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주ㆍ노ㆍ초ㆍ파ㆍ남ㆍ보….’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색은 거기까지였다. 24가지의 총천연색 컬러에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 방금 전까지 누볐던 회색빛 도시는 기억속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빈자리엔 유년 시절 만화경 에서 보던, 알록달록한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노트, 다이어리, 앨범, 바인더가 이렇듯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노트 한 가지 품목의 종류만 96가지. 빽빽이 꽂혀 있는 노트 가운데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바다 냄새가 훅 끼쳐들 것 같은 진파랑 노트.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엮인 패브릭 커버, 얼룩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고른 염색, 견고하고 깔끔하게 묶인 뽀얀 속지. 표지엔 아무 글씨도 없다. 커버 한쪽 귀퉁이에 음각으로 파 넣은 브랜드 이름, ‘Bookbinders Design’이 전부다.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문구 브랜드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에 자리한 ‘북바인더스 디자인’의 한국 제1호 매장.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문구 브랜드, 북바인더스 디자인은 반세기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1927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제본 공방으로 출발해 이젠 전 세계에 직영 매장만 40여 개를 거느린 굴지의 디자인 문구 브랜드로 우뚝 섰다. 창업자, 마틴 앤버그는 솜씨가 뛰어난 제본 장인이었다. 그의 꼼꼼한 손길을 거친 성경책, 파일 시스템, 바이더가 입소문을 타면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1965년엔 독립해서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다. 1970, 80년대엔 광고 및 디자인 대행사 등 굵직굵직한 기업이 주요 고객으로 떠올랐다. ‘규모의 경제’가 시작된 셈이다. 1982년엔 마틴의 아들 페릭(Par-Erik)과 딸 카리나(Carina)가 경영에 뛰어들었다. 디자인을 전공한 남매는 제품에 감각적인 디자인과 세련된 컬러를 녹여 넣기 시작했다. 뛰어난 디자이너를 대거 영입했고, 마케팅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모든 제품을 기계가 아닌, 장인의 손으로 정성껏 만든다는 원칙만은 변함없이 지켰다. 북바인더스 디자인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개성 넘치는 컬러, 기능성이 뒷받침된 디자인, 소유욕을 자극하는 디자인을 고수해왔다. 환경을 위한 마음 씀씀이 또한 유별나다. 생산 공정엔 환경친화적 재료만 쓴다. 노트의 속지는 인체에 유해한 화학 처리를 거치지 않은 ‘중성지’. 또한 모든 제품은 재활용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기특하게도 소각할 때조차 유해 물질을 뿜지 않는단다. 심지어 공장과 매장 청소를 위한 세제까지도 환경 인증을 마친 친환경 제품만을 사용한다니 보통 별난 고집이 아니다. 북바인더스 디자인은 말한다. 삶을 기록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행위는 없다고. 해맑게 웃는 순간이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든 빠짐없이 기록할 것을 권한다. 모든 순간은 기록으로 남겨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록은 추억을 반추하는 희열을 안겨주며, 시공간을 초월해 기록의 주인공을 세상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는 까닭이다.
스웨덴 사랑에 푹 빠져버린 남자 “오랜만이에요.” 아직까진 우리에게 낯선 브랜드, 북바인더스 디자인을 국내에 들여온 주인공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걸어온다.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의 박종덕 대표이사다. “그러게요.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요.” 눈썰미 있는 독자는 기억하리라. 본지 53~54호에 실린, 사브 9-3 스포츠콤비 스웨덴 시승회 기사의 작은 사진에 나왔던 그의 모습을. “그때 스웨덴의 매력에 흠뻑 취해버린 거죠. 앵무새처럼 보도자료를 되뇔 때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그곳의 환경에 풍덩 빠져보니 알겠더라고요. 검소한 듯 심플하면서도 은근히 세련된 멋이 어떤 것인지를요. ‘점잖은 사치’랄까요. 자동차도 마찬가지예요. 벤츠, BMW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치라면, 사브와 볼보는 스스로를 위한 사치인 셈이지요.” 그가 스웨덴과 인연을 맺은 계기 역시 자동차였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마련한 중고차가 사브 900S였다. 사브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레 스웨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GM코리아에 입사해 사브ㆍ캐딜락의 마케팅을 맡기에 이르렀다. 평소 디자인에 관심 많던 그는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사브 대학생 디자인 공모전을 론칭시켰다. 지난해 홀연히 수입차 업계를 떠나 한 외국계 은행의 마케팅 이사로 변신한 그는 얼마 전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를 세우며 스웨덴과의 질긴 인연을 과시했다. 사업을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단다. 북바인더스 디자인에 사업 제의를 해온 한국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본사 쪽에서도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 한 잡지에 북바인더스 디자인이 소개됐다. 얼마 후 스웨덴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3개의 한국 기업이 경합을 벌이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던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건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열정뿐. 그는 장문의 편지를 쓴다. 북바인더스 디자인은 결국 그를 파트너로 점찍었다. 그의 편지에 감동한 CEO의 결정이었다. “무릇 모든 제품엔 만든 나라의 정서가 스며 있다고 생각해요. 북바인더스 디자인의 제품엔 스웨덴이 녹아들었지요. 북바인더스 제품의 다채로운 컬러는 낮게 뜬 북구의 태양빛을 받은 사물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했대요. 너무나 멋지잖아요. 노트 한 권으로 낯선 이국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그는 “사업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국에 매장을 열 군데 정도 열 계획이고, 가구 수입도 생각 중이다. 못 말리는 스웨덴 사랑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해준 셈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다 그의 차를 발견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역시 그다운 선택이었다. 사이드 미러 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의 곁을, 스웨덴 차 볼보 S60 D5 한 대가 다소곳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가 하루빨리 꿈을 이루길 기원해야 마땅하겠거늘, 그 시기가 좀 더 늦춰졌으면 싶은 못된 심보가 꿈틀댔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볼보에서 만나봤으면 싶은 바람에서다.
북바인더스 디자인 코리아 : (02) 546-9500, www.bookbindersdesig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