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 판매되는 신차의 평균 보닛 높이가 SUV 확산에 따라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특히 이 같은 변화가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 등 도로 위 취약계층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환경 NGO인 T&E(Transportation & Environment)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영국, 노르웨이 시장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 신차의 평균 보닛 높이는 2010년 76.9cm에서 2024년 83.8cm로 증가했다. 이는 해당 지역의 보닛 높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보고서로, 같은 기간 SUV의 시장 점유율이 12%에서 56%로 급증한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
현재 유럽 및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신차의 보닛 높이에 대한 법적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고서는 보닛 높이 증가가 보행자 충돌 시 중대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높이가 80~90cm에 달하는 차량은 충돌 시 성인 보행자의 가슴 부위나 장기에 직접적인 충격을 가할 가능성이 높고, 시속 50km 이하에서도 보행자가 차량 하부로 말려 들어갈 위험성이 커진다.
벨기에에서 발생한 약 30만 건의 도로 사고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보닛 높이가 10cm 증가할 경우 보행자·자전거 이용자·기타 취약계층의 사망 위험이 평균 27%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높은 보닛은 운전자의 시야 확보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T&E가 의뢰한 실험에서, 전면부가 가장 높은 차량 중 하나인 램 TRX 운전자는 차량 바로 앞에 선 9세 이하의 어린이를 식별할 수 없었다. 랜드로버 디펜더 역시 4세 아동까지 시야에서 가려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T&E 차량 정책 관리자 제임스 닉스는 “높은 보닛은 도로 위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며 “운전자가 아이를 볼 수 없는 차량이 도심을 달리고 있는 현실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30개 이상의 시민 사회 단체들은 EU 집행위원회에 2035년까지 보닛 높이를 포함한 신차의 치수 제한 규정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보닛의 경우 임시 권장 기준을 85cm로 설정하고, 2035년까지의 유예기간이 자동차 제조사의 생산 및 설계 조정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T&E와 클린 시티 캠페인은 각국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차량의 무게와 크기에 따라 세금 및 주차요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시 내에서 대형 차량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공공 공간이 잠식되고 보행자 안전이 후퇴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클린 시티 캠페인의 선임 이사 바바라 스톨은 “차량이 너무 커져서 아이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도시 지도자들이 ‘괴물 차량’ 없는 안전한 거리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단체들은 EU 집행위에 2027년 7월까지 해당 입법안을 공식 발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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