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자동차 시승에 있어서 결코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없다. 얼어붙은 노면은 자동차의 정상적인 움직임을 느끼기 힘들게 만들고 돌처럼 굳어버린 타이어는 좀처럼 그립을 내지 않는다. 차체 곳곳에서 부싱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무도 겨울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겨울에 탑승할 만한 차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SUV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SUV들이 도심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이 공식도 조금씩 깨져가고 있지만 말이다.
이번에 시승하는 모델은 지프 랭글러. 이미 작년 말 신형 랭글러가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구형이 된 랭글러를 굳이 시승하게 된 이유는 ‘복기(復棋)’라고 할 수 있겠다. 자동차라는 물품이 대부분 신형이 구형보다 좋다는 것이 정설이기는 하지만, 다른 평범한 SUV와는 다른 랭글러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구형이라도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직접 만나봐야 알겠지만 사진 상으로 신형 랭글러는 현행 모델보다 몇 배는 고급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지프가 고급스러우면 안 된다는 법칙도 없지만, 랭글러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급스러움보다는 우직함, 넘치는 힘, 꾸미지 않은 매력이다. 그야말로 막 다뤄도 좋은, 임도 주행을 즐기는 운전자들의 장난감이라고 할까. 물론 그런 거친 임도 주행을 즐기는 여성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남성들이 더 많은, 그래서 마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마침 신형이 국내에 수입되기 전에 그 감각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랭글러라면 추운 겨울도 상관없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넓은 뒷트렁크를 열고 무심하게 스키장비 또는 겨울용 캠핑장비를 싣고 어디든 오지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도 무작정 파고들어가 여유로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그런 느낌이다. 그런 여러 생각들이 한 데 모여 극한의 추위가 약간 물러간 겨울에 랭글러를 타 보게 했다.
어릴 적 자동차 그림을 그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각형의 박스를 그리고 거기에 바퀴를 덧붙이곤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랭글러가 딱 그런 느낌인데, SUV조차 연비를 위해 공력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작금의 시대에 그런 박스 형태의 모습이 자동차라기보다는 운전자의 장난감 같다는 느낌을 부여한다. 차체에서 돌출되어 있는 플라스틱 휠하우스와 큰 지름의 타이어는 그야말로 임도 주행만을 고려한 디자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아마도 옛 시대의 SUV라는 자동차들은 대부분 박스 형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SUV들은 둥글둥글한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어나갔지만, 랭글러만큼은 약간의 장식을 더하긴 했어도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이제 개성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세월이 만든 개성이라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직함이 전통을 만들어나간다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7개의 세로 바로 구성된 프론트 그릴과 그 좌우에 위치한 원형 헤드램프는 지프의 상징. 시승차는 임도 주행 성능을 강화한 루비콘 모델이기 때문에 휠하우스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시승차의 색상인 하이퍼그린 색상과 대비되는데다가 차체에 조립 부품처럼 끼워맞췄다는 느낌도 주지만, 임도 주행 시 약간의 손상 정도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실용성도 갖고 있다. 그 아래에는 17인치 알루미늄 휠과 임도 주행에 최적화된 랭글러 전용 타이어가 장착되어 있다.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하드톱 루프는 원할 경우 제거할 수 있다. 걸쇠를 풀고 나사를 돌리는 수작업을 진행해야 하지만, 생각보다 무거운 루프를 제거하면서도 불평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이 차가 랭글러이기 때문일 것이다. 루프는 생각보다 튼튼한데다가 기본적으로는 롤오버 바가 있기 때문에 전복 사고에서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어 역시 90도 정도의 각도로 열리는데다가 공구를 이용해야 하지만 원할 경우에는 제거할 수 있다.
뒷모습 역시 박스형 SUV의 정석이다. 작은 크기로 돌출된 사각형의 테일램프는 예부터 이어져오는 랭글러의 상징. 바깥에 달려있는 스페어타이어 역시 임도 주행만을 고려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트렁크는 아래를 먼저 열고 그 다음 유리창을 젖히는 방식인데, 작은 짐을 적재할 경우에는 아래만 열 수도 있다. 전고는 체감 상 상당히 높은 편으로, 승하차 시에는 롤오버 바에 마련된 손잡이를 잡는 것이 편하다. 시승차에 풋 스텝이 없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랭글러의 실내는 심플하다고 할 수 있다. 대시보드는 반듯한 사각형이고 돌출된 부분이 거의 없는데다가 송풍구조차 원형으로 평범하게 되어 있다. 등장한 지 오래된 만큼 아날로그 계기반에서 보이는 초록색의 구식 도트화면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센터페시아 상단에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있지만 네비게이션은 없다. 윈도우 버튼이 센터페시아 중단에 몰려있는데, 도어를 제거할 수 있는 이 차의 성격 상 이런 방식을 적용했다고 보여진다.
랭글러의 남성다움을 반영한 듯 곳곳에 위치한 물품보관을 위한 공간은 그물 또는 선반으로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 대시보드 위에도 물품 보관을 위한 별도의 선반이 있는데, 이곳에 휴대폰 등 다양한 물품을 아무렇게나 올려두어도 운전에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워낙 디지털화 된 전자기기가 없다보니 스티어링 휠에 위치한 기능 조작 버튼이 오히려 낮설게 느껴진다. 대시보드 오른쪽에는 임도 주행 시 조수석 탑승자가 붙잡을 수 있는 손잡이도 있다.
