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그리고 디지털
요즘 영상 쪽은 LG의 OLED와 삼성의 QLED다. 갈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있으며 앞으로 8K가 대중화될 시점이 되면 과연 양쪽 진영이 어떤 판도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시점에서 과거 PDP TV가 그립다. 깊은 블랙의 심도와 컨트라스트 등 그 당시 PDP의 화질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후 LCD가 나왔고 지금은 OLED와 QLED가 출시되었음에도 그 당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에 가까운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집에서 여전히 영화를 볼 때면 TV가 아닌 프로젝터를 사용한다. 영화관에서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볼 때면 아이맥스 상영관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최근엔 터미네이터 신작을 봤는데 아이맥스로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사실 진정한 아이맥스를 가장 뛰어난 영상으로 본 건 다크 나이트였다. 거대한 크기의 필름을 롤을 가지고 다니면서 촬영해야 하는 특성상 아이맥스는 서서히 존폐의 위기에 처했었다. 이를 다시 살린 것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영화였다.
경제적 관점에서 아이맥스는 엄청난 제작비를 자랑하는 헐리우드 바닥에서도 감당이 안 되는 시대착오적 촬영 기술이다. 하지만 아이맥스로 촬영한 영화는 필름이라는 아날로그의 강점이 명확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차릴 만큼 즉각적이며 본능적이다. 아이맥스로 촬영한 영화를 디지털로 변환해 상영한 아이맥스를 마니아들이 라이맥스, 즉 가짜 아이맥스라고 칭하며 평가 절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마저도 여타 영화들보단 월등히 뛰어난 화질을 자랑한다.
아날로그에 더 가까이
최신 디지털 녹음을 제외하고 과거 수많은 명연, 명반을 자주 듣는 오디오파일이라면 오리지널 레코딩이 대부분 릴 테잎에 담겨있다는 것 즈음은 알 것이다. 가장 많은 정보량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릴 테잎이었기 때문이다. 구경과 수록 분량 등 무척 다양한 형태의 릴 테잎이 레코딩에 수십 년간 사용되어 왔고 현재 가장 그 퀄리티에 많은 신경을 쓰는 재발매 레이블은 바로 오리지널 릴 마스터 테잎을 사용해 다시 LP를 찍어내고 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사용했던 아이맥스 필름을 다시 꺼내 복사해서 판매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아날로그 녹음 시절의 명연들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재생해 즐길 수 있는 방식이다.
하드웨어 쪽에서 R2R 래더 DAC를 만들어내는 것은 마치 과거 아이맥스 필름으로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델타 시그마 방식에 비해 훨씬 더 고단한 제작 공정을 갖지만 이것이 더 디지털의 맛을 없애고 아날로그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미 수십 년 전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MSB 등 소수의 하이엔드 메이커만 부여잡고 있었던 R2R 래더 DAC이 디지털의 최전선에 다시 선 이유다.
쓰랙스 Maximinus
최근 몇 년간 R2R 래더 DAC를 고집하던 메이커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아날로그에 더 가까운 디지털에 대한 소구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R2R 래더 DAC는 일종의 무브먼트가 되었고 여기 또 하나의 걸출한 브랜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불가리아 출신의 쓰랙스(Thrax)가 그 주인공. 이들은 Maxminus라는 DAC 하나로 이 부문에 가장 강력한 R2R 래더 DAC 분야를 점령했다.
이번에 다시 출시된 Maximinus Mk2는 기존의 MSB 래더 DAC를 버리고 다른 칩셋으로 변경을 시도했으며 이에 따라 여러 주변 회로를 상당 부분 수정했다.
이 부분에 대해 나는 국내 공식 수입사인 사운드스터디를 통해 쓰랙스에 문의했고 루멘(Rumen)으로부터 핵심적인 변경 내용에 대한 회신을 받았다. Maximinus 첫 번째 버전은 MSB 다이아몬드 DAC의 마더보드와 모듈을 사용하되 트랜스 출력을 위해 약간 개조해 사용했고 두 번째 버전의 경우 MSB 마더보드를 사용하되 AD, 즉 아날로그 디바이시스의 R2R 멀티비트 DAC 칩셋을 사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최신 Maximinus Mk2의 경우 마더보드까지 자체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 이 외에도 작동 전압을 세 배 높인 새로운 정류단 및 클럭을 통해 디테일, 해상도 등을 더 상승시켰다는 게 주요 개정 내용이다.
