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극심한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막대한 생산 차질을 경험했다. (현대자동차)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완성차 산업의 뿌리를 흔들었다. 미국 GM과 포드가 생산라인을 멈췄고 일본 도요타는 수십만 대의 생산 차질을 빚었다. 현대차·기아 역시 2021년 한 해 약 47만 대의 생산이 지연되며 출고 지연 사태를 겪었다. 단순한 부품 부족이 아니라 자동차 산업의 심장이 멈춘 자동차 산업의 암흑기였다.
이 같은 수급 위기는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됐다. 차량용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와 까다로운 품질 인증 절차 때문에 소수 글로벌 기업에 집중돼 왔다. 인피니온, 르네사스, NXP, TI, ST 등 5개 기업이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여기에 일본 르네사스 공장 화재, 미국 텍사스 한파, 아시아 물류 병목 같은 돌발 변수들이 겹치면서 전 세계 완성차 업계가 동시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소수 글로벌 기업 독점, 국산 시스템 반도체의 한계
차량용 반도체는 인피니온, 르네사스, NXP, TI, ST 등 5개 기업이 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반면 글로벌 톱 50개 가운데 국내 기업은 단 두 곳에 불과하다.(김흥식 기자)
국내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점유율은 3~4%에 불과하며 대부분 메모리에 집중돼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은 부족하다. 현대모비스 이희연 상무는 “다품종 소량과 높은 인증 장벽 등으로 국내 기업들이 도전하기 어려운 구조가 발목을 잡아왔다"라고 지적했다.
팬데믹을 계기로 현대차와 기아는 전략을 바꿨다. 기존의 간접 구매 체계에서 벗어나 반도체를 직접 선정·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현대차 이혁준 상무(전자부품 구매실)는 “코로나 시기 경험을 통해 서플라이 체인을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2030년까지 주요 반도체의 절반을 직접 관리하고 국산화율을 1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현대모비스는 완성차와 반도체 기업을 잇는 허브 역할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독자적인 반도체 설계 역량을 확보하고 팹리스·디자인하우스와 공동 개발을 추진하는 동시에 주요 파운드리와의 협력을 확대해 국내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의 중심축이 되겠다는 것이다. 박철홍 전무는 “제어기 특화 사양 정의와 실차 검증 지원을 통해 협력사 개발 속도를 높이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현대모비스 이희연 상무는 개발 인프라 측면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 상무는 "우리의 가장 대표적인 캔 반도체 같은 굉장히 기본적인 칩도 제가 인증을 받으려면 유럽에 가서 외주 테스팅을 받아야 한다"라며 우리나라에 단 한 곳도 없는 인증 시설의 필요성을 정부측에 강하게 요구했다.
차량용 반도체 기술 독립 이끌 오토 세미콘 코리아 출범
현대모비스와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LX세미콘·텔레칩스 같은 팹리스, DB하이텍·SK하이닉스 파운드리 같은 제조사, 에이디테크놀로지 등 디자인하우스, 그리고 패키징·테스트 업체, 학계와 정부까지 총 23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한 ASK가 29일 출범했다.(현대모비스)
현대모비스의 비전은 29일 열린 ‘오토 세미콘 코리아(ASK)’ 포럼에서 공식화했다. 현대모비스가 주도한 이번 포럼에는 현대차·기아를 비롯해 LX세미콘·텔레칩스 같은 팹리스, DB하이텍·SK하이닉스 파운드리 같은 제조사, 에이디테크놀로지 등 디자인하우스, 그리고 패키징·테스트 업체, 학계와 정부까지 총 23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수요기업과 공급기업이 한자리에 모여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논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포럼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실무 중심의 협력 플랫폼을 지향한다. 매년 정례화해 확대 개최하고, 시스템 반도체, MCU·프로세서, 전력반도체 등 세 가지 분과 협의체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각 분과는 기술 로드맵을 공유하고 반도체 표준화·공용화, 실차 기반 검증, 인증 인프라 구축 같은 실행 과제를 함께 논의한다. 이는 선언적 담론이 아니라 실제 개발과 양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 협력의 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ASK 포럼의 출범은 여러 층위에서 중요하다. 첫째, 팬데믹과 지정학 리스크로 공급망 불안이 심화된 상황에서 국내 자생형 밸류체인을 구축하기 위한 민간 주도형 협력이 공식화됐다는 점이다. 둘째, 글로벌 소수 기업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내 기업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산업적 자립의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셋째, 정부와 학계까지 참여해 단기적 대응을 넘어 장기적인 인프라와 인력 양성까지 포괄하는 협력 체계가 마련됐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정부 "아직 젊은 산업"... 업계, 국내 자립 생태계 필요
