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오디오
많은 오디오 메이커들이 기술적인 자료와 테크니컬 부분에 대한 스펙을 자랑한다. 특히 최근 들어 이런 스펙을 제품 성능의 모든 것인 듯 이야기하곤 한다. 오디오 사이언스 리뷰 같은 곳이 대표적으로 이런 스펙을 기준으로 등수를 매기는 등 이러한 스펙 지상주의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물론 그 스펙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것만 가지곤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무릇 미신이나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음악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수치로 표현하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오디오, 그중에서도 하이엔드 오디오 메이커의 수장이나 개발자 중엔 의외로 음악을 즐기는 것을 넘어 악기 연주가 취미인 사람들이 자주 목격된다. 때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지독한 음악 애호가인 경우는 흔하며 어떤 경우엔 자식에게 음악을 가르쳐 음악가로 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부 오디오 애호가들은 기술적 스펙만 중요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오히려 오랜 연륜의 엔지니어는 기계가 아닌 음악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곤 한다.
라 사운드
최근 시청한 라 사운드의 파올로 마르체티 또한 이런 범주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DNA 같은 것일까? 음악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은 고스란히 파올로에게 전해져 끊을 수 없는 내력으로 이어졌다. 음악적 열정이 가족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라면 그에게 음악에 대한 능동적 실천을 하게끔 만든 건 친구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당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꽤 근사한 스테레오 하이파이 기기들로 음악을 즐겼다. 필립스 K7이나 마란츠 앰프 그리고 아카이에서 만든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음악과 함께 음질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의 소리에 대한 열망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재생하는 하드웨어로 옮겨붙었다. 결국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이후 제련 업계에서 일하는 등 점점 케이블 쪽으로 연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이미 프로가 되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증폭 기술이나 디지털 기술 혹은 스피커 등 트랜스듀서 계통이 아니라 케이블을 통한 음악 신호의 전송 쪽으로 기울었다. 라 사운드라는 브랜드 이름은 무척 독특한데 자신의 지역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니 자신의 출신과 고향에 대한 애착도 음악에 대한 그것만큼이나 강한 듯하다.
올림피아 XLR EVO2
사실 라 사운드에 대한 경험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지난번에 코리움 XLR 인터케이블을 들어본 바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시청이었지만 나에게 코리움 XLR 인터케이블은 무척 좋은 인상을 남겼다. 제목으로 색채를 운운했을 만큼 자신만의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딱딱하고 뻣뻣하게 음악 신호를 정직하게만 전송하는 케이블과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케이블이었다. 케이블 분야도 깊게 파고 들면 소재부터 지오메트리, 절연과 차폐, 단자 및 터미네이션 등 그 미시적 세계에 광활한 우주가 펼쳐진다. 그리고 라 사운드는 최상의 소재와 최고의 음악성을 부여한 모습이었다.
이번엔 또 다른 XLR 케이블을 시청했다. 지난번 시청한 코리움과 동일하게 순은 소재다. 그것도 코리움과 동일하게 99.99%, 즉 4N 정도 순도를 갖는 도체를 사용한다. 은이 동보다 전도성이 더 좋다는 둥 당연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글을 읽은 독자라면 그 정도 이론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사실 4N 정도라면 그리 순도가 높은 편이 아니다. 6N 정도의 순은 케이블도 돈만 있다면 여러 메이커 제품들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도체의 입자 구조를 분류할 때 OCC나 더 나아가 싱글(모노) 크리스탈이 최고의 성능을 낸다는 것이 정설이다.
올림피아는 4N 정도 순도의 순은 도체를 사용한다는 것. 사실 그리 높은 스펙은 아니다. 게다가 이 정도 가격대라면 더더욱 의심스럽다. 다행히 도체는 단선을 사용하며 OCC처럼 연속 주조 방식으로 직접 자사의 공장에서 제작해 만든다. 이들이 올림피아 라인업에 대해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연선이 아닌 단선을 사용하며 테프론과 폴리에틸렌을 활용한 최고 수준의 절연 그리고 여러 방식의 차폐를 활용한 독특한 구조 패턴 등이다.
올림피아는 일단 무척 값비싼 플래그십 코리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은 저렴하지만 4N 순은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더불어 테프론으로 도체를 절연했다. 도체는 21AWG 구경으로 이를 절연한 상태에서 반도체로 차폐한 후 한 번 더 차폐를 한다. 이때 주석 도금한 동선으로 차폐를 한다. 주석 도금 동선 투입은 상당히 이채로운 결과를 만들어낼 듯한데 어쨌든 자체 제작한 도체와 절연, 차폐 방식 등의 조합이 라 사운드의 소리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셋업 & 리스닝 테스트
올림피아를 테스트하기 위해 코리움도 함께 옆에 놓고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코리움에 비하면 좀 더 유연하며 굵기도 더 얇다. 참고로 플러그는 은을 10마이크론 두께로 도금한 순동 소재를 사용하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새하얀 익스팬더와 단자는 고풍스러운 멋을 풍겼다. 마치 이태리에 날아온 럭셔리 제품 같은 인상이다. 여러모로 제작자가 다방면에 재능이 많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스트는 소스 기기로 오렌더 W20SE 그리고 아쿠아 La Voce DAC를 활용했다. 그리고 아쿠아 DAC에서 프리앰프로 가는 신호 전송 구간에 올림피아 XLR EVO2 인터케이블을 적용해보았다. 프리앰프는 비투스 SL-103, 파워는 SM-103 모노블럭 파워앰프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스피커는 최근 리뷰용 모니터로 계속 사용 중인 B&W 802D3를 활용했음을 밝힌다.
