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5월7일 강원도 양구 인근의 동부전선을 넘어 귀순한 신중철 소령
(35세, 귀순 당시 북한군 대위)
이 그해 10월25일 육군회관에서 이미숙(23세, 보훈신학교 3년)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1983.10.25.) 전 강원대 총장 이민재 박사가 주례로 보았고 군 고위 장성과 이북5도 지사 군수와 귀순용사 등 5백여 명이 참석했다.
신중철은 북한군 대위로 북한 제13사단 민경대참모장이었다.
귀순 당시 말라서 광대뼈가 매우 돌출되어 있고 다소 초췌해보이나 후일 신중철은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으나,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귀순 후 1983년 8월1일 육군본부 강당에서 우리군 소령으로 임관됐다.
월남 귀순자가 육군 영관장교로 임관된 것은 처음이었다.
신중철은 북한기밀을 우리 군에 상당히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5~7일 남침작전계획’을 알렸고 귀순 직후 ‘강원도 양구 북방에 땅굴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서, 탐색 7년 만에 1990년 북한의 제4땅굴 을 발견할 수 있게 했다.
신중철은 1948년 3월29일생으로 강원도 창도군 백현리 3반 군관사택에 기거했다.
5남3녀 형제자매 중 4째로 출생했고 월북 당시, 모친과 부인(박순희 34세), 장남(6, 유치원생), 차남(3)이 있었다. 고건원 고등광업학교 기술반과 고등반을 졸업하고 1967년6월 제7사단에 입대하여 1981년8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1967년 7월 전사, 1874년 상사, 1976년 중위, 1979년 4월 상위 1982년 2월 대위로 진급했다.
신중철은 김일성의 차남인 김평일과 절친한 사이로 성분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중철은 우리 국군 소령으로 입대한 후 약 10년간 국군정보사령부 적전술연구단에서 근무했고, 1993년부터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 1995년 6월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기독교 활동도 활발히 했다. 남파간첩이었던 김신조가 설립한 월남귀순용사선교회에서 부회장직도 맡으며, 북한교회 재건운동 과 북한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신중철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2000년 6월 중국으로 출국한 뒤 잠적한 것이 드러났다. 공안당국은 이 사실을 2001년 5월29일 발표했다.
신중철은 거주하던 경기도 일산지역에서 이발소 직원 안마사였던 여성과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이 여성이 고정간첩으로서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추정했다.
또 신중철이 1980년 광주사태 현장에 있었다가 1983년에 위장으로 귀순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신중철은 중국으로 가기 전, 남한생활에 적응이 안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공안당국이 신중철의 행방은 추적했으나 성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