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 스웨덴 동쪽 베름되(Värmdö) 지역의 발트해 연안에 자리한 아티펠라그(Artipelag)는 이름 그대로 '예술(Art)'과 '군도(Archipelago)'가 만나는 독특한 공간이다. 현대 미술 전시관으로 더 알려진 이곳이지만, 현지시간 1월 21일 하루만큼은 볼보의 새로운 도전을 목격하는 무대가 됐다.
새벽부터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아티펠라그의 입구. 유리로 마감된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눈내리는 풍경과 함께하는 주홍빛의 전시 공간이 펼쳐졌다. 발트해의 겨울 풍경이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가운데, 은은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낸 EX60는 생각보다 차분한 인상이었다. 볼보가 왜 이런 장소를 택했는지 이해가 됐다. 기술과 자연, 북유럽의 정체성과 미래 모빌리티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행사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느낀 건 '분위기'의 변화였다. 그동안 볼보 행사에 참석하면 늘 비슷한 키워드가 등장했다. 안전, 스칸디나비안 디자인, 가족, 편안함, 지속 가능성.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달랐다.
무대에 오른 볼보 경영진들의 메시지는 공격적이었다. "게임체인저(Game-changer)", "선구자(Pioneer)", "새로운 기준(New Standard)". 최고기술책임자 안데르스 벨은 "EX60는 볼보 전기차 역사상 가장 긴 주행거리, 가장 빠른 충전 속도,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한 차"라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폴스타에서 볼보로 다시 자리를 옮긴 디자인총괄 토마스 잉엔라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이기는 건 재밌어(winning is fun)"이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도전적인 그의 말에 처음엔 '볼보가 이런 말을?'이라며 의아하기도 했지만, 이내 수긍이 되었다.
이런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 볼보는 지난 2년간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차세대 전기차로 기대를 모았던 EX90은 출시 초기 소프트웨어 문제로 곤욕을 치렀고, 작고 저렴한 EX30은 미국 시장에서 관세 이슈에 발목을 잡혔다. 전동화 전환을 선언하고 달려왔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EX60를 바라보는 볼보의 시선에는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해야 한다는.
EX60가 EX90, EX30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플랫폼에 있다. 기존 SPA2 플랫폼의 EX90과 달리 SPA3 플랫폼은 볼보가 전기차 시대를 위해 구조부터 다시 설계한 결과물이다. 800V 전기 시스템, 경량화된 섀시, 그리고 무엇보다 '셀-투-바디(Cell-to-Body)' 배터리 설계가 핵심이다.
배터리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지금까지 대부분의 전기차는 배터리 셀을 모듈로 묶고, 그 모듈을 다시 팩으로 조립한 뒤 차체 하부에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을 썼다. 검증된 방법이지만, 구조가 복잡하고 무게가 늘어나며 공간 효율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최근 몇몇 제조사들이 모듈을 없애고 셀을 직접 팩에 배치하는 '셀-투-팩'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볼보는 한 발 더 나갔다.
EX60는 배터리 팩 자체를 차체 구조의 일부로 통합했다. 바닥을 구성하는 구조재에 셀을 직접 접착하는 방식이다. 볼보에 따르면 "대형 각형 셀의 단자를 아래로 향하게 배치하고, 셀과 벽면 사이에 특수 접착제를 적용한 뒤 완전히 밀봉하는 구조"라고 한다. 들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이게 가능하려면 열 관리, 충돌 안전성, 서비스 용이성까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계산해야 한다.
결과는 인상적이다. EX90은 111kWh 배터리로 약 500km를 달린다. 반면 EX60는 차체가 약 25cm 짧고 휠베이스도 작지만, 117kWh를 탑재하고 최대 644km를 주행한다. 배터리는 더 크고 차는 더 작은데 공간은 충분하다. 볼보 측은 에너지 밀도 20% 향상, 중량 감소, 충전 속도 31% 개선, 탄소 배출 37% 감소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행사장에서 가장 많이 들은 표현 중 하나가 "주행거리 불안의 종말(An end to range anxiety)"이었다.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숫자를 보면 이해가 된다.