변속기는 자동변속기를 적용하고 있지만 최근의 SUV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트랜스퍼 레버의 존재는 이 차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말해준다. 아직은 기계식 4륜구동을 적용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구동 변경을 위해 반드시 기어를 P에 넣을 필요는 없지만, 정지는 꼭 해야 한다. 작동 감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약간 아쉽지만, 계기반을 보면 확인이 가능한 수준이다. 트랜스퍼 레버는 신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시트는 5인승으로 직물을 적용하고 있지만 오염이 적으며, 부드럽게까지 느껴진다. 아무리 의자를 낮춰봐도 시트 포지션은 높은 편이고 모든 조작은 수동으로 진행한다. 2열 시트는 거의 직각으로 서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편안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이 차가 임도를 주로 주행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이 맞다. 트렁크는 상당히 넓고, 2열 시트가 평평하게 가라앉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넓은 적재공간을 쓸 수 있다.
랭글러의 파워트레인은 다양하지만, 시승차는 3.6L V6 펜타스타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고 있다. 6,350rpm에서 최고출력 284마력, 4,300rpm에서 최대토크 35.4kg-m을 발휘하며 지금은 구형이 되어버린 5단 자동변속기와 결합된다. 이 엔진은 약간의 개량을 거친 채로 신형 랭글러에도 탑재된다(출력도 거의 차이가 없다). 구동방식은 기본적으로는 후륜구동, 수동으로 4륜구동으로 변환할 수 있다.
오랜만에 키를 슬롯에 꼽고 돌려서 시동을 걸어본다. 랭글러라면 거친 이미지만 있었는데, 엔진이 상당히 정숙하여 오히려 깜짝 놀랐다. 회전수를 높이면 특유의 음색을 내긴 하지만 평범한 가솔린 엔진의 음 높이 수준이고 그보다는 차체 곳곳에서 들려오는 풍절음이 더 크게 들려온다. 박스형의 차체를 고려하면 풍절음도 적은 편으로 시내 주행에서는 의외로 조용하게 다닐 수 있고 음악 감상에도 전혀 방해받지 않는 수준이다. 거동 자체도 나긋나긋하지만 과속방지턱 등 요철을 넘을 때면 아무래도 승차감이 깨져버린다.
초반 기어비가 상당히 넓다. 65km/h에서 2단, 115km/h에서 3단으로 변속되는데, 임도 주행에서는 1단을 쓰는 일이 많을 것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세팅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고속도로 주행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 100km/h에서 2,100rpm을 기록하는 만큼 의외로 고속에서의 연료 소모는 적은 편이다. 110km/h를 기록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 이상의 속력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지만 경쾌한 가속 감각은 아닌지라 속력을 마구 올리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프론트 리어 모두 5링크 방식을 적용하고 있는 서스펜션은 의외로 직선 주행에서는 안정적으로 반응한다. 랭글러의 성격 상 코너링을 중시하는 자동차는 아니기 때문에 와인딩에서의 반응은 시험해 보지 않았지만, 요철을 넘을 때의 반응으로 짐작해보면 코너링을 즐기는 차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애초에 랭글러를 스포츠카처럼 운전할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서 나긋한 반응을 보이던 랭글러는 임도에 진입한 후부터는 그 성격을 180도 바꾼다. 주행 중 실수로 구동 변경을 하지 않은 채 생각보다 깊은 흙구덩이에 뛰어들었는데, 처음에는 빠져나오지 못해 당황했다. 그러나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레버를 4L 주행모드로 바꾼 후 가속 페달을 밟자 잠시 바퀴가 땅을 파고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구덩이를 탈출해 버렸다. 랭글러가 거친 임도 주행에 특화되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다.
산기슭을 따라 제법 경사가 있는 임도에도 올라본다. 깊은 흙구덩이도 쉽게 탈출하는 랭글러에게 이 정도의 임도는 평지에 가까운 듯 너무나 손쉽게 올라버린다. 단, 다른 SUV들과는 다르게 모든 것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라 가속 페달에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좌우로 흔들리는 차체로 인해 의자 위에서 몸도 같이 흔들리고 정신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나서 꾸준히 가속하게 된다. 불편함을 재미로 바꾸는 힘, 그것이 랭글러가 가진 독특함일 것이다.
랭글러는 이제 많이 세련되어졌다. 임도만 주행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도시 주행도, 고속도로 주행도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친 임도를 주행할 수 있는 능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아날로그적인 감각도 그대로이다. 임도 주행을 돕는 전자장비는 단 두 개, TCS와 HDC 뿐이다. 그러니 전자장비의 고장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감각을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임도 주행의 재미를 살릴 수 있다.
만약 랭글러의 실내를 장식하는 플라스틱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 거친 임도를 주행하는 감각은 딱 질색이라면 랭글러를 구입하면 안된다. 그러나 아직 가슴속에 미지를 정복하고 싶은 호기가 남아있다면, 많은 짐을 싣고도 어디든 떠날 수 있는 힘을 원한다면 랭글러는 큰 만족을 줄 것이다. 랭글러는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이고, 신형이 아닌 구형이라고 해도 너무나 유용한 주행 성능을 지니고 있어 이대로 역사의 뒤로 퇴장하기에는 아깝다. 좀 더 빨리 랭글러의 위용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조금은 후회로 남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