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엔의 등장을 처음 목도했을 때, 대중의 시선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2002년, 스포츠카의 자존심 포르쉐가 SUV를 내놓는다는 소식에 포르쉐의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포르쉐의 정체성을 훼손한다’거나 ‘브랜드를 망치는 악수’라는 비난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카이엔은 출시 첫해부터 911의 판매량을 압도하며 포르쉐를 재정적 늪에서 건져 올린 구세주가 됐다. 그 성공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타이칸도, 마칸 일렉트릭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기술적 성취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시감이 드는 풍경이 다시 펼쳐진다. 카이엔 일렉트릭의 공개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앞서 등장한 타이칸은 충전 인프라와 실용성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겼고, 마칸 일렉트릭은 전작보다 늘어난 무게로 인해 반응이 둔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포르쉐 최초의 완전 전동화 카이엔이 앞선 선례들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던 이유다. 지난 4월,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진행된 ‘카이엔 일렉트릭 미디어 테크놀로지 워크숍’은 이러한 의구심을 덜어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워크샵 현장에서 포르쉐 AG의 카이엔 에너지 시스템 디렉터 마르코 슈메르벡은 "타이칸이나 마칸의 배터리 솔루션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했고, 적합한 공급사도 찾을 수 없었다"며 "결국 직접 만드는 길을 택했다"고 밝혔다.
카이엔 일렉트릭에 탑재된 113kWh 고전압 배터리는 포르쉐가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 개발하고 생산까지 책임지고 있다. 카이엔 조립 공장 인근에 배터리 전용 공장을 새롭게 구축해 생산 효율을 높였다. 구조도 기존의 틀을 깼다. 6개 모듈과 192개의 파우치 셀로 구성된 이 배터리는, 셀을 모듈에 담아 트레이에 쌓는 일반적인 공정 대신 알루미늄 압출 프로파일에 셀을 직접 삽입하는 ‘기능 통합형’ 설계를 적용했다. 배터리 팩이 에너지를 저장하는 장치에 그치지 않고 차체 강성과 충돌 안전 구조의 핵심 부품으로 기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덕분에 무게중심은 내연기관 모델 대비 83mm나 낮아졌다.
셀 소재에도 집요한 공학적 접근이 담겼다. 음극에는 흑연에 6%의 실리콘을 배합해 에너지 밀도와 급속 충전 효율을 끌어올렸고, 양극에는 니켈 함량 86%의 NMCA 소재를 채택해 에너지 밀도와 수명을 한꺼번에 잡았다. 냉각 방식의 진화도 눈길을 끈다. 하단 단면 냉각에 의존했던 타이칸이나 마칸과 달리, 각 모듈에 두 개의 냉각판을 배치한 양면 냉각 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 냉각 용량만 따지면 가정용 대형 냉장고 약 100대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파우치 셀 양쪽에서 열을 동시에 제어하기에 극한의 고출력 주행이나 급속 충전 시에도 배터리 온도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한다.
800V 아키텍처는 이미 타이칸을 통해 익숙해진 기술이지만, 카이엔 일렉트릭은 그 경계를 한 단계 확장했다. 최대 400kW DC 급속 충전을 지원하며, 배터리 잔량 10%에서 80%까지 채우는 데 16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10분만 충전해도 WLTP 기준 최대 325km를 달릴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한다. 충전 곡선이 초반에만 반짝하고 꺾이는 것이 아니라, SOC 50%까지 400kW를 유지하고 70% 시점에서도 300kW 수준을 지켜내는 뚝심을 갖췄다.
400V 충전 인프라에 대응하는 방식도 영리하다. ‘배터리 분할 병렬 충전’ 기술을 통해 배터리를 두 개의 독립 팩으로 분리 인식함으로써 400V 충전기에서도 높은 효율을 끌어낸다. AC 충전은 최대 22kW, 무선 인덕티브 충전은 11kW를 지원한다. 1회 충전 시 주행 거리는 베이스 모델 기준 최대 642km, 터보 모델은 623km(WLTP 기준)에 이른다.
모든 트림은 전후 축에 PSM 모터를 배치한 사륜구동 방식으로만 운영된다. 베이스 모델조차 일반 주행 시 402마력, 론치 컨트롤 사용 시 436마력의 출력을 쏟아낸다. 무게 배분은 포르쉐의 전통적인 황금비율인 48:52를 고수하고 있다.
최상위 터보 모델의 제원은 가히 압도적이다. 상시 857마력을 내뿜으며, 스티어링 휠의 ‘푸시 투 패스’ 버튼을 누르면 10초 동안 176마력의 출력이 추가로 더해진다. 론치 컨트롤 상황에서 발휘되는 시스템 최고출력은 1,156마력, 최대토크는 153.0kgf·m에 달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단 2.5초. 포르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성능을 가진 양산차이다.
