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3박스 세단의 실루엣. 100여 년간 자동차의 표준이자 품격의 상징으로 도로를 지배했던 세단이 SUV의 파상공세 속에서 새로운 생존법을 찾고 있다. (오토헤럴드 DB)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엔진룸과 캐빈, 그리고 완벽히 분리된 트렁크가 빚어내는 황금 비율의 3박스 실루엣, 낮게 깔린 차체 위로 단정하게 닫히는 도어와 정숙한 실내.
격벽으로 트렁크와 완벽히 차단돼 하부 노면 소음과 화물의 잡소리를 걸러내는 캐빈룸으로 도로와 가장 가깝게 붙어 달리지만 어떤 종류의 자동차보다 조용하고 안락한 승차감을 선사한다.
여기에 낮은 무게중심이 안겨주는 안정적인 코너링과 품격 있는 사이드 프로파일로 자동차의 원형이자 오랜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100여 년간 승용차의 표준이자 사회적 성공의 상징으로 도로를 지배해 온 자동차가 바로 '세단(Sedan)' 이다.
귀족의 가마에서 3박스 구조로 진화한 자동차의 표준
1911년 미국 스피드웰(Speedwell)이 선보인 폐쇄형 승용차 '스피드웰 시리즈 11 세단(Series 11 Sedan)’. 상품 카탈로그에 '세단(Sedan)'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자동차로 기록돼 있다.
세단의 어원은 17세기 프랑스의 도시 스당(Sedan), 혹은 의자나 가마를 뜻하는 라틴어 '세데스(Sedes)'와 이탈리아어 '세디아(Sedia)'에서 유래했다. 귀족들이 타던 지붕과 창문 달린 의전용 가마의 형태가 마차 시대를 거쳐 폐쇄형 승용차의 뼈대로 이어졌다.
세단을 부르는 명칭이 나라마다 다른 것도 재미가 있다. 우리나라나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는 세단이라고 부르지만 영국은 살룬(Saloon), 프랑스는 베를린(Berline), 독일은 리무진(Limousine)으로 부른다.
자동차에 ‘세단’이라는 이름을 공식 차종명으로 제품 카탈로그에 처음 사용한 브랜드는 1911년 미국 스피드웰(Speedwell)이 선보인 폐쇄형 승용차 '스피드웰 시리즈 11 세단(Series 11 Sedan)’이다.
이 모델은 4기통 파워트레인을 탑재해 50마력의 출력을 내고 여기에 생전 처음 보는 3박스 형태에 10여 가지가 넘는 바디 스타일을 올려 큰 인기를 얻었다. 안타깝게도 스피드웰은 1913년 데이턴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아 1915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1920년대 에식스(Essex)와 포드가 값비싼 사치품이던 밀폐형 캐빈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 양산하면서 세단 대중화의 물꼬를 텄다. 1930년대 중반 차체 뒤편에 일체형 트렁크를 품은 노치백 설계가 도입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엔진룸-승객석-트렁크'의 황금 비율 3박스 세단이 완성됐다.
1950년대 미국 프리미엄 세단의 정점을 보여준 캐딜락 엘도라도. 완벽히 분리된 노치백 트렁크와 화려한 핀 테일은 당대 풍요의 상징이었다. (GM)
단순한 기능성에만 중점을 둔 각지고 투박한 형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세단에 급격히 매료되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기계 장치에 불과했던 자동차가 3박스 구조를 갖추면서 완전히 새로운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보닛에서 루프, 트렁크로 이어지는 미려한 실루엣과 풍만한 볼륨감 같은 다채로운 디자인 기교가 더해지면서 세단은 가장 완성도 높은 조형미를 뽐내기 시작했다. 세단을 ‘자동차 디자인의 원형이자 정수’라고 부르는 이유다.
세단은 아름다운 생김새 이상의 ‘자동차 공학적 결정체’이기도 하다. 후방 추돌 시 충격을 흡수하는 크럼플 존(트렁크)을 확보해 뛰어난 충돌 안전성을 갖췄고 격실 분리를 통해 노면 소음과 화물 잡소리(NVH)를 원천 차단했다.
