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7일 맥라렌의 새로운 모델, 아투라(Artura)가 공개됐다. 570, 620, 720 등과 같이 숫자로 라인업에 구분을 주던 맥라렌이었지만, 맥라렌 GT를 시작으로 넘버링을 버리고 구체적인 이름들을 붙이면서 라인업 구분이 다소 애매모호하게 됐다. 570의 후속이라 불리는 아투라는 어떤 차일까?
제조사 입장에서 엔트리 레벨의 차량은 기함급 플래그쉽 못지않게 정말 중요하다. 물론 중요하지 않은 모델이 있는 건 아니지만, 슈퍼카를 처음 접하는 소비자들은 엔트리카부터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슈퍼카는 일반 차량들과 다르게 수명이 다 할 때까지 10년 넘게 한 오너가 타는 경우가 드물고, 마음에 들면 바로 같은 브랜드의 상위 모델로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엔트리카의 역할이 일반 브랜드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크다.
경쟁 차량들과 비슷한 가격대로 묶이면서 차별화된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단종된 570은 꽤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한 편이다. 판매고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우리나라 거리에서 보이는 많은 맥라렌이 570들이었다.
하지만 570은 출시된 지 벌써 6년이 지났고 어느덧 단종되어버렸다. 기본 모델보다 낮은 퍼포먼스의 540부터 570GT, 컨버터블 모델에서 600LT까지 다양한 변종들이 나왔지만 결국 맥라렌 라인업에서 자취를 감췄고 후속으로 아투라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비록 아투라가 570의 후속이란 소리를 듣지만 엄밀히 말해 2세대 570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투라의 프레임과 파워트레인은 모두 새롭게 제작됐고 맥라렌 어느 차량보다 전동화의 비율이 높아졌다.
또 원래 브랜드 엔트리카의 위치를 맡았던 570이었지만 아투라로 넘어오면서 엔트리카의 자리는 맥라렌 GT에게 넘어갔다. 맥라렌 GT는 이름 그대로 그랜드 투어러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퍼포먼스 측면에서 아투라보다 떨어지는 편이고, 가격도 아투라보다 낮다.
맥라렌은 상하관계가 있다기 보다 특성이 다르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엔트리는 570의 후속이라 여겨지는 아투라에서 맥라렌 GT로 넘어간 것이다. 이미 정착된570이란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택한 것도 이런 정체성을 바꾸는 맥락이라고 이해된다.
하이브리드하면 흔히 연비 개선에 도움이 되는 차로 인식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전기 모터의 토크 특성을 살려 많은 슈퍼카들에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채택되고 있다. 덕분에 1000마력 이상의 말도 안되는 성능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됐다. 그러나 아투라는 이정도 마력을 갖고 있진 않다. 맥라렌은 단순히 마력으로 찍어 누르는 차는 만들지 않는다.
그저 직선에서 빠른 차는 많다. 무거운 4도어 세단들도 요즘은 최고속도 300km를 훌쩍 넘기는 차량들을 보는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맥라렌의 진가는 트랙에서, 코너링에서 나온다. 패키징에 일가견이 있는 것이다.
크고 무거운 엔진에 거대한 모터를 조합하면 1000마력을 넘는 건 쉬운 일이 됐다. 이런 차는 직선에서 로켓처럼 튀어나가겠지만 코너링에 들어가면 운전자에게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 될 것이다.
맥라렌은 날카로운 코너링을 위해 보이지 않는 성능들에 집중한다. 종합적인 밸런스, 무게중심의 조정이나 경량화를 위한 세심한 설계 같이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 덕분에 양산차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주행 감성으로 맥라렌만 고수하는 골수 팬들도 있다.
아투라는 맥라렌 최초의 대량생산 하이브리드 슈퍼카다. 이 전에 P1같은 걸출한 하이브리드 모델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의 최초는 아니지만 한정판이 아닌 모델들 중에서는 처음이다. 아투라와 P1의 위상을 비교하면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다. 라페라리와 918이란 걸작들과 맞상대 한 P1은 맥라렌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아투라가 P1을 능가하는 부분들이 있다. 15억원에 달하는 P1과 비교해서 2억을 간신히 넘는 아투라가 P1을 능가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투라가 P1을 능가하는 부분들은 대표적으로 배터리와 모터 등이 있다. P1이 나올 당시만 해도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 자체를 보기가 꽤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 때보다 전기차가 훨씬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눈부시게 발달한 배터리와 모터 기술을 아투라가 톡톡히 누리는 것이다.
아투라의 변속기 속에 들어있는 모터는 P1의 모터보다 전력 밀도가 33%나 더 높다고 한다. 더 가벼운 모터가 더 높은 출력을 낸다고 한다.
이외에도 아투라는 첫번째의 타이틀을 상당히 많이 가져간다. 맥라렌 모델 중 최초로 맥라렌 카본 라이트웨이트 아키텍처란 프레임을 적용하면서 1400kg 이하의 무게로 동급 가장 가벼운 무게를 갖게 됐다.
또 기존 7단 변속기를 쓰던 다른 맥라렌 모델들과 다르게 처음으로 새로 개발된 8단 변속기를 쓰는데 이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다. 바로 경량화를 위해 후진 기어를 아예 빼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후진을 못하진 않는다. 후진은 모두 모터에게 맡겨버렸다.
