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설에는 ‘도소주(屠蘇酒)’라는 술이 있었다. 도소주는 계절과 절기에 맞춰 빚어 마시던 세시주(歲時酒)로, 새해 첫 술을 나누며 한 해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대가 바뀌며 도소주라는 이름은 낯설어졌지만, 명절에 술이 맡는 역할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서 술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열고, 명절 상차림에 이야깃거리를 더하는 매개가 된다.
이번 설 연휴를 맞아, 각 지역의 자연과 생활문화가 담긴 전통주를 통해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지역별 전통주 지도’를 짚어본다. 술 한 잔에 담긴 지역의 얼굴은, 명절 상차림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서울미래유산으로 남은 118년의 일상 술, 장수 생막걸리
이번 설 연휴 귀향·귀성객 수요는 최대 3,218만 명으로 예상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전국 각지로 이동하는 인구가 집중되는 만큼, 명절 술 역시 ‘서울을 대표하는 전통주’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서울장수 ‘장수 생막걸리’ (사진 제공=서울장수)
그 중심에 있는 술이 서울장수의 장수 생막걸리다. 장수 생막걸리는 1909년 서울 무교동에서 시작된 양조 역사를 바탕으로, 서울 곳곳의 탁주 양조 전통이 모여 형성된 공동 브랜드다. 현재는 서울 내 5개 연합제조장과 서울탁주제조협회 산하 서울장수주식회사가 생산을 맡으며, 서울과 수도권을 대표하는 생활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역사성과 지역성은 2016년 서울시로부터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며 공인됐다. 특정 지역 특산주라기보다 도시 문화와 시민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전통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시가 미래 세대에 전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역사·문화 자산에 부여하는 상징적 지정으로, 시민의 기억과 애정이 축적된 일상의 유산을 뜻한다.
장수 생막걸리는 효모가 살아 있는 생막걸리 본연의 신선함에 집중한다. 재고를 쌓기보다 매일 이른 새벽 술을 빚어 당일 전량 병입·출고하는 방식을 고수해, 소비자는 갓 빚은 술의 청량한 질감과 맛을 가장 가까운 상태로 즐길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전·구이류 등 기름진 명절 음식과도 무난한 조화를 이룬다. 일상의 익숙함을 담은 서울의 술이라는 점에서, 설 명절 술로도 부담이 적다.
강원도의 땅을 빚은 감자술, 서주
강원도는 감자를 중심으로 한 토속 식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를 술로 풀어낸 전통주가 바로 감자술 ‘서주’다. 서주는 강원도산 감자를 주원료로 빚은 증류식 소주 또는 약주로, 지역 농산물의 개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색 전통주다.
평창 ‘서주 감자술’ (사진제공=오대서주양조)
감자 특유의 담백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술에 고스란히 담겨, 알코올 도수에 비해 목 넘김이 순하고 깔끔하다. 향이 과하지 않아 전·나물·구이류 등 담백한 명절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대표적인 감자술 양조장으로는 오대서주양조장의 ‘평창 서주 감자술’이 있다. 감자 약 70%와 백미 약 30%를 누룩, 정제수와 함께 사용해 빚은 약주로, 청와대 만찬주와 명절 선물로 선정되며 품질과 상징성을 함께 인정받았다. 지역 농산물이 명절 상차림의 화제가 되는 사례다.
조선시대 3대 명주, 전주이강주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강주는 조선시대 3대 명주 중 하나로 꼽히는 대표적인 전통 증류주다. 이름은 주원료인 배(梨)와 생강(薑)에서 유래했다.
‘전주이강주’ (사진제공=전주이강주)
누룩과 증류주를 기반으로 배, 생강, 강황, 계피, 꿀 등을 함께 숙성해 풍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잔치와 손님 접대, 명절 제사상에도 올려지던 술로, 기름진 명절 음식과도 조화가 좋다. 독특한 향이 있으면서도 뒤끝이 깨끗해, 고급 명주로 평가받아 왔다.
달콤한 여운이 남는 충청도의 술, 한산소곡주
한산소곡주는 지역 전통주 가운데서도 인지도가 높다. 2015년 한·중·일 정상회의 공식 만찬주로 사용되며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넓혔다.
‘한산소곡주’ (사진제공=한산소곡주 식품명인)
충청남도 한산은 예부터 가마째 술을 담글 정도로 가양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2024년 기준으로도 약 70여 개의 양조장이 운영되고 있다. 소곡주는 찹쌀과 누룩, 물을 발효한 뒤 찹쌀밥을 다시 넣어 약 100일간 장기 발효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도수는 18도 내외로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은은한 단맛 덕분에 술이 술술 들어간다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메주콩, 국화, 생강 등 부재료를 더해 양조장마다 개성을 살린 것도 특징이다.
증류식 소주의 현재, 안동소주
경상북도 안동은 우리나라 증류식 소주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한 지역이다. 안동소주는 조선시대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온 술로,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소줏고리로 증류해 만든다.
‘명인안동소주’ (사진제공=명인안동소주)
불필요한 단맛이나 향 없이 담백하고 단정한 풍미가 특징이며, 기름진 명절 음식은 물론 간이 센 전·찜류와도 잘 어울린다. 도수는 20도 후반부터 40도 이상까지 다양해 자리와 취향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다.
현재 안동 지역에서는 명인과 가양주, 현대 양조장이 공존하며 다양한 안동소주를 생산하고 있다. 그중 명인안동소주는 3대째 가업을 잇는 100년 기업으로, 500년 가문의 전통과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국내외 시장에서 품질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좁쌀로 빚은 제주 한 잔, 고소리술
제주도의 전통 증류식 소주 고소리술은 쌀이 아닌 좁쌀을 주원료로 한다. 화산재 토양으로 벼농사가 어려웠던 제주의 자연환경 속에서 조·보리·메밀 등 잡곡 문화가 발달한 결과다.
‘고소리술’ (사진제공=제주샘주)
좁쌀과 누룩, 지하 암반수를 발효한 뒤 전통 증류기인 ‘고소리’에서 떨어지는 술방울을 모아 만든다. 도수는 약 40도로 높은 편이지만, 깔끔한 목 넘김과 은은한 향이 특징이다. 제주 전통 음식과도 잘 어울리며, 청정한 자연을 닮은 투명한 풍미를 지녔다.
고소리술을 생산하는 제주샘 영농조합법인은 고소리술과 오메기술 등 제주 전통주를 보다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하며, 지역 술 문화의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다.
설 명절 상차림 위에 오르는 술 한 병은 단순한 주류가 아니라, 그 지역의 자연과 역사, 삶의 방식을 함께 전한다.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지역별 전통주 지도는, 설날의 대화를 조금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이준문 기자/jun@newsta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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