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에는 <어쩔수가없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쩔수가없이.
솔직히 한국 영화에 마땅한 답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영화티켓의 가격은 비싸지면서도 막상 보면 “자자 선수 입장”같은 대사 때문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이게 영화지’ 싶은 게 없다. 그저 넷플릭스에서 본 것 같거나, 넷플릭스에서 곧 볼 것 같은 영상일 뿐이다.

그런 환경에서 나온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드디어 충무로 3대 허언인 “나의 이번 영화는 진짜 재미있는 오락영화”라는 말을 현실로 이룰 뻔 한 영화였다. 실제로 그의 영화 중 가장 웃겼다. 하지만 곧 나는 공포에 빠져들고 말았다. 클라이맥스에서 ‘스프링뱅크15’ 위스키가 나왔거든.
그렇다. 이 영화는 음주 바이럴 영화다. 최근 (일 할 때를 빼고) 금주를 실천 중인 마시즘은 무방비로 이 영화를 봤다가 다리가 호달달 떨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더듬다가 영화관을 뛰쳐나와 바비큐와 위스키를 찾을 뻔했다. 젠장 내가 잊었다. 박찬욱 그의 술 취향을!
깐느박의 위스키 취향

우리는 박찬욱을 올드보이와 금자씨의 피칠갑 스토리맨으로 기억하면 안된다(공동경비구역 JSA는 더욱 아니다. 그건 박찬욱클론이 만든 게 분명해). 그의 지난 작품 <헤어질 결심>부터는 굉장히 아름답고 우아한, 하지만 여전히 기괴한 느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을 보며 드디어 대중의 눈높이로 깐느박이 내려온 건가 싶었는데 아차! 위스키가 옥에 티였다.

<카발란 솔리스트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
카발란은 일반인들은 ‘그냥 양주면 양주지 저게 무어냐?’ 할 것 같은 위스키다. 하지만 위스키를 다양하게 마신 사람들은 ‘저것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대만에서 시작된….’으로 시작되어 입이 근질근질한 할 이야기가 많은 위스키다. 그때 깨닳았다. 확실히 박찬욱 감독은 대중보다는 약간 무언가에 미쳐있는 광인들을 더 미치게 만드는데 화신인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의 흥행성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영화에 등장한 카발란 위스키는 국내에서 매출이 427%나 증가했다는 사실은 안다. 박찬욱 감독은 과거 비디오가게가 아니라 위스키 바를 차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최신작인 <어쩔수가없다>에서 보여줄 위스키는 무엇이었을까?
금주 9년 차 만수도 스프링뱅크는 어쩔 수 없다

<어쩔수가없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제지공장에서 해고된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경쟁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없애간다. 마지막에 그는 만수는 제거대상인 최선출의 집에 ‘위스키 2병’을 들고 간다. 그런데 곧 죽을 이 인간은 일면식도 별로 없는 그를 집안에 들여주고 함께 위스키를 나눈다.

술을 모르는 시네필들은 ‘영화가 끝날 때 되니까 개연성이고 뭐고 그냥 진행시키는구나’라며 박찬욱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위스키광이 이 장면을 본다면 “절친도 아닌 게 ‘스프링뱅크15’를 들고 마시자고 찾아와? 그렇다면 버선발로 맞이해야 하는데?”라는 그런 녀석인 것이다.
그도 그럴게 스프링뱅크는 세계적으로 위스키 애호가들의 극찬을 받고 있지만, 막상 생산을 너무나 적게 해서 구하기 힘든 술 중 하나다.
사실 내가 감독이었어도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일반인 노동자들이 좋아하는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정도 아니면 그냥 ‘윈저’나 ‘캪틴큐’로 보내버렸을 텐데(…). 이게 바로 같은 코미디를 만들어도 감독의 기품이 들어있을 수 있는 이유 같다. 왜냐하면 스프링뱅크는 작중 인물들의 상황과 닮아있기 때문에.
스프링뱅크와 펄프맨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이다. 일도 취미도 모두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스프링뱅크 증류소 역시 그렇다. 굉장히 작은 시골에 있는 스프링뱅크는 일단 3가지가 유명하다.
- 5대째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 모든 제조과정을 한 곳에서 해결한다
- 몰트(보리) 건조도 다 수작업으로 한다

때문에 스프링뱅크는 ‘타협하지 않는 품질과 완성도’의 싱글몰트 위스키로 유명한 것이다. 1828년부터 시작된 싱글몰트밥. 잘 만들어진 위스키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AI와 기계로 대체되면서 자리를 잃어가듯, 위스키와 같은 주류들도 점차 무알콜과 하이볼 등으로 가볍게 변해가고 있다.
이 정도까지 해야만 하나? 하지만 어쩔수가없다…로 마무리되는 인물과 상황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위스키는 찾기 힘들 것 같다. 물론 이걸 몰라도 맛이 개연성이라 마시는 순간 카타르시스였지만.
종이도, 영화도, 위스키도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어쩔수가없다>는 하이볼과 무알콜 판에 등장한 스프링뱅크15년 같은 반가운 녀석이다. 특히 나같이 ‘영화는 끝났어! 귀멸의 칼날이나 볼테야!’라고 영화금주 중인 사람들에게는 더욱 말이다.
각본, 촬영, 음악, 연기 모든 부분이 장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코미디 장면마저도 기품이 있으며, 연기하는 배우들은 물론 강아지마저도 올해의 연기상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실로 수준 높은 영화였다. 다만 이제 세상이,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이 변해간다는 게 어지러운 숙취를 남길뿐이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갔다. 집 앞에서 유리병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이거 스프링뱅크15년 2병이면 어떡하지? 나는 이걸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쩔수가없나?
<제공 :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