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실록에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소송관련이야기입니다
소송시작 1765년(영조)
소송종료 2008년
명당자리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면서
사건이시작이됩니다
영조 1765년
윤관장군 묘소가 있는데
파평윤씨가문이랑 청송심씨가문이
서로 묘자리를 두고 소송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에게까지 보고되는 소송입니다
영조실록에 나옵니다
윤관장군의 외손이 청송심씨입니다
심씨가 윤씨집으로 장가를오면서
출가외인도 사위도 윤씨집에서 묘를 썼는데
심씨가 윤관장군묘에 묘를 쓰면서
서로 싸움이 붙었고 서로 이장을해라
하게되었고 영조에게까지 보고가된것입니다
"예전에도 삼심제 였으면
처음에 고을에 원님에게 상소를
여기에 해결이안되면 도지사(관찰사)로
올라가고 여기서도 해결이안되면
왕에게 올라가게됩니다
이런이유로 조선실록에보면
마을에 폭력사건도 왕이 나중에 판단하게
되는일이 많았다고합니다"
서로 명당자리를 차지하기위한 소송입니다
묘가 산에 있기때문에 산송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송이 1765년에 기록이되었고
해결된게 언제일까요?
2008년에 해결이되었습니다
2008년에 심씨묘소를 이장하기로
합의가되었습니다
묘가 같은 자리라고볼수는 없고
윤관장군묘 바로 위에 심씨묘소가
있기에 명당자리의 기운을 같이받는다는
그런 이유에서 소송이벌어진것입니다
윤관장군묘 검색해보시면
바로 위에 심씨묘가
바로 보이는게 나올겁니다
243년이 걸린 소송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점은
무덤,산소,장례 이런것에대한 관념이
생각하는것보다도 엄청나게 높다는것입니다
이건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이기도합니다
지금이야 퇴색되고 많이사라졌지만
종가집이라던지 뼈대있는 가문들에게
조상의묘라는게 포기할수없는일이고
타협할수없는일이라는걸
이런 소송으로인하여 어느정도는
가늠할수있는것같기도합니다
다른게 생각해보면 나의 정체성의
뿌리이기에 포기할수없는일기도하다고
생각이듭니다
조상과 나와 나의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지는
연결고리이기도하고 연속성에 있는게
바로 조상의묘이기도합니다
요즘 젊은사람들이 이해할수없는일이기도
하겠지만 종묘를 생각해보면
잘알수있지않을까 생각이듭니다
종묘는 가장좋은자리에 있고
조선의 연속성을 연결고리이기도합니다
그만큼 조상들은 명당자리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것으로 보여집니다
조상을 잘모셔야 내가 잘되고 나의자손까지도
잘된것이라는 조상숭배사상이 깔려있는것입니다
다만 조선의 왕들이 가장좋은자리에
왕릉을 만들었지만 결국은 조선도 망했다는게
아이러니하기도합니다
이런것들도 다 그 시대의 문화라고 생각하시면
될것같습니다
장례문화라는게 그시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기도합니다
살고 죽는다는게 그시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않지만
그때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는게
이런일들로 알수있다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