이날 포럼에서 팸리스 및 파운드리 업체들은 차량용 반도체 기술 독립을 위해서는 국내 완성차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 조성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김흥식 기자)
산업계는 이번 포럼을 계기로 국내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가 한 단계 도약할 것으로 기대한다. 2030년 2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글로벌 시장에서 인포테인먼트·커넥티비티·ADAS·전동화 같은 미래차 핵심 분야의 수요를 국내 기업들이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완성차의 직접 관리 체제, 티어1의 허브 전략, 팹리스와 파운드리·디자인하우스의 분업형 협력,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한국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날 포럼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다.
정부도 지원을 약속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박동일 국장(제조산업 정책관)는 차량용 반도체를 “아직 젊은 산업”으로 규정하며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기업들의 혁신과 협력을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는 인증 인프라 부재, 중소 팹리스의 신뢰성 테스트 비용 부담, 장기 로드맵 부족 등을 지적하며 실효성 있는 지원을 요구했다.
DB하이텍 김형석 상무는 “신뢰성 테스트 비용에 대한 직접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고 텔레칩스 이수인 상무는 “전 분야에서 타임 투 마켓을 앞당길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LX세미콘 조장호 전무는 “차량용 반도체는 일반 IT 반도체와 달리 긴 개발 주기와 높은 신뢰성 요구 때문에 단독 대응이 어렵다”며, 완성차·티어1·팹리스 간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에이디테크놀로지 박준규 대표 역시 “설계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서는 소규모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라며 국내 디자인하우스와 팹리스의 연계를 통한 경쟁력 강화 방안을 제시했다.
미래 모빌리티 핵심 자원... 2030년 200조 원 시장
현대모비스 이규석 사장은 "반도체는 미래 모빌리티의 성능과 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자원"이라고 강조하고 포럼의 지속을 통한 차량용 반도체의 자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했다. (김흥식 기자)
업계가 제시한 해법은 분명하다. MCU와 통신 IC 같은 핵심 소자의 표준화와 공용화, 국내 신뢰성·기능안전 테스트 허브 구축, 과제 중심을 넘어서는 직접 지원과 성과 연동 배분, 그리고 컨소시엄·M&A를 통한 규모 확대다. 무엇보다 티어1인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설계, 제어기, 실차 검증이 맞물리는 공동 개발 체계를 고도화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2030년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약 2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미래차 핵심 분야가 시장의 70%를 차지하며 국내 생태계가 이 수요를 흡수할 수 있다면 국산화율 제고와 공급망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이날 포럼에서 정구민 국민대 교수는 “차량용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 구조에다 오랜 검증 기간이 필요해 장기적 투자와 정부·완성차·부품사의 방향성 정립이 필수적이다. 국가적으로 과제를 묶어 가며 체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라며 정부와 현대차 등 완성차 업체의 역할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이규석 현대모비스 대표는 이날 포럼에서 “자동차는 달리는 컴퓨터다. 반도체는 미래 모빌리티의 성능과 가치를 좌우하는 핵심 자원이다. 현대모비스는 국내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의 든든한 중심축이 되어,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라고 강조했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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