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예측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은 모빌리티 세상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듯 하다. 빠르게 진행될 듯했던 친환경 파워트레인으로의 전환 속도가 급격하게 둔화된 것. 전쟁, 보호무역 대두 등 거시적 관점에서도 여러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아직 높은 가격과 낯선 충전 생태계 자동차 제작사에게는 내연기관 모델 대비 낮은 수익률 등 보다 실질적인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결국은 거시적 불안감과 실질적 부담이 어우러지면서 친환경 자동차로의 전환 속도가 느려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30년 또는 2035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던 내연기관 자동차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의 생애 첫 자동차 구매가 줄어들면서 미래가 어두웠던 선진국 자동차 시장에서는 가성비가 우수한 내연 기관 자동차의 판매 연장은 시장 자체의 생명력 부활에도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즉, 친환경 모빌리티로의 전환 지체는 지구 온난화라는 거대 담론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한 숨 돌릴 수 있는 쉼표가 될 수도 있다는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다.
자, 그런데 이런 와중에 적잖은 자동차 제작사들이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앞으로 몇 해만 사용하면 될 줄 알았던 내연 기관 모델을 더 오래 판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간이 애매하다. 새로운 내연기관 모델을 개발하여 출시하기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요즘 자동차 모델의 수명이 페이스리프트 등의 수명 주기 관리를 포함하여 6~7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5~8년 정도 내연기관 모델을 더 판매한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신모델의 개발에 최소한 3년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새로운 내연 기관 모델의 개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플랫폼이다. 모델과는 달리 자동차의 기본 구조가 되는 플랫폼은 수명이 훨씬 길다. 따라서 만일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내연 기관 모델용 플랫폼이 이미 수명 주기의 끝부분에 와 있는 경우에는 플랫폼의 한계 때문이라도 새로운 내연 기관 모델을 개발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 모델을 개발한다고 해도 투입되는 개발비에 비하여 확실한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생명 연장 대책’이다. 즉,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대신 기존 모델을 최대한 업데이트하여 상품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모델의 신선도나 첨단 기술의 적용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품질 안정을 통한 높은 신뢰도와 사양 추가에도 불구하고 개발비 회수에 따른 원가 구조 개선으로 극강의 가성비를 노릴 수 있다. 즉, 새로운 기술과 신모델에 민감하지 않고 보편적인 관점을 가진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와 모델의 경우에는 상당히 효과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 예가 아마도 볼보일 것이다. 볼보가 사용하는 내연 기관 플랫폼은 SPA 플랫폼과 CMA 플랫폼이 있다. 순수 전기차도 대응할 수 있는 CMA 플랫폼과 달린 중형급 이상에서 사용하는 SPA 플랫폼은 내연 기관 모델용 플랫폼이다. PHEV까지가 한계다. 참고로 이름만 보면 후속 플랫폼인 것처럼 보이는 SPA2 플랫폼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 따라서, 볼보의 중형 및 대형 내연 기관 모델은 SPA 플랫폼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 SPA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첫 모델인 XC90이 첫 선을 보인 것이 2015년. 그러니까 SPA 플랫폼은 시장 기준으로도 이미 열 살이나 먹은, 즉 수명 주기의 황혼기에 접어든 플랫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SPA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내연 기관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최근 국내에 선보인 XC90은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모델이다. 즉, 기존 모델의 생명 연장 전략을 선택한 모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볼보에게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첫번째 이유는 브랜드와 고객군의 성격이다. 볼보는 고관여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첨단 지향 혹은 고성능 지향 브랜드가 아니다. ‘스웨디시 럭셔리’라는 테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늑한 실내와 중후한 디자인 등 안정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고객군에게 어울리는 브랜드다. 고성능 디비젼이었던 폴스타는 전기차 전문 브랜드로 독립하여 볼보의 이미지는 더욱 안정 지향으로 자리잡았다.
게다가 XC90은 20세기에는 왜건으로 라이프스타일 패밀리형 자동차를 이끌었던 볼보를 21세기의 라이프스타일 장르인 크로스오버 SUV에서도 견고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이끈 21세기 볼보의 기함이기도 하다. 따라서, XC90은 신형에 치중하는 고객군을 상대하는 모델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볼보는 두 번의 페이스리프트를 통하여 XC90을 착실하게 업데이트해 왔다. 2019년의 첫 번째 페이스리프트에서는 모든 내연 기관을 최소 마일드 하이브리드에서 최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까지 100% 부분 전동화를 마쳤고, 최근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AAOS, 즉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 운영체제를 가장 먼저 선택한 브랜드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작년에 이루어졌고 최근 국내에 선보인 두 번째 페이스리프트는 나이가 느껴지던 실내와 외관 디자인을 새롭게 하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하드웨어를 더 커진 스크린과 엔비디아 드라이브 오린 SoC로 업그레이드하는 등 향후 몇 년 동안은 전혀 문제가 없을 수준으로 리프레시 하였다.
