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AI를 활용해 현장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며 조직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현대차그룹)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아침 출근 후 컴퓨터를 켜면 AI가 밤새 들어온 업무와 회의 일정을 정리해 놓는다. 오늘 설계할 차량의 충돌 안전과 관련한 과거 시험 데이터를 찾아 유사 사례와 개선안을 정리하고 생산라인에서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AI가 부품 공급 경로를 다시 계산한다.
국내에서 발생한 차량 이상 증상을 입력하면 영국의 한 서비스센터에서 유사 사례를 찾아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다. 글로벌 시장에서 고객들이 남긴 수천 건의 제품 리뷰를 AI가 읽고 분석해 공통된 불만과 개선점을 추려낸다.
직원이 직접 자료를 찾고, 엑셀을 정리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데 하루 대부분을 쓰던 자동차 회사의 풍경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12일 공개한 AX(AI Transformation) 성과와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머지않아 현실이 될 법한 장면이다.
현대차그룹 뿐만 아니라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AI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폭스바겐은 올해부터 중국에서 자체 전자 아키텍처(CEA)를 기반으로 차량에 AI 에이전트를 탑재했다. 오는 2027년에는 주행과 콕핏 기능을 통합한 멀티 에이전트 AI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GM도 엔비디아와 손잡고 차세대 차량뿐 아니라 공장과 로봇까지 AI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트윈으로 조립라인을 가상 검증하고 생산 공정과 로봇 운용을 최적화하는 방식이다.
토요타 역시 우븐 시티에서 AI 비전 엔진(Vision Engine)과 행동 예측 AI를 활용해 사람과 차량, 인프라가 연결되는 새로운 도시 환경을 실험하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 BMW와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를 포함한 대부분 완성차 업체들이 방향은 달라도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이들과 다른 것은 여기에 사람을 먼저 놓았다는 점이다. AI 기술 자체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 무엇을 직접 가져가야 하고 무엇을 외부 기술로 활용할 것인지부터 구분한다.
진은숙 현대차·기아 ICT담당 사장은 "우리는 기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본다"고 했다. 특히 피지컬 AI와 자율주행처럼 고객에게 전달되는 상품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업스트림 영역은 파운데이션 모델부터 직접 개발하고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대차그룹 AI 'H Chat Pro'는 일반 사무직은 물론 연구직 포함 모두에게 개방돼 있어 직원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다. (현대차그룹)
더 큰 차이는 AI를 일부 전문가의 전유물로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차·기아 일반·연구직의 약 80%가 H Chat Pro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 7월 기준 이용자는 3만 명을 넘었다. 회의록 정리와 자료 검색에서 시작해 이제는 비개발자가 직접 업무용 AI 에이전트를 만드는 단계까지 왔다.
진 사장은 토큰 비용이 상당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연구원과 개발자에게 아직 사용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고 했다. 빠르고 다양하게 AI를 활용해보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과정 자체가 조직의 역량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위험도 감수한다. 진 사장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에게 비개발자가 만든 AI 에이전트가 사내 협업 플랫폼의 5000페이지를 삭제한 사례를 공유했다. 엔비디아 역시 비개발자의 AI 에이전트를 어떻게 통제할지 "카오스"라고 답했다.
아직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은 영역에서 현대차그룹은 일단 직접 사용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자신들에게 맞는 활용법과 통제 방식을 찾아가고 있는 셈이다.
정의선 회장이 직접 바이브 코딩 교육에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 사장에 따르면 정 회장은 AI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가능성과 한계를 이해한 점을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였다. 경영진부터 AI를 알아야 기술로 해결할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구분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 사장은 지금까지 현장에서 필요한 일을 AI로 해결하는 '바텀업' 과제가 대부분이었다면 앞으로는 차량 개발기간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처럼 기업의 목표에서 출발하는 '탑다운' 과제를 발굴하겠다고 했다.
자동차의 AI 기능은 지금 뒤쳐져 있는 경쟁사 누구라도 쉽게 따라잡을 수 있다. 획기적이거나 월등하게 앞서 나갈 수 있는 기술도 아니다. 생산 공정의 AI 역시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만 명의 직원이 AI와 함께 일하면서 축적한 경험과 데이터가 다시 연구개발과 생산, 서비스, 차량 경쟁력으로 연결되는 조직의 변화는 쉽게 복제하기 어렵다. 자동차보다 사람, 기술보다 일하는 방식을 먼저 바꾸려는 현대차그룹의 시도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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