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시청회의 추억
지난 4월 20일 부산 디아브에서 아날로그라운지 시청회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베르그만(Bergmann) 갈더(Galder) 턴테이블을 앞세운 풀 아날로그 시스템이었는데, 소리가 말도 안 되게 좋았다. 참석자들도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특히 가미야 이쿠요가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로리스 체크나보리안이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생상스 오르간 교향곡 2악장은 시연 후 LP 사진을 여러 분이 찍어가셨을 정도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날 시청회의 숨은 공신은 인티앰프였다. 흔히 시청회에는 분리형 앰프가 나서기 마련이지만 이날은 8옴 150W, 4옴 300W 인티앰프가 홀로 나섰고, 단 몇 곡 만에 자신의 진가를 각인시켰다. 만약 이 인티앰프가 없었다면 라이라 카트리지도, 에어타이트 포노앰프도, 에스텔론 스피커도 빛을 잃을 뻔했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열린 하이파이클럽 정기 시청회에서도 그 가격표에 놀라고 소리에 감탄한 인티앰프이기도 하다. 바로 이번 리뷰의 주인공인 트루 라이프 오디오(True Life Audio)의 TSI-300이다.
트루 라이프 오디오
트루 라이프 오디오(TLA)는 그리스 제작사다. 낯선 분도 많으시겠지만 그리스에는 의외로 명문 오디오 제작사들이 많은데 이데온(Ideon), 입실론(Ypsilon), 필리움(Pilium) 등이 대표적이다. 트루 라이프만 해도 캐나다의 하이엔드 턴테이블 메이커 크로노스 오디오(Kronos Audio)와 협업하고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크로노스 오디오의 진공관 포노앰프 설계를 트루 라이프 오디오가 맡고, 트루 라이프 오디오의 섀시 디자인과 제작을 크로노스 오디오가 맡는 식이다.
트루 라이프 오디오는 1995년 대학에서 화학과 전자공학을 전공한 벨리사리오스 조르지아디스(Velissarios Georgiadis) 씨가 설립했다. 하지만 그 출발은 훨씬 오래되어서 벨리사리오스 씨의 아버지 아리스토메니스(Aristomenis) 씨가 1957년부터 트랜스포머를 제작했고, 벨리사리오스 씨는 일찌감치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다. 트루 라이프 오디오는 초창기 자신들의 제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어쿠스틱 솔리드(Acoustic Solid), 마이소닉랩(My Sonic Lab) 등의 제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벨리사리오스 씨의 아들까지 합류했다. 3대가 함께 하는 패밀리 기업인 셈이다.
현행 라인업
앰프 제작자로서 트루 라이프 오디오의 가장 큰 특징은 증폭 소자로서 진공관과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모두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모든 제품이 하이브리드 설계는 아니어서 프리앰프는 진공관으로만 이뤄졌다. 또 인티앰프나 파워앰프의 경우 전원부를 2개로 나눠 각각 진공관과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책임지도록 설계한 점, 토로이달 트랜스 대신에 EI나 UI 트랜스를 쓰는 점도 눈에 띈다. 역시 트랜스포머 전문 제작사에서 출발한 회사답다.
트루 라이프 오디오의 이 같은 특징은 현행 라인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플래그십 슈프림(Supreme) 시리즈에 SSA-350 하이브리드 모노블록 파워앰프와 SSP-1 진공관 프리앰프, 트루(True) 시리즈에 TSA-300 하이브리드 스테레오 파워앰프와 TSI-300 하이브리드 인티앰프, TSP-1 진공관 프리앰프가 포진해 있다. 결국 이번 시청기는 트루 라이프 오디오의 유일한 인티앰프인 셈. EI 트랜스는 프리앰프에, EI 트랜스와 UI 트랜스는 파워앰프와 인티앰프에 투입됐다.
- SSA-350 : 8옴 180W, 4옴 350W. 진공관(GZ32 NOS, 6J5 NOS) +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 SSP-1 : 전원부 증폭부 2섀시 디자인. 진공관(GZ32 NOS, 6J5 NOS)
- TSA-300 : 8옴 150W, 4옴 300W. 진공관(12AU7 NOS) +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 TSI-300 : 8옴 150W, 4옴 300W. 진공관(12AU7 NOS) +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 TSP-1 : 진공관(12AU7 NOS)
TSI-300 살펴보기
아날로그라운지 시청실에서 다시 만난 TSI-300은 역시 거대한 위용을 뽐냈다. 가로폭이 500mm, 높이가 252mm, 안길이가 520mm나 되는 자이언트급 덩치를 자랑한다. 무게는 55kg. 전면에는 왼쪽에 입력 선택 노브, 오른쪽에 볼륨 노브가 있고, 가운데에 전원 버튼, 볼륨 노브 밑에 뮤트 버튼이 있다.