DAC는 단지 칩셋만으로 한 제품의 품질이나 지향하는 사운드를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 사실 하이엔드 DAC들의 경우 DAC 칩셋 자체보다는 클럭, 필터, 전원부, 입/출력 아날로그단에서 그 소리의 전체적인 윤곽이 결정 나는 경우가 많다. 일단 Maximinus Mk2 같은 경우 DAC 칩셋이 R2R 래더 DAC라는 것 외에 다른 부분에서 훨씬 더 독창적인 회로를 발견할 수 있다.
Maximinus Mk2는 USB 외에 동축, AES/EBU, 광 등 다양한 입력단을 가진다. 그리고 일단 이러한 디지털 입력단을 통해 신호가 들어오면 자체 리클럭킹 회로의 제어 아래에 놓이게 된다. 쓰랙스가 자체 설계한 DSP가 입력 신호를 모니터링해 44.1kHz 계열 또는 48kHz 계열 신호를 Maximinus Mk2의 내장 클럭으로 대체시킨다. 이들이 사용하는 클럭은 TCXO 기반으로 매우 높은 정밀도를 가지며 샘플링 주파수에 각각 1개를 사용하고 있다.
이 DAC에 44.1kHz의 CD 정도 스펙의 음원이 입력되면 최대 32/352.8까지 업샘플링을 거친다. 물론 리클럭킹이나 업샘플링을 모두 끌 수도 있지만 실제 사용할 경우 켜두는 것이 더 좋았다. DSP엔 독자적인 필터로 내장하고 있다. 이는 음악에 따라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보이는데 F1에서 F4까지 총 네 개 필터 중 숫자가 높을수록 좀 더 분해력이 높은 고해상도 사운드로 변모한다. 이는 녹음이나 장르 또는 선호하는 취향에 따라 그때마다 선택해 들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DSP를 거친 후 DA 변환된 신호의 흐름이다. 대개 DAC에서 전류 형태로 출력된 신호를 전압으로 바꾸는 I/V 변환 회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Maximinus Mk2 DAC의 경우 이런 회로를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 트랜스포머를 거쳐 출력하도록 만들어놓고 있다. 진공관을 주로 다루는 오디오 메이커들의 설계를 DAC 출력단에 활용한 것으로 진공관 앰프의 출력 트랜스포머가 전체 음색에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적이라는 걸 안다면 내부에 적용한 출력 트랜스가 Maximinus Mk2 DAC의 소리에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셋업
Maximinus Mk2 DAC를 처음 대하면 일단 매우 정교하게 가공한 알루미늄 섀시가 눈길을 끈다. 사람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한데 너무 심플한 디자인의 최근 DAC들을 보다 보니 이런 디자인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앙 디스플레이를 소실점으로 움푹 들어간 전면부 그리고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좌우로 앙증맞게 늘어선 버튼과 노브가 상당히 독창적인 멋을 띤다.
이번 시청에선 프리앰프까지 쓰랙스 Dionysos를 사용했고 이 프리앰프의 볼륨단을 활용했다. 이후 출력된 신호는 브라이스턴 28B³ 파워앰프를 사용해 증폭, 최종적으로 B&W 802D3 스피커로 청음 하면서 Maximinus Mk2 DAC의 성능을 살폈다. 물론 그 전단엔 웨이버사 시스템즈 W 코어와 W 라우터 콤비를 사용해 ROON으로 재생했음을 밝힌다. 입력단의 경우 USB 입력단을 사용했고 이때 가장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더넷 입력단을 활용한 ROON 재생보단 USB 입력단 쪽 성능이 더 나았고 DSD를 지원하지만 PCM 음원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리스닝 테스트
웅산 - I love you
우선 웅산의 ‘I love you’(24/176.4, Flac)을 들어보면 굉장히 청명하다는 느낌이 가장 먼저 다가온다. 마치 아침 이슬 같은 영롱함이 시청실의 공기를 맑게 만들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음상의 초점은 마치 촛농이 똑떨어지는 듯 명료하게 형성된다. 기본적으로 어설프게 R2R 래더 DAC 칩셋을 사용한 중, 저가 DAC와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멀티비트 래더 R2R DAC를 약간 무르고 번지며 그저 두툼한 두께와 온기 등의 사운드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Maximinus Mk2 DAC는 그 어떤 델타 시그마 DAC보다 분해능력이 더 높다.
