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해외여행은 너무 뻔하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같은 각도로 찍어 올리고, 유명한 맛집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누군가 짜놓은 코스를 그대로 따라 걷는다. 낯선 곳에 간다 해도, 그 낯섦조차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에 갇혀 있다. 그래서 문득, ‘정말 여행다운 여행’이란 뭘까 생각하게 된다. 그 질문의 답으로 떠오른 곳 키르기스스탄 오쉬.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나라, 이곳은 아직 대중적인 여행지로 자리 잡지 않았다. 직항도 없고, 인터넷에는 정보도 부족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미지의 감각’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한여름의 오쉬, 열기를 이기는 법
오늘의 목적지는 키르기스스탄 남서부의 도시 오쉬(Osh).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경유해 도착한 오쉬는 활기찬 도시였다. 공항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피부에 느껴지는 열기는 서울 한복판보다 더 강렬했다. 기온은 40도에 가까웠고, 썬크림을 몇 번이고 덧발라도 땀에 씻겨 내려가 버려 그늘을 찾아 종종걸음을 하게 될 만큼 햇살은 강렬했다. 이런 날씨에 현지인들은 어떻게 더위를 이기고 사는 걸까?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길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리어카, 그 위에 놓인 큰 통 안에서 국민음료 ‘막시(Maksym)'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시는 옥수수, 보리, 밀 등을 끓여 발효시킨 비알코올 음료로, 첫맛은 강한 신맛과 함께 톡 쏘는 탄산감이 느껴진다. 마치 막걸리에 율무차를 섞은 듯한(?) 생소한 맛이었는데, 한 입에 털어넣고 보니 의외로 개운했다. 입 안에 남는 곡물향에 호불호는 갈릴 듯했지만, 톡 쏘는 시원함에 현지인들이 왜 이 음료를 즐기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오쉬를 벗어나 레닌피크로 향하는 길,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자 내가 상상했던 키르기스스탄의 모습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초록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했고, 여기저기 보이는 유르트는 초원의 액세서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풀을 뜯으며 초원을 질주하는 말떼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낭만에 취해 있던 것도 잠시, 도로는 이내 오프로드의 진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비포장 자갈길 위에서 차는 마치 고장 난 세탁기처럼 사정없이 흔들렸고, 누가 먼저 옆 사람 위로 쓰러질지 모를 정도로 아찔한 흔들림이 이어졌다. 거친 흔들림과 고요한 자연의 대비가 오히려 이곳의 매력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거창하지 않아 더 특별해
초원을 따라 늘어선 유르트 마을을 지나던 중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한 유르트 앞에서 한 꼬마아이가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고, 손에는 둥그런 쟁반이 들려 있었다. 그 위엔 키르기스스탄 전통 빵과 함께 하얀 크림이 얹혀 있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파는 건 아니고 그냥 나눠주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받기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우리는 팁을 얹어 기꺼이 ‘구입한 셈’으로 받아들었다. 빵을 뜯어 꾸덕한 카이막에 찍어 먹는 순간, 고소한 풍미와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거창하지 않아 더 특별했던 한 조각. 키르기스스탄에서 맛본 어떤 음식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유르트에서 보낸 잊지 못할 밤
유르트는 키르기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전통 가옥이다. 나무로 만든 뼈대 위에 펠트와 천을 덮어 만든 반구형 구조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좋고 이동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사용돼 왔다.
우리가 묵었던 유르트는 레닌피크 베이스캠프에 자리한 숙소로, 전통적인 외관과 달리 내부는 꽤 현대적으로 정비돼 있었다. 침대와 테이블, 러그, 조명, 전용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었고, 특히 화장실은 외부 환경을 감안하면 놀라울 만큼 쾌적했다. 하지만 여행이 언제나 편안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엔 공사로 인해 전기 공급이 불안정했고, 그로 인해 난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영하로 떨어진 밤 기온 속에서 바지는 두 겹, 위는 반팔에 긴팔을 껴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 마지막으로 패딩까지 겹겹이 껴입었다. 두꺼운 양말을 신고, 헤드셋을 귀에 눌러 귀마개처럼 쓰고 침낭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불 속 공기까지 얼어 있는 듯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고, 새벽에는 추위에 깨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춥고 불편했던 밤이 지금은 가장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고산지대에서는 언제든 전기가 끊길 수 있고, 언제 다시 연결될지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한 대비는 필수다. 가능하다면 보온용품을 챙겨가는 것을 추천한다.