양 측면은 안에 방열핀이 숨어 있으며 겉에는 TLA라는 회사명이 각인돼 있다. 후면은 입력단자(RCA 2, XLR 2)와 스피커 터미널이 미러 형태로 배치됐다. 상판에는 그릴이 덮여진 6개의 환풍구와 방열핀이 노출됐다.
TSI-300은 프리앰프부에 진공관(12AU7 NOS), 파워앰프부에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투입, 8옴에서 150W, 4옴에서 300W를 내는 인티앰프다. 요즘 나오는 진공관이 아니라 1970년대에 나온 NOS(New Old Stock) 진공관을 쓰는 점이 눈길을 끈다. 전압 게인은 30dB로 인티앰프로는 평균치다. 최대 입력 전압은 1V rms, 입력 임피던스는 최대 140k옴, 최저 40k옴, 앰프의 광대역 특성을 알 수 있는 밴드위쓰(통상 -3dB 기준)는 300 kHz에 달한다.
하이브리드 설계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입력단에 진공관을 투입한 슈프림 시리즈의 프리앰프와 파워앰프와 달리, 입력단에 입력 트랜스를 채택했다. 클래스 A 증폭, 제로 피드백 설계의 프리앰프부는 2개의 12AU7이 투입됐는데 첫번째 12AU7은 전압 증폭, 두 번째 12AU7은 버퍼 역할을 맡는다. 한 개가 2채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12AU7이 쌍3극관이기 때문이다. 클래스 AB 증폭의 파워앰프부에는 바이폴라 트랜지스터가 투입돼 2차 전압 증폭 및 전류 증폭(출력)을 담당한다. 참고로 트루 라이프 오디오에서는 트루 시리즈에 12AU7, 슈프림 시리즈에 6J5 등 리니어리티가 좋은 쌍3극관이나 3극관만을 쓴다.
전원부 설계
진공관 프리앰프부에는 EI 코어 트랜스(전원)와 초크 트랜스(평활)가 투입돼 12AU7에 고전압을 공급한다. 리플 제거용 초크 트랜스까지 투입된 것을 보면 전형적인 진공관 앰프 전원부 설계다. 파워앰프부에는 코일을 2조 감을 수 있는 UI 코어 트랜스와 다수의 평활 커패시터가 바이폴라 트랜지스터에 대전류를 공급한다. 어느 경우에나 토로이달 코어 트랜스를 안 쓴 점이 눈에 띄는데 일부 제작사에서는 토로이달 트랜스가 누설자속이 적어 효율은 높지만 처음 전기가 들어올 때 쇼트에 가까울 정도로 대전류가 흐른다는 이유로 기피하고 있다. 이에 비해 EI 트랜스는 자기저항이 일정해서 음질에 치명적인 시간 지연 회로가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다.
볼륨단 설계
끝으로 살펴볼 것은 리모컨이 기본 제공되는 볼륨단으로, 션트 어테뉴에이터(shunt attenuator)를 통해 48스텝으로 작동한다. 션트 어테뉴에이터는 1개의 입력 저항과 이에 병렬로 연결된 다수의 출력 저항의 저항 비로 볼륨을 조절하는 장치. 48스텝이면 47개의 출력 저항(1스텝은 접지 직결. 최저 볼륨)이 필요하다. 션트 어테뉴에이터는 이처럼 입력 신호가 출력 저항을 빠져나올 때까지 통과하는 접점 부위가 1개(입력 저항+출력 저항)라는 장점이 있다. 이에 비해 퍼렐렐(병렬) 어테뉴에이터는 다수의 입력 저항과 다수의 출력 저항이 병렬연결된 형태여서 접점 부위가 2개(입력 신호+입력 저항, 입력 저항+출력 저항)라는 단점이 있다.
TSI-300 들어보기
서울 송파구 잠실동 아날로그 라운지 시청실에서 진행한 TSI-300 시청은 앞서 언급한 부산 디아브 시청회 때와 동일한 주자들이 총출동했다. 베르그만 갈더 턴테이블과 오딘(Odin) 톤암, 라이라(Lyra) 아틀라스 람다(Atlas Lambda) SL MC 카트리지, 콘솔리데이티드 오디오(Consolidated Audio) 승압 트랜스, 에어타이트(Air Tight) ATE3011 포노앰프, 에스텔론(Estelon) XB 다이아몬드(Diamond) MKII 스피커다.
파워케이블은 쿠발라 소스나(Kubala-Sosna) 리얼라이제이션(Realization), 인터케이블은 쿠발라 소스나 일레이션(Emotion)과 리얼라이제이션, 스피커케이블은 텔루륨 Q(Tellurium Q) 스테이트먼트(Statement) II를 동원했다.