Maximinus Mk2 DAC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원본의 정보량을 끝까지 추적해 끌어낸 듯한 인상이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MP3 그리고 ‘Loudness War’에 길들여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극적인 소리를 해상도가 높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오해해왔다. Maximinus Mk2 DAC는 그런 소리가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왔는지 소리로서 반증해준다.
Manfred Honeck, Pittsburgh Symphony Orchestra
Barber: Adagio for Strings
예를 들어 맨프레드 호넥 지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바버의 ‘Adagio for strings’(24/192, Flac)는 소리의 낙폭이 매우 작은 흐름이 무척 잔잔하게 무려 10여 분에 걸쳐 진행되는 음악이다. 하지만 아주 작은 음의 낙폭도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해주어 생동감이 뭉개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생동감과 실체감은 지루할 수도 있는 이 곡을 끝내 끝까지 듣게 만들어준다. 생동감이란 커다란 낙폭의 강음 표현력이 아니라 미세 약음의 표현력에서 승부가 갈린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Tord Gustavsen Trio - The tunnel
The Other Side
엄청난 정보량과 그로 인한 약음 디테일은 어떤 곡에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첨예하고 자연스러웠다. 놀라운 것은 토드 구스타프센 트리오의 ‘The tunnel’(24/96, Flac)을 들어보면 이런 높은 정보량과 분해력을 통해 출력된 소리 입자가 귀를 자극하면서 천박하게 자기주장을 하기 급급한 느낌이 없다는 것. 이 곡에서 피아노는 충분한 배음과 깊고 강력한 타건을 보이며 자연스러운 토널 밸런스를 보인다.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자연스럽고 명료한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만 억양이 좀 센 편으로 시스템이나 사람에 따라선 자극적으로 들릴 소지도 있다.
Neeme Jarvi, Royal Scottish National Orchestra
Saint-Saens: Danse Macabre
계속해서 음악을 듣다 보니 마치 잘 세팅된 하이엔드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MC 카트리지로 듣는 소리가 떠올랐다. 애초에 아날로그 녹음이었던 곡은 물론 디지털 녹음도 그렇다. 소리의 표면 촉감이 쫀득하다는 느낌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예르비 지휘로 생상스 ‘죽음의 무도’(16/44.1, Flac)를 들어보면 현, 관악, 타악들이 각각 모두 첨예하게 분리되어 들리면서 동시에 싱싱하게 살아 꿈틀거린다. 한편 R2R 래더 DAC의 채용으로 음색적인 부분에서만 독창적인 매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 드넓은 무대, 폭발적인 저역 등 모든 부분에서 남성적인 해석이 돋보였다.
총평
Maximinus Mk2 DAC는 단지 두텁고 묵직하며 편안한 재생음을 내주는 멀티비트 DAC가 아니다. R2R 래더 DAC는 그저 하나의 소자에 불과했다. 음질적 특색을 살펴보기 위해 청음실 한 편에 있었던 아쿠아 하위 DAC를 연결해 잠시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워낙 가격 차이가 큰 하위 DAC긴 하지만 Maximinus Mk2 DAC에 비하면 입자가 적고 분해 능력이 떨어져 밀도감, 해상도의 한계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물론 무척 편안한 느낌을 주었지만 나는 다시 Maximinus Mk2 DAC로 황급히 돌아가 다시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Maximinus Mk2 DAC의 소리는 마치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천연의 과일향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 디지털 음원을 재생하지만 디지털의 속성을 많이 희석해낸 듯한 소리다. 그래서 때론 야생마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듣는 내내 마치 디지털이지만 필름 같은 영상 효과를 청각으로 구현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Specific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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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s |
2 x COAX (RCA) 2 x AES/EBU (XLR) 2 x TOSLINK (optic) 1 x USB (optional) |
Output |
1 pair unbalanced RCA 1 pair balanced XLR |
Power supply |
115 or 230V |
Power consumption |
30W |
Dimensions (WxDxH) |
432 x 400 x 120 mm |
Weight |
12kg |
Thrax Maximinus Mk2 DA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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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사 |
사운드스터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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