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공간은 엔진룸도, 차체 외관도 아닌 실내 디스플레이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최근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공간은 엔진룸도, 차체 외관도 아닌 실내 디스플레이다. 완성차 업체들은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를 미래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대형 화면과 인공지능 기반 음성인식,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게임 등 다양한 기능을 차량에 탑재하고 있다.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디지털 생활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다. 차량이 출발하면 영상 서비스가 중단되고 운전자의 시선을 요구하는 게임이나 콘텐츠도 이용할 수 없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와 고성능 컴퓨팅 시스템을 탑재했지만 운전자가 이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순간은 주차 중이거나 충전을 기다리는 시간에 집중된다. 자동차의 디지털 전환과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 속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테슬라다. 테슬라는 중앙 디스플레이를 통해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을 이용하는 '시어터' 기능과 게임을 즐기는 '아케이드' 기능을 제공한다. 하지만 전면 디스플레이의 영상 스트리밍은 기본적으로 주차 상태에서만 이용할 수 있으며 주행 상태로 전환하면 영상이 일시 정지된다. 일부 차량의 뒷좌석 디스플레이에서는 영상 시청이 가능하지만 운전자에게 제공되는 콘텐츠는 제한된다.
테슬라는 중앙 디스플레이를 통해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을 이용하는 '시어터' 기능과 게임을 즐기는 '아케이드' 기능을 제공한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현대자동차 역시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오스 커넥트'를 통해 차량 내 애플리케이션 생태계와 디지털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신형 그랜저와 신형 투싼 등에 적용된 새로운 시스템은 차량 기능 제어와 콘텐츠 이용,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 판매 이후에도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독형 콘텐츠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전략과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디지털 서비스가 실제 운전 환경에서는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다. 스마트폰과 달리 자동차는 운전자가 도로를 계속 주시해야 한다. 영상과 게임처럼 시각적 몰입을 요구하는 콘텐츠는 편의 기능을 넘어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율주행 기술의 수준이다. 현재 일반 소비자에게 널리 제공되는 운전자 보조 시스템은 미국자동차공학회(SAE) 기준 레벨2에 해당한다. 차량이 조향과 가감속을 동시에 보조하더라도 운전자는 주행 환경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언제든 개입해야 한다. 일부 업체가 '핸즈프리' 주행을 강조하지만 운전대에서 손을 떼는 것과 도로에서 시선을 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대자동차 역시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오스 커넥트'를 통해 차량 내 애플리케이션 생태계와 디지털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반면 레벨3 조건부 자율주행에서는 시스템이 허용된 조건에서 주행을 담당하는 동안 운전자가 지속적인 도로 감시 의무에서 벗어나 일정한 비운전 활동을 할 수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드라이브 파일럿(DRIVE PILOT)'이 대표적이다. 벤츠는 레벨3 시스템이 활성화된 특정 조건에서 운전자가 중앙 디스플레이로 영상을 시청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러나 레벨3 기술의 상용화는 예상보다 더딘 상황이다. 벤츠는 레벨3 양산차 인증을 확보했지만 실제 이용할 수 있는 도로와 속도, 기상 조건 등이 제한적이었다. 최근에는 기존 드라이브 파일럿의 확대보다 활용 범위가 넓은 레벨2 기반 운전자 보조 시스템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
법규 역시 자동차의 디지털 기능 확대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은 운전자의 주의 분산을 줄이기 위한 차량 내 전자장치 설계 지침을 마련하고 화면을 오래 바라보거나 복잡한 조작을 요구하는 기능을 주행 중 제한하도록 권고한다. 다만 이러한 규제는 기술 발전의 걸림돌이라기보다 운전자가 도로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가깝다.
결국 자동차 업계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늘어난 디스플레이와 소프트웨어 기능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제공할 것인가에 있다. 운전자에게는 주행에 필요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고 음성인식 등으로 주의 분산을 최소화하는 것이 우선이다. 반면 동승자에게는 별도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주차나 충전 중에는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업계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늘어난 디스플레이와 소프트웨어 기능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제공할 것인가에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자율주행 기술이 발전해 운전자가 실제 주행 책임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늘어나면 자동차의 실내 공간은 업무와 휴식, 콘텐츠 소비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자율주행 시스템의 안전성과 신뢰성뿐 아니라 운전 책임에 관한 법적 기준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현재 자동차 산업에서는 디스플레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이 자율주행의 실질적인 상용화보다 한발 앞서가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은 미래의 이동 경험을 구현할 하드웨어와 서비스를 먼저 준비하고 있지만 소비자가 이를 일상적인 주행에서 온전히 경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SDV 시대의 경쟁력은 더 큰 화면과 더 많은 애플리케이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이미 움직이는 디지털 기기로 진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운전자가 책임지고 움직여야 하는 교통수단이다. 지금 자동차 산업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즐길거리가 아니라 그것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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