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차 크기가 크지 않은 나라다. 비록 21세기 들어 크로스오버 SUV가 대두되면서 조금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B 세그먼트 모델이 주력이다. B 해치 및 세단과 B SUV를 합친 전체 B 세그먼트가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승용차 시장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글 / 나윤석 (자동차 전문 칼럼니스트)
이런 관점에서 볼 때 C SUV 세그먼트 모델인 르노 세닉 E-Tech가 작년 ‘유럽 최고의 차’ 상을 수상한 것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프랑스 기준으로는 결코 작지 않은 차체 크기를 가진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기준에서는 B SUV와 C SUV의 중간 쯤에 위치하는 4.47m의 길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스포티지와 같은 1.865m의 폭 만큼은 이 프랑스 기준에서는 확실히 넓은 축에 속한다. 2.785m의 휠 베이스 역시 동급 내연기관 모델은 물론 전기차 기준에서도 꽤 여유로운 편에 속한다.
즉, 르노 세닉 E-Tech는 프랑스 시장 표준을 확실하게 초과하는 차체 크기를 가진 모델이다. 물론 프랑스 승용차 시장의 2024년 기준 16%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플러그인 전기차(BEV+PHEV) 시장의 차 크기가 내연 기관 자동차 시장보다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기차로서 프랑스산 자동차 최초로 유럽 올해의 차로 선정된 것이 하필이면 C SUV인 르노 세닉 E-Tech라는 것은 절대 우연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번째로 세닉 E-Tech는 르노 전기차 시대를 열면서 프랑스 중심의 현재 시장 전략을 더 넓은 시장으로 확대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닉 E-Tech은 르노의 새로운 전기차 라인업의 기함 역할을 하는 모델이다. 즉, 차체 크기만 프랑스 시장 기준으로 큰 것이 아니라, 사양 자체가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높은 사양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빛의 투과량을 조절할 수 있는 솔라베이 파노라믹 선루프, 뒷좌석 승객에게 다양한 용도를 제공하는 다기능 센터 암레스트 등 뒷좌석을 포함한 모든 좌석의 거주성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내부적으로는 신임 회장의 취임 시기와 어우러진 세닉 및 르노 전기차 전략과도 무관하지 않은 야심작이라는 면도 반영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세닉 E-Tech은 본격적인 볼륨 모델인 르노 5와 4로 이어지는 르노의 새로운 전기차 라인업 전략에 매우 중요한 쇼 케이스였다. 출시와 함께 올해의 차도 수상했으니 시장에 또렷한 인상을 남기는 것에도 일단 성공했다. 이제는 르노의 포지셔닝을 전기차와 C 세그먼트 이상에서도 견고하게 끌어올리는 것만 남았다.
두번째는 시장 다변화다. 앞서 말했듯이 B 세그먼트 모델이 주력인 프랑스에서도 전기차는 조금 사이즈가 크다. 즉, 독일 등 프랑스보다 큰 차가 더 많이 팔리는 서유럽 시장, 그리고 우리 나라처럼 유럽 이외의 차 크기가 좀 더 큰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글로벌 시장 공략용 무기가 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우리 나라가 세닉 E-Tech가 서유럽 이외의 첫번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르노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가 자신의 전기차 전략의 파일럿 시장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메이드 인 프랑스’ 완제품 수입차인 세닉 E-Tech가 우리 나라 시장을 위하여 어떤 부분에 특별한 튜닝이 있는가가 두 가지 관점에서 궁금했다. 첫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르노 모델과는 다른 새로운 전략적 목표를 갖고 있는 세닉이 니즈가 다른 시장에 얼마나 유연한 적응력을 보일 수 있는가였다. 두번째는 연구소가 존재하는 르노 코리아는 본사로부터 완제품으로 수입하는 제품의 시장 현지화 과정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였다.
관계자의 정보에 의하면 국내 도입용 세닉 E-Tech에는 스티어링 시스템과 서스펜선의 설정에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 시장에 비하여 승차감과 정숙성 등을 더 중시하는 우리나라 고객들의 취향에 따라 부드러운 방향으로 새롭게 튜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승 결과 다소 복잡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르노코리아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세닉 E-Tech은 12:1의 빠른 조향 기어비와 10.9m의 짧은 회전 지름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 고객의 입장에서 볼 때 크고 1.9톤 전후의 무거운 차인 세닉이라도 B 세그먼트 모델에 익숙한 그들에게 익숙하고 길이 좁은 유럽 도심에서도 쉽게 운전할 수 있는 민첩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기본 특성을 바탕으로 우리 나라 고객의 입맛에 맞게 튜닝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매우 민첩한 스티어링 휠은 너무 가벼워서 좀 더 안정감이 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앞좌석에서는 프랑스산 승용차에서 느끼는 최고의 승차감과 정숙성을 이룩한 반면 뒷좌석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동시에 아쉬운 점이 있었다. 물론 대중적 고객들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차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프랑스 차에서 기대하는 ‘쫀득한 주행 감각’이 타협되었다는 점이었다. 분명 달리는 맛도 나쁘지 않고 승차감도 준수한 꽤 괜찮은 주행 질감을 보여주었지만 프랑스 차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함은 아니었다.
어쩌면 트집을 잡는다고 하실 분이 계실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세닉 E-Tech는 기존의 르노 모델들과는 달리 상당히 프리미엄한 구성을 가진 모델이다. 즉, 실용 패밀리 크로스오버 SUV라기 보다는 좀 더 르노의 미래를 경험할 수 있는 보다 자동차 유경험자, 즉 고관여 고객에게 어울리는 모델이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처음에는 다소 높은 것이 아닌가 의아했던 세닉 E-Tech의 국내 가격이 의외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좀 더 프랑스 르노의 개성이 살아있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세닉 E-Tech은 진화중인 모델이다. 르노로서는 전기차의 새로운 라인업을 여는 쇼 케이스같은 모델이고, 그래서 르노가 야심차게 높은 사양을 듬뿍 담은 프리미엄 모델이기도 하고, 프랑스 시장 너머를 겨냥한 시장의 지평을 넓히는 모델이고, 서유럽을 벗어나 한국이라는 시장에 맞게 어댑테이션 과정을 거친 어쩌면 최초의 모델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이 있다. ‘나 다움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줄 것인가?’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시장성 사이의 고민은 매우 어렵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답을 찾는 질문은 하나 있다.
그것은 ‘나를 보여주고 싶은가, 아니면 더 많은 고객들에게 사랑받고 싶은가?’
이것이 바로 해당 모델의 임무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세닉의 임무는 무엇일까?
<저작권자(c) 글로벌오토뉴스(www.global-auto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