자의 주목을 받는다.
하우스 오브 레촌
House of Lechon
레촌은 필리핀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하우스 오브 레촌’은 돼지 뱃속에 레몬그라스와 향신료를 채워 잡내를 잡고 풍미를 극대화하는 카르카르 스타일의 레촌을 구현한다. 세심한 온도 조절과 숯불 간격으로 구현한 일관된 맛은 미셸린 가이드가 주목한 요리의 비결이다. 식재료를 다듬고 돼지를 굽는 모습을 노출해 놓은 것도 특별하다. 활기찬 분위기도 매력 포인트! 생일자를 위해 직원들이 음악에 맞춰 군무를 펼치며 홀을 축제 현장으로 바꿔 놓는다.
*한-아세안센터는 한국과 아세안(ASEAN) 10개국(브루나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다. 이번 기획은 한-아세안센터의 주관으로 진행됐다. 마닐라와 세부를 여행하며 그곳의 자연과 문화, 역사와 비전에 대해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했다.
글·사진 김민수 에디터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한-아세안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