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에 가상 기어 변속이라니, 차라리 오락실 게임기를 타라."
불과 얼마 전까지 자동차 마니아들과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전기차의 가상 변속 기능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러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엔진도, 다단 변속기도 없는 전기차에 인위적으로 RPM 바늘을 만들고 변속 충격을 구현하는 것은 그저 소비자들을 현혹하기 위한 ‘얄팍한 눈속임(Gimmick)’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모터의 매끄럽고 즉각적인 토크 출력을 놔두고, 왜 굳이 효율을 깎아 먹으며 과거의 유물을 흉내 내느냐는 비판이 지배적였다.
가장 완벽한 엔지니어링을 추구한다는 포르쉐 역시 이 기술에 가장 냉소적인 브랜드 중 하나였다. 실제로 불과 2024년, 포르쉐의 수석 개발 드라이버인 라스 케른(Lars Kern)은 인터뷰를 통해 가상 변속 기술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전기 모터는 내연기관보다 뛰어난데, 왜 굳이 과거의 비효율을 시뮬레이션해 차를 더 안 좋게 만들어야 하는가?"라며, "우리는 여전히 훌륭한 내연기관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전기차에서 굳이 가짜 내연기관을 흉내 낼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전기차는 전기차다워야 하며, 가짜 기술로 순수성을 흐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고성능 자동차의 자존심이자, 기계적 순수성의 상징과도 같은 포르쉐의 태도가 180도 뒤집혔다. "과거의 유물을 흉내 내지 않겠다"던 포르쉐가 현대차의 아이오닉 5 N을 벤치마킹하여, 오는 2027년형 타이칸(Taycan) 페이스리프트 모델에 '가상 변속 시스템'을 탑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경험해 보지도 않고 겉모습만으로 가치의 유무를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신 낯선 비주얼의 청국장이나 냄새가 고약한 홍어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한 입 먹어본 뒤 그 깊은 맛에 매료되어 매니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포르쉐에게 가상 변속기가 딱 그랬다.
포르쉐 GT 부서 엔지니어들은 타협 없는 기술력과 완벽한 기계적 피드백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그런 이들이 현대의 'N e-shift'를 직접 트랙에서 한계까지 몰아붙여 본 뒤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기술이 소리와 진동을 대충 흉내 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대차 N 부서가 조율한 가상 변속은 우리의 뇌를 완벽하게 속인다. 패들 시프트를 당기는 순간 모터의 토크를 미세하게 제어해 고성능 내연기관 차가 변속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툭 치는 충격(Shift Shock)을 재현한다. 코너 진입 전 다운시프트를 하면 엔진브레이크가 걸리며 차체 하중이 앞으로 쏠리는 물리적 움직임까지 고스란히 구현해 냈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신체가 느끼는 중력가속도(G-Force)가 완벽하게 삼박자를 이루자, 보수적인 포르쉐 엔지니어들조차 "장난감이 아니라 운전의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훌륭한 도구"라며 백기 투항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포르쉐가 이 '가짜 변속기'를 개발하기 위해 자사 최고의 자랑거리인 듀얼 클러치 변속기, 즉 'PDK(Porsche Doppelkupplung)' 개발팀 엔지니어들을 대거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소프트웨어로 가상의 변속을 구현하는 일이지만, 그 변속의 질감과 로직만큼은 실제 포르쉐 스포츠카의 DNA를 그대로 이식하겠다는 의지다. 기계공학의 정점에 서 있던 변속기 엔지니어들이 이제는 전기차의 재미를 위해 코드를 짜고 있는 셈이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면 가상 변속 모드를 켰을 때 순간적인 동력 차단(Pause)이 발생하므로 동력 손실이 생기고 0-100km/h 가속 시간은 미세하게 느려진다. 기술적으로는 차를 '더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쉐가, 그리고 혼다 같은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이 기술을 도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성능의 기준은 '상향 평준화'되었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슈퍼카가 아니더라도, 웬만한 패밀리형 EV조차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3초대에 주파하는 시대다. 출력과 가속력이라는 '숫자'만으로는 더 이상 운전자를 매료시키거나 브랜드의 차별성을 증명하기 어려워졌다.
상투적인 마케팅 문구처럼 들리지만, 이제 자동차는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하는 '이동 수단'이 아니다. 특히 스포츠카나 '고성능' 영역으로 갈수록 운전자가 차와 교감하며 느끼는 희열, 즉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핵심이 된다. 가상 변속기는 전기차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운전의 역동성과 리듬감, 그리고 예측 가능성'을 되찾아주는 열쇠다. 엔진 소리의 고저와 변속 충격을 통해 운전자는 계기판을 보지 않고도 차의 속도와 상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코너를 공략할 수 있다.
전기차의 가상 변속 기술을 과거 내연기관에 대한 미련이나 얄팍한 향수로만 치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는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감성을 어디까지 완벽하게 재창조해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EV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결코 하지 않겠다"던 포르쉐마저 현대차의 기술력에 눈을 뜨고 자신들의 말을 뒤집었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는 청국장의 깊은 맛처럼 (여전히 못드시는 분들에겐 죄송하다), 이 가짜 변속기가 주는 진짜 운전 재미는 결국 시장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 편견을 내려놓는 순간, 전기차는 비로소 '제품'이 아닌, 우리가 사랑했던 '달리는 즐거움'의 완전한 진화체로 다가올 것이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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