김윤아 - 유리
타인의 고통
여러 보컬 레코딩을 들어보다가 김윤아의 ‘유리’가 귀에 걸렸다. 사실 이 곡은 바이올린 소리에서 액세서리 하나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녹음이다. 그런데 코리움과 올림피아는 동일한 도체를 사용했음에도 커다란 음결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에서 코리움은 온기가 높고 중역대에 다소 도톰한 살집이 느껴진다면 올림피아는 중역은 빠지되 대신 더 단단하고 말끔한 여운을 남긴다. 코리움보다 오히려 냉정하고 예리한 음촉을 보여준다. 하지만 둘 모두 기본적으로 정보량이 매우 높으며 배음 정보를 상당히 풍부하다. 잔향은 코리움이 좀 더 많아 이런 따스한 느낌을 주지만 올림피아의 좀 더 밝고 짜릿한 음결도 매력적이다.
Eagles - Hotel California (Live On MTV, 1994)
Hell Freezes Over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를 라이브 실황으로 들어보면 기타 사운드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코리움에 비해 살집은 약간 줄지만 어택이 더 빨라 명쾌하며 리듬감 넘친다. 음색을 살펴보면 올림피아는 코리움에 비해 상당 부분 색채감이 제거되어 더 투명한 느낌을 준다. 올림피아를 적용한 상황에서도 기타는 오글거릴 정도로 예쁘게 재잘거리는 느낌을 주어 듣는 재미 측면에선 무척 매력적이다. 퍼커션 등 타악기의 어택은 빠르지만 그 표면 텍스처는 부드럽고 푹신한 편으로 절대 번들거리면서 디테일을 지우지 않는다. 옹골찬 소리란 이런 것이라는 듯 탄력도 훌륭하다.
Herbie Hancock - Chameleon
Head Hunters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이런 것일까. 투명하고 말끔하지만 표면 텍스쳐가 부드러워 이물감이나 거친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허비 행콕의 ‘Chameleon’처럼 리듬감이 부각되는 레코딩에선 정곡을 찌르며 명확하게 리듬감을 북돋운다. 절대 늘어지지도 그렇다고 견고함을 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소리도 아니다. 정적인 면이나 동적인 면 양쪽에서 표현력이 모두 훌륭하다. 1분 30초 이후 펼쳐지는 관악 세션에선 결이 세밀하게 포착되는데 기본적으로 밝고 달콤한 표현을 보여준다. 눈부신 금속 표면이 반사된 듯 은선의 매력이 만발한다.
Olafur Arnalds, Alice Sara Ott
Nocturnes, Op.37 - 1. Andante Sostenuto In G Minor
The Chopin Project
피아노 타건을 들어보면 코리움보다 냉철하고 예리한 울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라 사운드 라인업 내에서 상대적으로 그럴 뿐 객관적으로 볼 때 은선이 보여주는 달콤한 기운도 다소 스며들어 있다. 앨리스 사라 오트의 쇼팽 ‘Nocturne’에서 피아노 타건 이후 여음의 지속 시간은 충분하며 그 주변의 앰비언스도 놓치는 법이 없다. 코리움이 높은 피치에서 약간 완곡한 표현을 보인다면 올림피아의 경우엔 더 직진성이 두드러진다. 표면 텍스처는 디테일을 희생시키면서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에 촉촉한 윤기가 느껴질 정도. 하지만 동적인 측면에선 코리움보다 더 직선적이며 냉정한 움직임을 보인다. 표면 질감 표현과 동적인 측면에서의 특성이 대립되지만 절묘하게 융합되어 있는 케이블이다.
총평
라 사운드의 코리움 케이블은 무척 달콤하며 화사한 음색에 촉촉한 윤기를 머금은 중역이 매력적이었다. 한편 올림피아의 경우 좀 더 에지 있고 고역 개방감이 높은 소리에 동적인 움직임에서 빠르고 명쾌한 스타일로 코리움과 상당히 대비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동일한 4N 은선을 도체로 사용하면서 사운드 특성에서 공집합이 없진 않지만 소리에 있어선 라 사운드 또 다른 자아를 가진 케이블이다. 만일 시스템에서 해상도를 해치지 않으면서 음악적 윤기와 약간의 색채감만 추가하고 싶다면 이 케이블은 무척 강력한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드러운 고해상도’, 아니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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