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한국의 배터리 산업은 '제2의 반도체'로 불리며 국가 대표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았다. 전기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2차전지 산업은 국내외 투자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에는 모두가 외쳤다. "배터리의 시대가 온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주요 배터리 기업들의 주가는 반토막을 넘어 일부는 70~80% 가까이 급락했다. 한때 '꿈의 산업'으로 불렸던 배터리 산업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리고 정말 다시 빛을 볼 날이 올까.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현재 한국 배터리 산업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곳은 유럽 시장이다. 한때 유럽은 친환경 정책의 선두주자답게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의 핵심 시장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한때 유럽에서 점유율 50%를 자랑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유럽 소비자들이 보급형 전기차로 눈을 돌리면서, 중국산 저가 배터리가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가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환경 규제가 강한 만큼 전기차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로 소비자들은 더 이상 비싼 전기차를 원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서 중국산 배터리, 특히 'LFP 배터리'가 급부상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주력하는 'NCM 배터리'는 성능이 더 좋지만 가격이 비싸다. 반면 LFP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최근 기술 발전으로 성능 차이도 줄어들고 있다. 그 결과 유럽 시장에서는 중국 배터리가 빠르게 확산되고,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점유율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한때 시장 낙관론에 취해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배터리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왔던 시절,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한 주요 기업들은 생산 능력을 공격적으로 늘렸다. 미국을 중심으로 수십조 원의 투자가 진행됐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시장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기차 판매가 둔화되면서 배터리 수요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공장 가동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 많이 만들고 싶어도 팔 곳이 없으니, 공장만 덩그러니 남았다. 이는 재무 구조 악화로 직결됐다.
LG에너지솔루션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삼성SDI와 SK온은 적자의 그림자가 짙다. 특히 SK온은 매출이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너무 빠른 투자로 인해 생산 원가가 높고, 시장에서는 저가 수주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마진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배터리 산업이 살길은 무엇일까. 답은 기술에 있다.
가장 먼저 주목받는 기술은 'LMR 배터리'다. 이는 기존 NCM 배터리에서 비싼 코발트 사용을 줄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망간 비중을 늘린 기술이다. 가격은 LFP와 비슷하면서도 성능은 기존 NCM 배터리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아직 상용화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 기술이 자리 잡는다면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 새로운 무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건식 공정'도 주목할 만하다. 기존 배터리 생산 방식보다 생산 속도가 빠르고 제조비용도 낮출 수 있는 기술이다. 공정이 단순화되면서 공장 투자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고, 생산 효율도 크게 높아진다. 이 역시 아직은 시험 단계지만, 상용화에 성공하면 중국 배터리 기업들과의 가격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카드가 된다.
궁극적으로는 '전고체 배터리'가 있다. 전고체 배터리는 기존 배터리보다 안전하고, 주행거리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술로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다만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전망이다. 빠르면 2030년 이후로 예상된다.

배터리 산업이 어렵다고 해서 시장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전기차, 에너지 저장장치(ESS),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등에서 배터리 수요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느냐, 그리고 기술 격차를 얼마나 벌릴 수 있느냐다.
한국 배터리 산업은 이미 상당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공세는 만만치 않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글로벌 정책 환경이 우호적으로 변한다면 반등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단기간에 큰 폭의 주가 반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국내 배터리 산업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가져가는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라 볼 수 있다.

배터리 산업의 본질은 매우 명확하다. 석유 시대가 저물고 전기 시대가 열리는 지금, 배터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모든 에너지원이 전기로 전환되는 시대, 배터리 없이 돌아가는 산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의 위기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한 이후, 한국 배터리 산업이 다시 한 번 글로벌 시장의 주역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과거 반도체 산업이 그랬듯, 배터리 산업 역시 기술을 기반으로 재도약의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장미빛 미래'만 보고 배터리 산업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기술력, 재무 구조, 시장 환경 등 현실적인 요소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배터리 산업은 분명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성장의 속도와 수익률은 생각보다 느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배터리 산업은 '한방'을 노리는 투자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 시대의 기반 산업으로서 장기적으로 천천히 성장하는 산업으로 바라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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