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말기, 당시 당나라 소금 장수 출신의
'황소'가 일으킨 황소의 난 때문에
당나라의 사정은 불안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신라에서 온 젊은 유학생인 최치원이
황소를 엄히 꾸짖는 '토황소격문'을 썼고 그 글을 읽은
황소가 놀라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입니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가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입니다.
당나라로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가
최치원에게 말했습니다.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 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6년 만에 18세 나이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치원을 천재라고 말하지만
그는 스스로 '남이 백의 노력을 할 때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고 말하는
노력형 천재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최치원의 노력에도 한계는 있었는데
바로 신분제도인 골품제와 신라 말의
어지러운 정세였습니다.
골품제는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정해지는
신라의 엄격한 신분 제도였습니다.
진골도 성골도 아닌 6두품인 최치원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 관등 가운데
6 등위인 아찬까지 올라갔지만, 그의 벼슬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또한 급속히 무너져 내리는 신라 말기의
사회를 바로잡고자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개혁 정책으로 올렸지만, 지역 호족들의 반발로
실패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세워질 때
그 고려의 건국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이
6두품 출신의 관리들이었다고 합니다.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부당하게 차별받던
사람들이 분노하는 힘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차별이 가진 위험성을
항상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