WLTP 기준으로는 최대 800km를 넘는 주행거리를 확보한 EX60이지만, 국내 주행가능거리와 비슷한 EPA 기준으로 주행거리를 확인해봤다. 최상위 트림 P12 AWD는 112kWh 배터리로 400마일, 즉 약 644km를 달린다. 중급 트림 P10 AWD는 91kWh로 320마일(약 515km), 후륜구동 P6는 80kWh로 310마일(약 499km)이다. 어떤 트림을 선택하든 500km는 거뜬하다는 얘기다.
충전은 더 인상적이다. 최대 370kW 급속 충전을 지원해서 10%에서 80%까지 채우는 데 18~19분이면 충분하다. 화장실 다녀오고 커피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끝난다. 10분만 충전해도 P12 AWD 기준 280km를 달릴 수 있다. 완속 충전도 19.2kW까지 지원한다. 미국시장을 겨냥해 테슬라 방식 NACS 포트를 기본 탑재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어댑터 없이 테슬라 슈퍼차저를 바로 쓸 수 있다. 양방향 충전 기능까지 있어서 집에 전력을 공급하거나 다른 전기차를 충전할 수도 있다.
볼보 하면 성능보다는 안전과 편안함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EX60의 파워트레인은 제법 강력하다. 최상위 P12 AWD는 듀얼 모터로 670마력, 79.5kg.m의 토크를 낸다. 제로백 3.8초다. 이건 스포츠카 영역이다. 중급 P10 AWD도 503마력, 71.5kg.m으로 제로백 4.5초를 기록한다.
흥미로운 건 볼보가 자체 개발한 전기 모터를 쓴다는 점이다. 프론트와 리어 모두 볼보가 직접 설계했다. 최고속도는 모든 트림이 180km로 제한돼 있는데, 이건 안전을 중시하는 볼보의 철학이 반영된 부분이다.
볼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 가지 아쉬워하던 게 있었다. 실내 디자인이 너무 오랫동안 비슷했다는 점이다. 2015년 XC90 이후 거의 10년 가까이 세로형 터치스크린과 비슷한 레이아웃을 유지해 왔다. 변화는 있었지만 진화라기보단 개선에 가까웠다.
EX60는 다르다. 처음부터 다시 그렸다. 가로 방향 대형 터치스크린이 중앙을 차지하고, 운전석 앞에는 넓은 디지털 계기판이 떠 있다. 센터 콘솔은 직립형으로 올라오고, 물리 버튼은 최소화됐다. 볼륨 조절용 작은 크리스털 휠만 남았다. 스티어링 휠에 있는 조이스틱 형태의 버튼을 통해 각각의 기능을 더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북유럽 특유의 절제미는 여전하다.
파노라믹 루프, 밝은 색 내장재, 볼보 특유의 편안한 시트까지 더해지면 상당히 쾌적한 공간이 될 것 같다. 실제로 앉아보진 못했지만, 전시된 차량을 들여다본 느낌으로는 공간감도 좋았다.
구글 제미나이 AI 어시스턴트도 탑재됐다. "경로상에서 맛있는 레스토랑 근처 충전소 찾아줘"라거나 "오늘 묵을 호텔 주소를 이메일에서 찾아서 내비에 입력해줘" 같은 복잡한 명령도 처리 가능하다고 한다. 볼보는 이 시스템을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 OS를 쓰는 모든 차량에 적용할 계획이다. 다만, 국내 출시 시점에 국내 소비자들이 제미나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무리 성능과 주행거리를 강조해도 볼보의 본질은 안전이다. EX60는 여기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멀티-어댑티브 안전벨트'다.
작동 방식은 차량 내외부 센서와 AI가 탑승자의 체격, 충돌 강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덩치가 큰 사람이 강한 충돌을 겪으면 벨트 장력을 높여 머리 부상 위험을 줄인다. 반대로 작은 체격의 사람이 약한 충돌을 겪으면 장력을 낮춰 갈비뼈 골절을 방지한다. 같은 충돌이라도 사람마다 최적의 보호 방식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대응하는 기술이다.
