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달랑 찍고 스쳐가기 쉬운 섬, 암태도에 꼭 소개하고픈 두 개의 스폿이 있다.
천사대교가 열어 준 길
천사대교가 개통된 뒤 암태도는 차량을 동반한 섬여행의 관문이 되었다. 북쪽의 자은도뿐 아니라 남쪽의 팔금도와 안좌도, 반월·박지도로 향하는 길목에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섬이기 때문이다.
천사대교를 반쯤 지났을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껴 가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실 섬여행을 떠나기 전 날씨를 살피던 버릇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때는 게을러진 것은 아닌가 싶어 그 루틴을 되찾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다. 중요한 건 믿음이라는 것을(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악천후쯤은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의 경험과 노련함이 내게 생겼다는 믿음 말이다.
12년 전, 추포도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내려 북항으로 이동한 뒤, 다시 팔금도 고산항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추포도로의 동선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압해도 송공항에서 암태도 오도항까지 오가는 여객선도 있었지만,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섬에 몇 대 없던 택시까지 불러 탔던 기나긴 여정. 그렇게 어렵게 만난 귀한 섬이었기에 더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추포도는 암태도와 연결된 작은 섬이다. 300년 전, 섬사람들은 물 빠진 갯벌 위에 노두를 놓았다. 두 섬을 왕래하기 위한 피땀의 길이는 2.5km, 우리나라 최장이다. 훗날, 노두 위에 콘트리트를 덮어 차량이 오갈 수 있는 도로를 만들었지만, 밀물 때는 여전히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2021년, 마침내 숙원이 이루어졌다. 신안의 13번째 다리인 추포대교가 완공된 것이다.
추포도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추포도는 정말 매력적인 섬이다. 드넓은 갯벌에 오붓한 섬마을 그리고 암태면의 단 하나뿐인 해수욕장도 품고 있다. 그중 추포해수욕장은 섬과 섬 사이에 숨겨져 있던 덕분에 천혜의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청정 스폿이다. 특히 600m에 달하는 해변은 초승달처럼 만입된 데다 서쪽으로 열려 있어 해 질 무렵이면 낙조가 투영되는 황금빛 풍경을 연출한다.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는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사색과 쉼을 얻기에 더할 나위 없다. 현재 추포해변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간이 야영장이 마련돼 있다. 일정한 비용만 내면 사이트 배정은 물론 화장실과 개수대 등 시설까지 제공된다. 단, 규모상 오토캠핑보다는 미니멀한 캠핑이 어울린다.
내게 추포항은 쓸쓸함으로 기억되는 장소다. 아마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출항하는 고깃배와 떼를 지어 날아가는 철새의 어울림은 마치 세피아 톤 사진을 연상시켰다. 그런데 추포항의 모습이 달라졌다. 반듯한 선착장과 여객선 대합실이 생겨난 것이다. 마침 배 한 척이 근거리로 지나갔다. 십중팔구 암태 남강항을 떠나 비금도로 가는 여객선이다. 주민들 얘기를 들어 보니 향후 흑산도 쾌속선이 이곳에 기항할 예정이란다. 섬이 육로로 연결되니, 변화의 속도 역시 한층 빨라진다. 여행자의 시선에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지만, 섬 주민들에게는 삶의 질을 높여 줄 당연하고도 절실한 변화일 것이다. 문득 더 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이야기는 오직 지금만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합 문화 플랫폼 ‘남하부엌’
‘유휴 공간 재생 프로젝트’는 지방 소멸 위기에 대응하고자 방치된 폐교, 양곡창고 등 유휴 공간을 지역 문화 거점으로 탈바꿈시키는 재생 사업이다. 단순히 시설을 보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입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안군 암태도에도 이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있다. 바로 ‘남하부엌’이다. 한때는 섬의 풍요를 상징했으나 비워진 채 긴 시간 멈추어 서 있던 면사무소 부근의 낡은 양곡창고를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으로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그리고 장흥에서 같은 이름으로 역량을 인정받아 온 성일경·홍성순 부부가 새로운 공간을 맡았다. “장흥 남하마을에서 시작된 상호였지만, 신안 암태도로 옮겨오면서 이름의 결이 조금 더 명확해졌습니다. 한자 그대로 ‘남쪽 아래로 내려온 부엌’이라는 뜻이지요. 도시를 떠나 이제는 정말 남쪽 섬으로 내려온 저희 부부의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이름입니다.”
부부의 작업은 그야말로 ‘결’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됐다. 성일경 씨는 목수로서의 전문성을 발휘해 내부를 현대적인 미식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터로 재구성했다. 이는 장흥에서 가져온 그들만의 철학과 문화적 영감을 암태도의 토양에 이식하는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남하부엌은 신안군이 추진한 재생 사업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복합 문화 플랫폼’으로 안착했다. 지자체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부부는 그 안에 콘텐츠를 채워 넣음으로써 상생의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공간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세 가지 지향점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첫째는 목수와 장인의 정체성이 묻어나는 ‘공방적 요소’다. 매장 내부의 구조물이나 집기들은 모두 성 대표가 오랜 시간 손으로 다듬어온 것들이다. 별도의 목공, 가죽 공방을 운영함으로써 지역민들과 문화적으로도 소통하고 있다.
둘째는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예술적 배치가 돋보이는 ‘갤러리적 요소’다. 벽면마다 초대 작가들의 회화 작품들을 걸어 두고, 창문을 통해 섬의 계절감과 바깥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입체적인 풍경까지도 설계에 담았다.
셋째는 ‘컬렉터적 요소’다. 매장 구석에는 낡은 재봉틀, 오래된 아날로그 카메라, 빈티지 오디오 장비들과 성 대표의 철학이 묻어나는 서적들이 전시돼 있다. 여행자들은 부부의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씩 수집된 컬렉션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남하부엌’의 정체성과 취향을 이해하게 된다.
단순한 레스토랑을 넘어서
‘남하부엌’에서는 음식을 먹는 행위가 공간을 감상하는 예술적 경험과 분리되지 않는다. 내부를 돌아보는 동안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파스타의 향과 화덕 피자의 열기가 테이블 위로 부드럽게 안착한다.
이곳의 시그니처는 단연 하몽이다. 심지어는 훈연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을 매장 한쪽에 노출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설치 미술을 보는 듯한 이색적인 풍경까지 연출한다. 남하부엌의 하몽은 암태도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응축한 결과물이다. 3년 반의 인내로 빚어 낸 하몽의 단면은 선홍빛 근육과 하얀 지방이 층을 이뤄 눈부신 마블링을 그려 낸다.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농밀한 맛은 마치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처럼 긴 잔향을 남긴다.
성일경 대표는 남하부엌이 단순한 레스토랑의 기능을 넘어서길 소망한다. 신안 천일염을 활용한 하몽 연구 그리고 향후 자연과 공예, 음악이 어우러지는 복합문화 거점으로의 진화를 꿈꾼다. 여행에 대한 철학도 확고하다. 단순히 목적지를 소비하는 관광에서 벗어나, 체험과 머무름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손님들을 응대하는 그를 바라보며 맨체스터 못지않은 ‘암태도 카빙축제’와 그의 기발한 꿈을 두루 응원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다음 번 여행 때는 하몽 피자에 와인도 나누고, 벚나무 숟가락도 만들어 보기로.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곽서희 기자
*김민수 작가의 섬여행기는 대한민국 100개 섬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육지와 섬 사이에 그 어떤 다리보다 튼튼하고 자유로운 길을 놓아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