여기에 세련된 공기역학과 안락한 승차감까지 결합되면서 세단은 지난 100여 년간 승용차의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표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세단,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 SUV 광풍에 흔들
30여 년간 미국 패밀리 세단의 간판이었으나 SUV 열풍에 밀려 북미 시장에서 단종된 '포드 토러스(Ford Taurus)'. (포드)
난공불락 같던 세단의 아성은 2010년대 이후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변화의 칼바람은 세단의 종주국 미국에서 가장 매섭게 몰아쳤다. 2018년 포드는 스포츠카 머스탱을 제외하고 토러스, 퓨전, 피에스타 등 전통 세단 라인업을 북미 시장에서 전면 단종하겠다고 선언했다.
GM 역시 쉐보레 임팔라와 말리부를 순차적으로 단종했고 스텔란티스(크라이슬러) 또한 크라이슬러 300의 생산을 중단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완성차 업체들도 세단 라인업을 축소하고 SUV, 미니밴, 해치백을 늘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현대차 준중형 세단 '그랜저' 1세대. 쏘나타, 아반떼와 함께 세단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SUV에 밀려 예전 같은 인기는 얻지 못하고 있다. (오토헤럴드 DB)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야가 탁 트이고 승하차 편의성은 물론 주말 레저 장비를 넉넉하게 실을 수 있는 도심형 SUV가 패밀리카의 표준을 대체하면서 세단은 설 자리를 잃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독 세단에 대한 신봉이 강했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1970~1980년대 코티나와 스텔라, 1980~1990년대 쏘나타와 '각그랜저'로 이어진 세단의 계보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중산층 진입과 사회적 성공을 과시하는 상징이 됐다.
그러나 한국 역시 이 절대 공식이 깨졌다. 기아 쏘렌토와 카니발, 현대 싼타페와 투싼 등 SUV와 미니밴이 연간 신차 판매 상위권을 독식하면서 '국민차' 타이틀도 내놨다. 체면 때문에 세단을 고집하던 사람들도 슈퍼카 브랜드와 제네시스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의 SUV를 눈치보지 않고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멸종 대신 변신... 전기차 시대 세단의 생존법
재규어 타입 01. 전면 투영 면적이 좁고 바닥에 낮게 깔린 세단 특유의 에어로다이내믹(공기역학)은 SUV가 넘볼 수 없는 무기가 되면서 전기차 시대에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오토헤럴드 DB)
그렇다고 100년 역사의 세단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세단은 스스로 형태를 바꾸며 영리한 생존 전략을 펼치고 있다.
전통적인 직각 노치백의 보수성을 벗어던지고 쿠페의 날렵한 루프라인을 결합한 4도어 쿠페(메르세데스 벤츠 CLS, 포르쉐 파나메라)와 완만한 패스트백 형태로 스타일을 진화시켰다.
특히 전기차(EV) 시대로의 전환은 세단에게 강력한 부활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1회 충전 주행거리와 배터리 전비(효율)가 최대 화두인 전기차 환경에서 전면 투영 면적이 좁고 바닥에 낮게 깔린 세단의 에어로다이내믹(공기역학)은 SUV가 넘볼 수 없는 무기다.
공기역학 계수(Cd) 0.21을 달성하며 전기차 시대 세단의 높은 효율성을 입증한 현대차 '아이오닉 6'. (현대차)
테슬라 모델 3와 모델 S, 현대차 아이오닉 6, 포르쉐 타이칸 등 공기저항계수(Cd) 0.20 안팎을 기록하는 유선형 전기 세단들은 동일한 배터리로도 SUV보다 훨씬 먼 거리를 고속으로 달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00년간 누려온 절대 왕좌에서는 내려왔지만 안락한 승차감과 극도의 에너지 효율, 그리고 유려한 실루엣을 무기로 미래 모빌리티의 첨단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확고히 다져가는 세단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고 진화해 나갈 것이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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