행사장에서는 충돌 테스트 영상도 공개됐다. 시속 60km로 주행하던 EX60가 도로를 벗어나 기둥에 정면 충돌하는 시나리오다. 실제 사고에서 나무나 전신주를 들이받는 상황을 재현한 것이다. 충돌 직전 멀티-어댑티브 벨트가 탑승자를 좌석에 단단히 고정했고, 충돌 후에도 A필러는 변형이 없었다. 앞유리도 깨지지 않았다. 문도 정상적으로 열렸다.
볼보 안전 담당 로타 야콥손은 "EX60의 차체는 충돌 에너지를 흡수하고, 안전 캐빈은 최대한 온전하게 유지하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전기차는 무거운 배터리가 하부에 있어서 충돌 시 안전성이 더 중요한데, 셀-투-바디 구조에서도 이런 수준의 보호 성능을 구현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EX60 공개와 함께 깜짝 등장한 건 크로스 컨트리 버전이었다. 1997년 V70 XC로 시작된 볼보의 러기드 왜건 전통을 전기차 시대에도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물론 현재의 스타일은 SUV에 더 가깝다.
외관상으론 20mm 높아진 차고, 검은색 클래딩, 넓어진 휠 아치, 전후방 스테인리스 스킨 스키드 플레이트가 눈에 띈다. 전용 휠과 프로스트 그린 컬러도 제공된다. 하지만 진짜 차별점은 에어 서스펜션이다.
기본 20mm 높은 상태에서 버튼 하나로 추가 20mm를 더 올릴 수 있다. 험로 주행 시엔 차고를 높이고, 고속도로에선 낮춰서 효율을 높이는 식이다. 테슬라 모델 Y 같은 경쟁 모델들은 이런 조절식 에어 서스펜션을 제공하지 않는다. 상위 모델인 테슬라 모델 X에나 있는 사양이다.
크로스 컨트리는 듀얼 모터 사륜구동만 제공된다. P10 AWD는 91kWh 배터리로 483km 이상 주행 가능하고, 503마력에 제로백 4.5초다. P12 AWD도 출시 예정인데, 112kWh 배터리로 주행거리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실용성과 오프로드 성능을 모두 잡으려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것 같다. 다만 가격이 일반 EX60보다 높을 테니, 그만큼의 가치를 느끼는지가 관건이다.
볼보는 중급 트림 P10 AWD를 '약 6만 달러(약 8,640만 원) 선'에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21스피커 사운드 시스템과 파일럿 어시스트(볼보의 운전 보조 시스템)가 포함된 플러스 트림 기준이다.
이 가격대면 올해 출시 예정인 BMW iX3, 메르세데스-벤츠 GLC EQ 테크놀로지와 정면 승부다. 세 차 모두 AI 어시스턴트, 400마일 전후 주행거리, 새로운 소프트웨어, 강력한 성능을 내세운다. 전기차 시장이 본격적인 2세대 경쟁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다.
판매는 EX60가 올 여름 2027년형으로 먼저 시작되고, 크로스 컨트리는 내년 여름 2028년형으로 뒤따른다. 스웨덴 공장에서 생산되며, 유럽 일부 국가에선 이미 사전 예약을 받고 있다.
행사를 마치고 아티펠라그를 나서는데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발트해의 겨울은 춥지만 아름답다. 그 풍경 속에서 본 EX60는 볼보의 현재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왔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분명해 보였다.
EX90과 EX30의 초기 문제로 신뢰를 잃었던 볼보가 이번엔 정말 확실하게 준비한 느낌이다. WLTP기준 최대 803km 주행거리, 370kW 급속 충전, 셀-투-바디 배터리, AI 어시스턴트, 멀티-어댑티브 안전벨트. 기술적으론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은 기술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안정성, 충전 인프라 경험, 브랜드 신뢰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볼보가 이번엔 그 모든 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실제 차량이 고객 손에 들어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볼보가 더 이상 '안전하고 편안하기만 한 차'를 만드는 브랜드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 EX60는 그 변화의 신호탄이다. 과연 시장이 이 변화를 받아들일지, 올 여름이 기다려진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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