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6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중대한 정책 전환을 발표했다.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의 신차 판매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는 기존 방침을 철회한 것이다. 대신 2021년 대비 90%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이는 EU의 야심찬 전기차 전환 전략이 현실의 벽에 부딪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머지 10%의 배출량 감축을 위해서는 EU 역내에서 저탄소로 생산된 철강을 사용하거나, 합성연료(e-fuel)와 바이오 연료 같은 친환경 연료를 사용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면 자동차 제조사들은 하이브리드차와 내연기관차를 2035년 이후에도 계속 생산할 수 있다.
EU의 전기차 정책은 2019년 유럽 그린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기차 시장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중국에 대항하고 세계 표준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2025년 상반기 EU 27개 회원국의 전기차 판매 비중은 15.6%에 그쳤다. 프랑스는 오히려 전년 동기 대비 4.3% 감소했다. 북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전기차 보급은 예상보다 훨씬 저조했다.
전기차 부진의 영향은 202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스텔란티스의 미라피오리 공장은 피아트 500e의 판매 부진으로 2024년 9월 생산을 중단하고 직원들을 여러 차례 일시 휴직시켰다. 르노는 2025년 12월 12일 도심용 전기차 '모빌라이즈' 생산과 카셰어링 서비스 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같은 날 폴크스바겐은 ID.3 생산 거점이었던 드레스덴 공장의 가동을 종료했다.
전기차 판매 부진은 제조사뿐만 아니라 현장 딜러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많은 지역 자동차 판매점들은 제조사 방침에 따라 자비로 충전기를 설치해야 했다. 이윤이 적은 대중차 판매점에게는 결코 가벼운 투자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재고였다. 팔리지 않는 전기차들은 수리 중인 고객을 위한 대차로 활용되거나 직원들의 출퇴근용 차량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유럽에서 렌터카나 딜러 대차로 사용되는 전기차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다.
딜러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기차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론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제조사의 방침을 따라야 했던 딜러들은 이번 EU의 정책 전환을 복잡한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의 투자와 노력이 헛되지 않았나 하는 씁쓸함과 함께, 이제라도 현실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게 됐다는 안도감이 공존하는 분위기다.
소비자들의 반응 역시 복잡하다. 일찍부터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를 경험해온 소비자들조차 유럽 자동차 산업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EU 시민으로서 중국 제조사에게 시장을 내주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유럽 제조사들이 기술이나 생산 비용 면에서 뒤처진 것이 현실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높은 인건비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당장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전기차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EU 발표에는 저렴한 소형 전기차 규격 장려책도 포함되었다. 'M1E'로 명명된 이 규격은 전장 4.2m 이하로 정해졌으며, 제조사에게 일반 친환경차량보다 1.3배 많은 CO2 크레딧을 부여한다.
2025년 6월 토리노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스텔란티스의 존 엘칸 회장은 "EU는 일본의 경차에 해당하는 규격을 인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일본에서 경차가 40%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언급하며, 유럽에서도 같은 모델이 인가되면 충분한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 제조사들에게 경차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2009년 폭스바겐이 스즈키와 업무·자본 제휴를 맺은 것도(2011년 해소) 개발 경험이 없는 경차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차 개발에서의 비용 관리, 연비 절감, 경량화는 일본 자동차 산업의 기술과 노하우가 총집결된 결과물이다. 제휴를 맺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급망을 포함한 전체 협력 체계 위에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경차 전기차를 만드는 것은 크기만 줄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970년대 일본산 소형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제조사들이 개발했던 서투른 서브컴팩트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럽 제조사들이 진정으로 경쟁력 있는 소형 전기차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EU의 이번 정책 철회는 이상주의적 환경 정책이 산업 현실과 소비자 선택이라는 두 벽에 부딪혔음을 보여준다. 하이브리드차와 내연기관차에 e-연료와 바이오 연료 사용을 조건으로 2035년 이후에도 생산을 허용하는 이번 결정은, 기술 중립적 접근과 시장 친화적 정책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전환은 필요하지만, 그 속도와 방법은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정계 관계자들과 양국 자동차 회사들이 2024년부터 EU에 요청해온 규제 완화가 마침내 실현된 셈이다. 유럽 자동차 산업의 위기와 시장의 현실을 반영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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