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폭스바겐은 전기차 ID.3를 내놓으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당시 폭스바겐은 iD.3를 비틀과 1세대 골프처럼 브랜드의 운명을 바꾸는 모델이 될 것이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고, 제품의 완성도는 호언장담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폭스바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완성차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혼란이었다. 메르세데스, 토요타, 제너럴 모터스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EV를 ‘새로운 비전의 산물’이 아니라, 규제와 시대적 압력에 밀려 ‘해야만 하는 과제’로 받아들였다. 그런 태도는 결국 제품의 설득력을 약화시켰고, 소비자에게 매력적인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 채 가격 인하와 인센티브에 의존하는 구조로 이어졌다.

ID.4와 bZ4X 같은 모델은 이러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디자인과 포지셔닝은 테슬라를 겨냥했지만, 정작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경험은 담아내지 못했다. 특히 폭스바겐은 소프트웨어와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심각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실내에서 물리 버튼을 최소화하고 대형 스크린 중심으로 구성한 점은 테슬라의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으나, 결과물은 조악했다. 카리아드(Cariad)로 대표되는 자체 소프트웨어 부문은 반복적인 문제 해결 실패로 지적을 받았고, 잦은 오류와 불안정성은 소비자 불만을 키웠다. 도어 핸들 디자인과 같은 기본적인 부분에서도 완성도가 떨어져 장기간 판매 중단 조치까지 이어졌다.
폭스바겐의 전기차는 기술적 신뢰성에서도 흔들렸다. 모터와 배터리 관리 시스템의 문제, 실내 소재와 마감에서 드러난 원가 절감 흔적은 ‘독일차다운 완성도’라는 소비자의 기대와 배치됐다. 시장은 냉정했다. 결국 폭스바겐은 ‘EV 전환의 선봉장’이 아니라, 전환 과정의 미숙함을 상징하는 기업으로 비춰졌다.

이 같은 실패는 폭스바겐 내부에 중요한 자극이 됐다. 과거의 자신감이 ‘허세’로 비쳤다면, 이제는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전환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분명했다.
첫째, 소프트웨어는 단순한 부가 요소가 아니라 제품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EV는 단순히 파워트레인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차량의 경험 자체가 소프트웨어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둘째,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화려한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 편의와 가치라는 사실이다. 배터리 성능, 주행거리,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 합리적인 가격이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다.
셋째, 브랜드 전통의 강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폭스바겐은 오랫동안 섀시 튜닝과 주행 감각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 정체성을 살리지 못한 ID 시리즈는 결국 ‘폭스바겐답지 않은 폭스바겐’으로 기억됐다.

최근 공개된 ID. 크로스(ID. Cross) 콘셉트는 달라진 폭스바겐의 태도를 보여준다. 실내를 다시 물리 버튼 중심으로 재정비했고, 디자인 완성도와 소프트웨어 인터페이스를 개선했다. 이는 소비자 피드백을 적극 반영한 결과다.
ID. 크로스가 보여주는 가장 큰 변화는 ‘소프트웨어와 물리적 조작계의 조화’다. 테슬라는 소프트웨어 경험에서 탁월하고, GM이나 현대차는 물리적 버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직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은 브랜드는 없다. 폭스바겐은 이 영역에서 새로운 차별점을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물론 실제 양산차로 이어질 때도 이런 장점이 유지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방향성만큼은 분명하다. 폭스바겐이 더 이상 테슬라의 그림자를 쫓는 기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통적 강점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시대의 독일차’를 만들려 한다는 점이다.

ID. 에브리원(ID. EVERY1)은 폭스바겐의 미래 전략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엔트리급 전기차는 리비안과의 협력으로 개발된 새로운 존(zonal) 아키텍처를 적용한다. 이는 차량 전체를 OTA 업데이트로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며, 배선과 전자 제어 장치의 복잡성을 크게 줄여 원가 절감 효과를 낸다.
이는 곧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은 점점 더 치열한 가격 경쟁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내놓는 합리적 가격대의 전기차는 이미 유럽 시장을 흔들고 있고, 미국 역시 보조금 정책과 현지 생산 압력으로 복잡한 상황이다. 폭스바겐은 에브리원을 통해 “독일차도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리비안과의 협력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리비안은 사용자 경험 설계에서 독창적인 접근을 보여왔고, 폭스바겐은 생산 품질과 규모에서 강점을 지닌다. 양사의 결합은 EV 시장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폭스바겐이 직면한 도전은 내부 문제만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의 격변 역시 중요한 변수다. 중국 업체들의 급부상, 미국의 보호무역 성격을 띤 관세 정책, 테슬라의 불안정한 행보 등 외부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테슬라가 유럽에서 이미지를 소모하고 있는 사이, 폭스바겐이 유럽 내 EV 판매 1위를 차지하며 ‘전통 제조사의 반격’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안심할 수 없는 일시적 결과일 뿐, 중장기적으로는 소프트웨어와 가격 경쟁력에서 확실한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폭스바겐의 ID 시리즈 초창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실패는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가다. ID. 크로스와 에브리원이 보여준 변화는 ‘겸손에서 출발한 혁신’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 폭스바겐이 이 방향성을 양산차에 성공적으로 이식하고, 가격과 소프트웨어, 브랜드 정체성을 모두 아우른다면, 전기차 시대의 주역으로 다시 자리매김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허세가 아닌 겸손으로 시작된 두 번째 기회가 폭스바겐을 어디로 이끌지, 그 결과는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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