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시장은 최근 수 년 사이에 한차례 격변의 시기를 맞았다. 멤브레인이 절대 다수였던 시장에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PC방은 물론이고 일반 가정, 사무실에도 기계식 키보드가 흔히 보이는 시대가 왔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키보드를 'PC 살 때 공짜로 받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계식 키보드는 필자가 글을 쓰는 이 시점에 이미 대세로 자리잡았다.



'기계식 키보드 보급 완료', 다음은 어떤 모습일까?


▲ 클래식한 감성이 장점인 체리사의 G80-3000 시리즈


기계식 키보드가 많이 보급되자 관련 업체들도 우후죽순 늘었다. 체리를 비롯하여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바밀로, 덕키, IKBC, 카일 등을 제외하고도 수십, 수백 개의 기업과 공장이 생겨 유사 제품을 쏟아냈다. 비슷한 외형, 비슷한 성능, 다른 업체와 쉽게 구별할 수 있는 특징과 장점이 없으면 도태되는 시장. 그것이 요즘 기계식 시장의 분위기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업체들은 어떤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을까?


키보드 덕후인 필자가 이번 컴퓨텍스 2018에 참가하면서 가장 기대했던 점도 바로 그것이다. 키보드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가 무엇인지. 업체들이 각각 어떤 제품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컴퓨텍스 전시장 곳곳을 누빈 결과, 나름대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었다.



큰 흐름은 "게이밍 VS 커스텀화" 로 분화 중



누군가 컴퓨텍스 2018을 보고 귀국한 필자에게 최근 기계식 키보드의 흐름을 딱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게이밍 키보드의 수세, 고급 키보드의 공세"라고 대답할 것이다. 


게이밍 키보드와 고급 키보드가 추구하는 감성은 다르기 마련. 간혹 게이밍 브랜드가 내놓은 초고가 키보드도 있지만, 점차 이런 게이밍 브랜드의 키보드도 무조건 화려하기보다는 적당히 중간 지점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 게이밍 기어 제조사들 "키보드 어렵네 어려워"

▲ 쿠거 브랜드의 RGB 텐키레스 키보드


게이밍 기어를 주로 만드는 쿠거가 전시한 PURI TKL RGB 모델을 보면, 키보드를 만드는 게이밍 브랜드의 생각과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기게식 키보드가 보급된 후 시장이 점차 세분화하고 고급화하면서 화려함으로 무장한 게이밍 키보드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게이밍 키보드의 화려함보다는 본질에 더 다가가고 싶어한다. 게이밍 키보드라면 더 빠른 입력을 위해서 스피드 스위치, 옵티컬 스위치를 사용해야 하고, 마우스가 움직이는 반경을 확보해야 하므로 길이가 텐키레스 이하여야 한다. 복잡한 명령어, 찾기 힘든 스킬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매크로 키도 몇개 있으면 좋다. 화려한 것은 좋지만, 마냥 화려한 것은 싫다. RGB LED면 충분할 것이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려면 키보드 제조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하우징의 모양으로 적당히 차분함을 챙기면서도 RGB로 화려함을 더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스펙은 게이머들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본으로 담아야 한다. 무한동시입력, 빠른 폴링레이트, 빠른 리프레쉬레이트, 스피드 스위치 지원 등이다.


▶ 키보드 제조 브랜드들 "고오급화로 승부하자"

▲ 기계식 키보드 제조 브랜드 덕키의 '덕키 원 미니2'


게이밍 키보드에 별 관심 없거나 큰 재미를 못 본 기존 기계식 키보드 제조사들은 '보급'의 다음 단계인 '고급화'와 '세분화'를 노리고 있다. 시장이 성숙할 수록 사용자들은 고급스러운 제품, 남들과 다른 제품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통적인 키보드 제조사들은 한 가지 모델도 키캡을 바꿔가며 다양한 구성으로 쪼개고 있다. 체리, 덕키 부스에서 특히 이런 현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고급화 전략으로 승부하는 브랜드도 있다. 바밀로의 경우 이번 컴퓨텍스에 굉장한 물건을 전시했는데, 속이 가득 차있는 100% 통 아연에 구리/티타늄을 코팅한 키보드가 그것이다. 지금 당장은 개인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존재감이 대단하다.



그런가 하면 커스텀 키보드의 느낌을 기성품으로 가져오는 브랜드들도 있다. 예전부터 커스텀 배열, 커스텀 CNC 하우징을 기성품 시장에 접목해온 볼텍스는 이번에 스페이스바를 반으로 쪼개고 엔터도 독특한 모양을 사용한 포커배열 키보드를 공개했다.




최근 커스텀 키보드 시장에서 핫한 좌우 분리형 어고노믹(인체공학) 기판을 이용해 기성품 키보드를 만든 브랜드도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는 이미 고급 브랜드로 자리잡은 미스텔 사가 다양한 어고노믹 키보드를 공개했다.