그리고 눈 여겨 볼 또 하나의 지점은 고급 사양의 기본화다. 국내 도입 XC90은 모두 세 가지 트림. 그런데 중간 트림부터 에어 서스펜션이 기본 적용된다. 에어 서스펜션은 프리미엄 브랜드라도 하더라도 고가 모델에만 적용하는 고급 하드웨어다. 그런데 볼보 XC90은 1억원 미만의 트림에서도 에어 서스펜션을 기본 적용하는 것. 이것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번째는 고객들에게 최상의 가성비를 느낄 수 있도록 사양을 구성하여 부족한 모델의 신선도를 상쇄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최신형 플랫폼에 비하여 어쩔 수 없이 열세인 NVH 및 승차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XC90은 전기차의 매끄러움을 경험한 고객들을 100% 만족시키고, 신세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최신형 모델들과 견줄 정도의 주행 질감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볼보 브랜드, 그리고 브랜드의 기함인 XC90의 고객층이 원하는 믿음직한 느낌, 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그리고 바우어 & 윌킨스 오디오의 사운드 등 첨단보다는 고급스러움을 중시하고 차량의 대체 주기가 짧지 않은 볼보 브랜드 고객의 성향에 잘 어울린다.
요컨대 브랜드와 고객의 성향에 어울린다면 굳이 첨단 – 최신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주류 시장의 보편적 고객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보편적 – 보수적 시장의 반대인 첨단 – 미래적 시장을 겨냥하는, 즉 신기술과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이른바 얼리어답터 또는 개척자 지향적 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에는 ‘새로움’이 제품 경쟁력의 핵심이 된다.
최근 현대는 새로운 수소 연료전지 자동차인 디 올 뉴 넥쏘를 공개했다. 7년만에 공개되는 디 올 뉴 넥쏘는 디자인과 상품성 등에서 뚜렷한 진화를 보여주었다. 더 커진 차체는 넉넉한 적재 공간과 넓어진 실내 공간으로 기존 고객들이 아쉬워했던 패밀리 SUV로서의 경쟁력을 강화했으며, 높아진 출력과 주행 거리는 최신 전기차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은 출력을 발휘하면서도 배터리 전기차를 능가하는 항속 거리라는 수소차의 상품성을 확립했고, 그리고 최신형 전기차 수준의 새로운 편의 장비를 제공함으로써 최신형 전기차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양을 갖추었다. 즉, 상품성을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수소 생태계의 첨병인 디 올 뉴 넥쏘에게는 상품성 강화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면에서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첨단 기술, 내연 기관 모델은 물론 최신형 전기차를 능가하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디 올 뉴 넥쏘는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미래를 보여주는 쇼 케이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디 올 뉴 넥쏘는 부족했단 수소 발전기로서 전기차를 능가하는 장시간 V2L 기술 정도가 눈길을 끌었을 뿐이다. 첨단 쇼 케이스라고 하기에 가장 아쉬웠던 점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구형 2세대 플랫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기차 전용 E-GMP 모델은 고사하고 이미 현대차 그룹의 내연기관 모델들도 모두 3세대 플랫폼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여 첨단 수소차라는 디 올 뉴 넥쏘가 이전 모델과 같은 2세대 플랫폼 기반이라는 점이다. 구형 플랫폼에 새로운 기능들을 이식하는 수고를 감수한 점은 인정하지만 신세대 플랫폼의 미끄러운 주행 질감과 우수한 조종 성능을 이식할 수는 없었다. 요컨대 디 올 뉴 넥쏘는 기존 모델에 새로운 디자인과 대폭적 사양 업그레이드를 추가한 광범위한 마이너 체인지 모델이었던 것.
기존 플랫폼을 유지한 점은 개발비 및 예산의 제약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아쉬움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전환식 조작계의 이식이다. 인포테인먼트 메뉴와 온도 조절 장치의 매뉴를 전환하는 터치식 제어 패널인 전환식 조작계는 창시자인 기아에서도 점차 퇴출되고 있는 구형 방식이다. 게다가 현대차는 전환 조작계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디 올 뉴 넥쏘는 기아의 구형 사용자 인터페이스인 전환 조작계를 적용한 것일까?
물론 속사정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 내부의 기술적인 내용보다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것, 특히 새로운 것에 불편함과 추가 비용 지출을 서슴지 않는 얼리 어답터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경험이다. 그런데 오히려 낡은 인터페이스라니! 이것은 완벽한 패착이다.
이렇듯 볼보의 생명 연장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디 올 뉴 넥쏘의 구형 플랫폼 유지 및 이질적인 기존 인터페이스의 채용은 치명적인 패착이 될 우려가 크다.
기술적으로는 비슷한 전략이라고 해도 그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요즘처럼 과도기에, 게다가 모델 단위의 과도기적 생명 연장책은 조심해서, 그리고 섬세하게 구사할 필요가 있다.
답은 고객층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글 / 나윤석 (자동차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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