터보 모델의 후륜 모터에는 직접 오일 냉각 기술이 최초로 적용됐다. 포뮬러 E 머신에 적용되었던 이 기술은 전용 냉각 오일을 모터 구리 권선 사이로 순환시켜, 반복되는 풀 가속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는 성능을 보장한다. 실리콘 카바이드 인버터는 스위칭 손실을 줄이고 출력 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타이칸에서 지적받았던 성능 저하 현상을 정면 돌파로 해결한 모양새다. 회생제동 성능도 강력하다. 최대 600kW의 회생제동 파워를 확보해 일상적인 제동의 약 97%를 전기적으로 처리한다. 물리적인 브레이크는 극적인 감속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트랙 주행에 앞서 시선을 붙잡은 기술은 SUV 세그먼트 최초로 적용된 ‘포르쉐 액티브 라이드(PAR)’ 시스템이다. 파나메라와 타이칸에서 검증된 기술을 카이엔의 특성에 맞춰 재설계했는데, 카이엔 특유의 긴 서스펜션 스트로크와 결합해 더욱 적극적인 제어가 가능해졌다.
네 개의 액티브 댐퍼는 각 액슬의 모터-펌프 유닛과 연결되어 안티롤 바의 역할까지 대신한다. 고전압 배터리에서 전력을 직접 공급받아 밀리초 단위로 필요한 힘을 생성해낸다. 시스템은 1밀리초마다 상황을 재연산하고, 인지 후 35밀리초 이내에 실제 개입을 완료한다. 차체가 기울어지려고 마음먹기도 전에 자세를 바로잡는 식이다. 여기에 새롭게 추가된 컴포트 모드는 ‘코너링 컴포트’와 ‘피치 컴포트’를 기본으로 제공한다. 코너를 돌 때 차체가 안쪽으로 기우는 액티브 틸트 기능과 급가속 시 앞부분이 살짝 들리는 부양감은 헬리콥터 이륙 시의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경험한 주행감은 강렬함 그 자체였다. 베이스 모델부터 전해지는 조향 응답은 매우 직접적이다. 2.6톤에 육박하는 무게가 무색할 만큼 섀시와 구동계, 차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인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로 올라갈수록 에어 서스펜션은 지면과 밀착하고 스티어링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생동감을 더한다.
스포츠 모드에서의 변화는 먼저 발끝에서 느껴진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회생제동의 저항감은 스포츠 플러스에서 그 농도가 더욱 짙어진다. 포르쉐가 원페달 드라이빙을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감속의 주도권만큼은 운전자의 손에 남겨두겠다는 철학을 지키기 위함이다. 터보 모델의 가속은 폭발적인 수준을 넘어 정교하게 조율된 토크의 흐름을 보여준다. 압도적인 힘 속에서도 여유가 느껴지기에 운전자는 오히려 평온함을 느낀다. 액티브 라이드가 장착된 터보 모델로 요철을 지날 때, 차체의 흔들림이 즉각적으로 억제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극한의 코너링에서도 차체는 수평을 잃지 않는다. 서스펜션이 끊임없이 무게를 상쇄하고 있기 때문에 운전자는 물리적인 중량을 잊고 코너를 공략하게 된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2.6톤의 전기 SUV로 타이트한 코너에서 파워 오버스티어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 시장 전용으로 기본 탑재된 최대 5도의 리어 액슬 스티어링은 최소 회전 반경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 고속 안정성과 민첩한 진입을 가능케 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된다.
인테리어의 중심은 곡선형 OLED ‘플로우 디스플레이’다. 포르쉐 라인업 중 가장 넓은 디지털 영역을 자랑하지만, 인테리어 디자인 속에 깊이 스며들어 이질감이 없다. 5가지 컬러 테마를 선택하면 대시보드와 동승석 디스플레이까지 일관된 분위기로 전환되며 디지털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 요소로 기능한다.
완전한 디지털화 속에서도 공조 장치와 시트 관련 조작계는 햅틱 반응을 지원하는 물리 버튼으로 남겨두었다. 팔걸이에는 손바닥을 지지할 수 있는 구조물을 두어 격렬한 주행 중에도 오조작을 방지한다. 복잡한 메뉴를 헤매지 않고도 직관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사용자 경험은 포르쉐의 숙련도를 대변한다. 실내 서피스 히팅 시스템은 도어 안쪽과 센터 콘솔까지 온기를 전달하며, 한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통풍 시트와 리어 액슬 스티어링을 기본 사양으로 포함해 상품성을 높였다.
길어진 휠베이스 덕분에 뒷좌석 거주성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2열 시트를 접으면 최대 1,588리터의 공간이 확보되며, 카이엔 역사상 처음으로 마련된 90리터의 프렁크가 실용성을 더한다. 견인 중량 역시 내연기관과 동일한 3.5톤을 유지해 SUV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 공기역학적 배려도 치밀하다. 폐쇄형 하부와 액티브 쿨링 플랩 등을 통해 베이스 모델 기준 0.25라는 항력계수를 달성했다.
2002년, 세상은 포르쉐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 판단을 비웃듯 성공 신화를 썼다. 이제 시선은 카이엔 일렉트릭으로 향한다. 타이칸과 마칸 일렉트릭이 마주했던 과제들을 포르쉐는 기술적 집념으로 풀어냈다. 트랙 위에서 확인한 카이엔 일렉트릭의 움직임은 포르쉐가 이번에도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할 준비를 마쳤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포르쉐는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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