만에 하나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후진을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맥라렌에서도 그런 걱정이 있었는지, 오로지 후진만을 위한 전용 배터리가 따로 할당돼 있다고 한다. 경량화를 위한 집념이 인상적이다.
아투라에 들어간 타이어도 다른 자동차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기능들이 들어가 있다. 피렐리에서 아투라만을 위한 전용 타이어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피렐리의 하이엔드 타이어 피제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투라의 타이어엔 피렐리 싸이버 타이어 시스템이 적용 돼있다. 이 시스템은 타이어에 각각 컴퓨터 칩이 심어져 있어서 딜레이 없는 리얼타임으로 타이어의 압력과 온도를 운전자에게 전달한다.
타이어의 트레드도 아투라의 성능에 최적화된 전용 패턴으로 설계돼서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접지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외에도 모든 기능들을 쓰자면 수십페이지도 넘는 분량이 나오지만 다른 차에서 보기 힘든 아투라만의 독특한 특징만 간단히 정리해봤다.
새로운 아투라의 디자인은 크게 세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순수성(Purity)이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라인이 깔끔해 보이고 이런 1차원적인 감상보단 복잡한 차량의 구성이 일체감이 들도록 통합되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는 기술적 조각(Technical Sculpture)이다. 디자인을 주도한 롭 멜빌(Rob Melville)에 의하면 기술적 조각이란 차량의 기능적 측면이 디자인을 해치지 않고 조형적 아름다움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여야 하지만 그런 조형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기능적 보석(Functional Jewellery)이다. 기능적 보석은 의도적인 장식적 요소를 넣지 않고도 심미적으로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디자이너가 말하는 아투라의 특징들로 실제로 크게 와 닿진 않는다. 마치 디자인과 수업을 듣는 기분이다.
전면부와 측면부에서는 전체적으로 570의 느낌이 어느정도 남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전면부는 헤드램프에서 상위 모델인 720의 조형도 언뜻 보이고 단순했던 570보다 입체적인 마스크를 갖게 되면서 확실히 더 나아졌단 생각이 든다.
측면부는 더욱 거대해진 사이드 벤트가 가장 먼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사이드에서 바라본 실루엣은 언제나 보던 전형적인 맥라렌의 모습이지만 570과 비교했을 때 더 간결해지고 미니멀 한 스타일링이 부각된다. 디자이너가 말하는 순수성이 잘 나타난다.
후면부 디자인은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간결한 디자인이 독이 된 것처럼 570과 비교해서 확연히 나아졌다고 말하기 힘들다. 기존 롱테일 모델들 처럼 넓은 메쉬 디테일이 스포티한 감성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램프의 그래픽이 너무 애매하다. 확실히 심플해지긴 했지만 멋지다는 느낌이 선뜻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디자인을 보면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프론트에서 570보다 확연히 나아진 느낌을 주는 게 좋은 평가를 많이 받고 있다.
해외의 평가는 대부분 무난하게 좋다는 쪽이다. 요즘 들어 부쩍 기존 브랜드 디자인과 확 달라지는 신형 모델들에 거부감이 커서 그런지, 적당히 무난하게 맥라렌스러운 디자인이 오히려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
하지만 7:3정도 비율로 호평들 속에 디자인이 너무 진부하다는 일부 의견들도 섞여 있다. 몇몇 해외 덧글들을 번역해 보았다.
“디자인이 혁신적이지 혁명적이지 않은 게 정말 마음에 드네. 디자이너들이 기존 스포츠 시리즈, 720S, 스피드테일의 디자인을 잘 참고해서 우아한 디자인을 뽑아낸 것처럼 보인다. 편안하고 매일 탈 수 있는 성능에 중점을 둔 것도 좋아. 롱 테일 모델들은 트랙에서나 좋지 그거 빼곤 너무 끔찍하니까. 테슬라스러운 터치스크린이 좀 싸구려 같이 보이지만 큰 불만이 되진 않는다.”
“와우 대박인데! 스타일링이 약간 뻔하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간 것보단 나을지도. 심플하게 우아한 디자인이 시간이 지나도 괜찮게 보일 것 같아. 내 눈에 띈 건 새로운 120도 각도의 V6엔진이야. 그냥 엔진만 따로 보고 싶네.”
“훌륭해!! 맥라렌은 정말 최고야... 내 단 하나의 불만은 이게 너무 전형적인 맥라렌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거야. 누가 디자인 좀 살려봐!
“멋져 보이는 차다. 성능도 환상적인 것 같고, 운전하기에도 정말 좋겠지만... 디자이너들이 좀 신 모델은 이전 모델과 확 다르게 못하나? 내 눈에는 570과 다를 게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아투라 같은 엔트리 급에 가까운 차량이 P1 같은 이전 브랜드 최상위 모델에 일부라도 견줄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다.
맥라렌의 로드맵은 앞으로 10년 안에 하이브리드 모델들을 더욱 많이 내고 동시에 순수 내연기관 모델들을 줄여 나간다고 한다. 그 이후엔 순수 전기차도 낼 예정이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나오진 않는다고 밝혔다.
맥라렌이 경쟁하는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만큼 판매량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다양한 모델들을 내면서 수익성이 좋지 못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연 전기차의 시대가 올 때까지 맥라렌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