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자동차 제조사들의 요구에 밀려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완화할 경우, 유럽 내 배터리 산업 기반이 붕괴 수준의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유럽 교통환경연맹(T&E)이 발표한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규제 약화는 2030년까지 노스볼트 규모의 배터리 기가팩토리 34개가 사라지는 것과 맞먹는 산업적 기회비용을 초래할 것으로 분석됐다.
T&E는 현행 규제 유지, EU 집행위원회의 완화 제안, 자동차 업계의 요구안 등 세 가지 시나리오를 모델링했다. 보고서는 만약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의 요구대로 2030년 목표치를 5년 평균치로 완화할 경우, 2030년 유럽 내 전기차(BEV) 생산량은 현재 전망치의 절반 수준인 370만 대로 급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규제 완화의 칼날은 유럽이 공들여 온 배터리 가치 사슬을 직접 겨누고 있다. 보고서는 전기차 목표가 하향 조정되면 2030년 유럽 내 잠재적 배터리 생산 능력이 3분의 2 이상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34개의 대형 배터리 공장과 약 4만 7,000개의 숙련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특히 배터리의 핵심 부품인 양극재 산업의 타격이 막대할 것으로 보인다. 현행 규제가 유지될 경우 유럽은 2030년까지 양극재 수요의 3분의 2 이상을 현지 생산으로 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업계 요구대로 규제가 약화되면 단 5개의 양극재 프로젝트만이 생존해 예상 수요의 10% 남짓만을 공급하게 될 전망이다.
경제적 손실은 산업 기반 붕괴에 그치지 않는다. 전기차 보급 속도가 늦춰지면 유럽은 2026년부터 2035년까지 석유 수입을 위해 약 500억 유로(약 75조 원)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 이는 현행법 유지 시 절감할 수 있는 20억 배럴 이상의 석유 소비 편익을 포기하는 셈이다. 반면 강력한 전기차 시장이 형성되면 유럽의 배터리 수입 의존도는 국내 생산과 재활용 확대를 통해 7%까지 낮아질 수 있다.
줄리아 폴리스카노바 T&E 수석 이사는 "중국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전기차는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성장 엔진"이라며 "유럽이 기후 목표를 약화시키면 중국에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게 되고, 전략적 망설임 끝에 신생 배터리 산업 자체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EU 내에서 벌어지는 규제 완화 논의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당장의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속도 조절을 외치고 있지만, 이는 스스로의 미래 먹거리인 배터리 주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전기차는 이제 단순한 친환경차를 넘어 국가 간의 산업 전쟁이다. 중국이 압도적인 속도로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이 뒷걸음질 친다면, 유럽 자동차 산업은 영원히 에너지와 기술 모두를 외부에 의존하는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유럽연합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T&E가 지적한 34개의 노스볼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유럽 제조업의 자존심과 직결된 지표다. 500억 유로라는 막대한 석유 수입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과거의 엔진 시대를 연장하려는 시도는 결국 유럽 경제에 독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정책적 일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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