고산 트레킹 입문자라면
레닌봉은 해발 7,134m의 고봉으로, 파미르고원에 속해 있다. 옛 소련 시절부터 등반가들의 고산 등정지로 유명했으며, 지금도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트레킹 명소다. 고산 트레킹 입문자들도 접근할 수 있다는 쉬운(?) 7,000미터급 산으로 불리지만, 날씨 변화와 고산병 증세의 위험도 공존한다. 레닌피크의 초입, 베이스캠프에서 해발 약 4,000m 지점까지 오르는 하루 트레킹을 경험했다. 맑고 깊은 공기를 가르며 걷는 길, 처음엔 숨이 가빠졌지만 조금씩 적응이 되면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멀리서만 봐도 위엄이 느껴지는 레닌피크의 만년설 설산은 점점 가까워졌고, 단단히 얼어붙은 빙하 위를 직접 디뎌보는 순간도 있었다. 트레킹 중 날씨는 예상보다 온화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구간에서는 더워서 옷을 벗고 반팔 차림으로 걷기도 했다. 모든 일행이 등산복을 입었다 벗었다 하기를 반복했기에, 옷은 가벼우면서도 두툼한, 겹쳐 입기 쉬운 것으로 준비하는 게 가장 좋다는 걸 깨달았다. 고산 트레킹에서는 '등산복 레이어링'이 곧 생존 기술이다.
드넓은 초원에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이라는 단순한 색감 표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오묘한 그라데이션! 이런 풍경 앞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사진을 찍어봐도 그 광활함과 색감의 깊이를 다 담아낼 수 없고, 글로 설명하려 해도 부족하기 때문. 그 사이사이로는 마멋(Marmot)들이 튀어나오듯 뛰어다니며, 마치 이 고산지대를 자기들의 놀이터처럼 누비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는데, 순간 욕심이 생겨 몰래 한 번 만져볼까 했지만 겁이 나서 차마 손은 뻗지 못했다.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현지 음식
키르기스스탄에서 어느 식당을 가든 빠지지 않고 나오는 메뉴가 있다. 바로 플롭(Plov)이라 불리는 현지식 볶음밥이다. 고기, 당근, 양파,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플롭은 보기보다 훨씬 담백하고 고소했다. 기름이 많지만 생각보다 느끼하지 않고, 함께 곁들여 나오는 발효유나 피클을 곁들이면 든든하고 훌륭한 한 끼가 된다.

보르속(Borsok)은 키르기스스탄 가정식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전통 튀김빵이다. 작게 반죽한 밀가루 덩어리를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 음식으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촘촘하면서도 부드럽다. 모양은 동그랗기도 하고 네모나기도 한데,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빚어낸 모양새가 정겹다. 갓 튀겨낸 보르속은 마치 한국의 꽈배기를 먹는 듯한 친숙한 맛이었고, 고소한 풍미에 순식간에 몇 개를 집어먹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특히 따뜻할 때 먹으면 그 풍미가 배가되어, 식사 전후 할 것 없이 끊임없이 손이 갔다. 커피나 차와 함께 먹어도 잘 어울렸고, 현지에서는 손님 접대용으로도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흔한 간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이들의 일상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이 가는 대로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보르속을 ‘한 주먹’째 먹고 있다.
더 가까워진 키르기스스탄
이번 여정은 에어아스타나(Air Astana)의 알마티–오쉬 노선 신규 취항 덕분에 가능했다. 오쉬는 아직 한국발 직항 노선이 없는 지역으로, 에어아스타나가 현재 유일하게 알마티–오쉬 구간을 정기 운항 중이다. 인천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이동한 뒤, 알마티에서 오쉬까지 연결되는 항공편을 이용하면 하루 만에 키르기스스탄 남부에 도착할 수 있다. 비행시간은 약 1시간25분으로, 국경을 넘어야 하는 복잡한 육로 이동 대신 훨씬 쾌적하게 접근할 수 있다.
에어아스타나는 지난 6월3일부터 알마티–오쉬 구간을 주4회, 인천–알마티 노선을 주2회(화·금) 운항 중이며, 이번 신규 취항을 계기로 트레킹과 자연, 문화 탐방 등 다양한 테마 여행 수요에 새로운 활로가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오쉬 지역으로의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중앙아시아 남부를 중심으로 한 여행 콘텐츠 개발에도 기대가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