▲ 지난해 출시하여 판매 중인 미스텔 바로크


▲ 좌우로 쪼개지는 부분이 위에서 소개한 바로크와는 다르다



진격의 카일, 신규 스위치인 썬(SUN) 스위치를 다나와에 공개!

           

▲ 카일 사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스위치를 한자리에 모았다. 생소한 스위치가 많을 것이다


기계식 키보드의 구성 요소를 크게 3가지로 나누면, 하우징(껍데기), PCB(기판), 그리고 스위치다. 스위치는 기계식 키보드의 키감과 타건음처럼 감성적인 부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부품이다. 기존에는 독일의 체리 사가 스위치 시장의 독보적인 브랜드였다. 그런데, 체리보다 더 의욕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덩치를 키워가는 브랜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카일(Khail)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일 사의 스위치는 체리 사에 비해 한 수 아래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요즘은 평가가 많이 좋아졌다. 그것은 카일의 박스 스위치 때문. 체리 사의 전통적인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 구조에서 벗어나 자체 개발한 박스 구조를 채용하여 별도의 스위치를 만들었다. 커스텀 키보드 시장은 물론, 기성품 시장에서도 사용해본 사람들이 대부분 호평하고 있다.


▲ 카일의 비장의 무기, 다나와를 통해 최초로 소개되는 신규 스위치 'SUN(썬)' 스위치


이날 필자가 카일 부스를 떠나지 않고 계속 기웃거리자, 한 직원이 필자에게 덕력 테스트를 하듯 질문공세를 펼치더니 이윽고 수상하게 생긴 가방 앞으로 필자를 안내했다. 그것은 바로 카일의 신규 스위치인 썬(SUN) 스위치였다. 외부에 공개되거나 정보가 나간 적이 거의 없는 스위치로, 카일이 이번 컴퓨텍스를 위해 만든 브로셔에도 정보가 없을 정도로 새로운 스위치이다. 필자가 테스트해본 결과 손가락에 걸리는 느낌이 제법 강한 택타일(Tactile, 다른 말로는 넌클릭) 스위치였다. 


카일의 기존 박스 화이트와 생김새가 다른 점은 윗부분이 평범한 십자 돌기라는 것. 그리고 스위치 내부에 LED를 넣을 수 있으며 투명한 스위치 뚜껑 덕분에 LED 빛이 사방으로 난잡하게 산란하지 않고 스위치 내부에 예쁘게 자리잡는다. 그래서 썬(SUN) 스위치라고 이름 붙인 게 아닐까?



스위치의 기계적인 특성은 다소 반응성이 빠르고, 기본 키압도 높지 않아서 경쾌하다. 함께 공개한 차트에 따르면 입력지점까지의 키압은 약 50g이며, 입력지점까지 슬라이더가 이동하는 거리는 약 2mm 정도다. 스피드 스위치보다는 약간 멀지만, 스피드 스위치가 너무 예민해서 오타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당히 밸런스가 잡힌 올라운드형 스위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쾌하다고 해서 키감까지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다. 같은 택타일 방식인 체리 갈축에 비해 손 끝에 걸리는 느낌이 강하다.



체리 & 카일, LP형 스위치를 더 보급할 계획?


▲ 체리 부스에 전시돼 있는 LP(Low Profile) 스위치 키보드


이번 컴퓨텍스 2018에 각 제조사들이 전시한 키보드 가운데는 높이가 낮은 키보드들이 종종 보였다. 펜터그래프 키보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필자가 눈에 보이는대로 모조리 키캡을 뽑아 확인해 본 결과 거의 대부분이 체리와 카일의 LP(Low Profile, 일반 기계식 키보드 스위치보다 높이가 낮은)형 스위치를 사용한 제품이었다.


유명 키보드 제조사들도 한 두개 정도는 LP형 제품을 내놓는 것으로 봐서 체리와 카일이 LP 스위치를 의욕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카일의 경우 LP형 스위치의 종류가 무려 세 개나 된다. LP형(Mid height), 초콜렛 스위치, 노트북용 스위치가 그것. 


▲ 카일의 초콜릿 스위치, 높이가 낮지만 느낌은 기계식의 느낌 그대로다


▲ 카일의 노트북용 스위치, 펜터그래프 구조를 빌려왔지만 중간에 기계식 키감을 내주는 버튼이 숨어있다


▲ LP형 스위치를 사용한 기계식 키보드. 마치 펜터그래프 키보드처럼 생겼다



대세가 빠르게 변하는 키보드 시장, 누가 승리할 것인가?



키보드는 PC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시각,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감성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물건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현재로써는 기계식 키보드다. 이미 기계식 키보드의 보급률은 많이 올라간 상태. 기계식 키보드 보급에 일조한 저가형(보급형) 기계식 키보드의 뒤를 이을 차세대 대세는 어떤 키보드, 어떤 스위치가 될 것인지 사용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컴퓨텍스에서 공개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다음 대세는 어떤 제품이 될 것인지 상상해 보자. 



글, 사진 / 송기윤 (iamsong@dana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