아티스트 The Anthony Wilson Trio
곡 Theme From “Chinatown”
앨범 Jack Of Hearts
기타의 자연스러운 저음이 듣기에 너무나 편하다. 그야말로 소프트한 터치감이다. 확실히 LP를 제대로 들으면 스트리밍 재생 때와는 무대의 공간감이나 투명도, 소릿결 자체가 달라진다. 인티앰프 TSI-300에 집중해 보면 지금이 인티앰프 재생이 맞나 싶을 만큼 안길이가 긴 입체적인 무대가 눈에 띈다.
추정컨대, 프리앰프부에 리니어리티가 좋은 쌍3극관, 파워앰프부에 대전류를 흘릴 수 있는 바이폴라 트랜지스터가 투입된 만큼 양 진영의 장점만을 고루 취한 것 같다.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처럼 폼이 넓고 저음의 에너지가 풍만하다. 음들을 곱고 잘게 포말처럼 부숴 넓게 퍼트리는 것도 TSI-300의 특징. 앰프가 그냥 꿈틀꿈틀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아티스트 웅산
곡 안녕이란 두 글자는 너무 짧죠
앨범 사랑 그 그리움, Vol.3
처음부터 웅산의 뜨거운 목소리가 필자의 가슴을 찔러온다. 칠흑 같은 무대 위에 갑자기 등장한 보컬은 귀기마저 불러일으킨다. 무서울 정도의 표현력과 에너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음끝 하나하나가 살아있다는 느낌. 그러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들이대지 않는 모습이 대단한데, 바로 동일한 지점에서 노래하고 연주한다.
아무리 4옴에서 300W를 낸다고 하지만 8옴 150W 인티앰프가 이렇게 견고한 무대와 흔들림 없는 이미지를 선사할 수 있을지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증폭부의 하이브리드 설계, 전원부의 2단 설계, 육중하고 두터운 섀시 디자인, 이 모든 것의 시너지 효과로 볼 수밖에 없다. 개인 시청실에서 쓰고 있는 B&W 801 D4에 물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아티스트 Aaron Neville
곡 Everybody Plays The Fool
앨범 Warm Your Heart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퍼커션은 미끈하면서도 탄력적인 음을 뽐내고 아론 네빌은 특유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러다 갑자기 시청실 바닥을 내리찍는 퍼커션의 초저역! 전에 부산에서 들었던 뵈젠도르퍼 피아노 연주에서도 준비 동작 전혀 없이 쏜살처럼 급습해오는 초저역의 압력에 많은 분들이 놀라셨는데 이번에도 비슷하다. 이 정도면 이 세상에 못 울릴 스피커가 없을 것 같다.
의외인 것은 입체적으로 펼쳐진 무대와 좌판처럼 좌악 펼쳐진 여러 악기들로, 그 사이사이 공간이 꽤나 널찍하다. 또한 거의 모든 음들이 메마르거나 흐릿하지 않고 대신 촉촉하고 선명하고 활기차서 저절로 흥겨워진다. 불분명한 구석이 단 1도 없다. 앰프가 존경스러울 정도다.
지휘 Loris Tjeknavorian
오케스트라 Royal Liverpool Philharmonic Orchestra
곡 Symphony No. 3 In C Minor, Opus 78
앨범 Saint-Saëns: Organ Symphony
부산 시연회 현장을 뒤집어놓았던 바로 그 곡이다. 디지털 스트리밍 음원으로는 들을 수 없는 희귀 LP다. 처음부터 이 곡 특유의 스케일과 스피드, 위엄과 권위가 시청실을 압도한다. 음들을 움켜잡고 가는 앰프의 그립력이 장난이 아니다. 에스텔론 스피커 덕도 많이 봤지만 음들 하나하나가 굼뜨거나 미련스럽지 않고 경쾌하고 가뿐하다. 오케스트라 여러 움들이 쏟아져 나올 때도 뭉치거나 허둥대지 않는다.
고음은 재빠르되 가볍지 않고, 저음은 묵직하되 둔하지 않다. 무엇보다 필자의 심장을 이렇게 두근거리게 하는 초저음의 압력이 대단하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잔잔한 호수처럼 천변만변하는 앰프가 이젠 섬뜩할 정도다. 막판 파이프오르간이 거대한 숨을 내몰아쉴 때는 바로 그 악기 앞에서 듣는 것 같았다. 엄청난 다이내믹 레인지의 세계다.
총평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싶다. 트루 라이프 오디오의 인티앰프 한 대에 이처럼 녹다운 된 것이. 이날 들었던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 그중에서도 시청실 바닥이 울릴 정도로 몰아닥친 파이프 오르간의 초저음은 아마 평생 기억될 것 같다. 그렇다. TSI-300은 인티앰프에 대한 필자의 모든 상식과 선입견, 편견을 깨뜨린 앰프다. 이보다 훨씬 비싼 분리형 앰프라 해도 이 곡을 이 정도로 실감 나게 재현하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 같다. 오디오 애호가로서 다시 한번 제작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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