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셀 너머로만 바라보던 스위스가 마침내 현실이 됐다.
4K 해상도로도 다 담을 수 없는, 화면보다 더 선명해 경이롭던 스위스의 16개 지역을 모았다.
스위스를 ‘안다’는 착각
스위스는 이상하리만큼 익숙하다. 아니, 익숙하다고 착각한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사람조차 이미 랜선 여행으로 몇 번은 완주한 기분이 드는 곳이 스위스다. 눈 덮인 알프스, 그 아래를 달리는 빨간 열차, AI로 만든 것 같은 푸른 호수와 산비탈에 콕콕 박힌 동화 같은 집들. 여행 잡지 지면에서, 알고리즘이 끌어다 준 SNS 피드 속에서, 우리는 이미 스위스에 ‘심적 지분’을 꽤나 얹어 두지 않았던가. ‘스위스가 스위스겠지’, ‘인터넷에서 이미 다 봤어’ 하는 지레짐작과 함께. 그러나 모니터를 끄고 그 풍경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상상력의 한계는 단숨에 탄로 난다.
4K 해상도로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알프스의 압도적인 스케일, 눈이 시릴 만큼 깊은 호수의 색감,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와 목초지 냄새, 열차가 굽이를 돌 때마다 쏟아지는 파노라마까지. 모니터 속 스위스가 얌전한 정지 화면이었다면, 현실의 스위스는 오감을 거세게 흔드는 생생한 라이브 무대다.
그래서 준비했다. 스위스의 수많은 도시와 산, 호수와 마을 가운데 직접 마주했을 때 더 선명했던 16곳을 골라 지면에 꾹꾹 눌러 담았다. 눈 덮인 알프스와 빙하기가 빚어낸 호수, 관광청 직원이 아껴 둔 ‘최애’ 장소까지. 누군가에겐 오랜 꿈이었고, 누군가에겐 인생 여행지가 될 장면들이다. 수없이 바라봤던 모니터 너머의 스위스. 이제 그 답답한 화면 밖으로 나아가, ‘진짜 스위스’에 제대로 압도당해 볼 차례다.
■Zermatt
로망이 현실이 되는 곳, 체르마트
여행자가 스위스에 기대하는 모든 환상과 로망은 체르마트에서 200% 현실이 된다. 고개를 들면 어디서든 모습을 드러내는 마테호른만으로도 이 도시는 이미 제 몫을 다 한다. 픽셀 따위로는 도무지 재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입체감.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봉우리를 마주하는 순간, 스위스로 향했던 모든 망설임은 비로소 완전한 확신이 된다.
시작은 고르너그라트 산악열차로. 해발 3,100m의 정상 전망대에선 마테호른은 물론 몬테로사를 비롯한 29개의 4,000m급 봉우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정상을 둘러본 뒤에는 열차를 타고 한 정거장 아래인 로텐보덴에서 하차해 리펠베르크까지 걸어 내려오는 하이킹을 추천한다. 약 1시간, 3.1km 길이의 코스로 경사가 완만해 비교적 부담이 적다. 산악 하이킹 초보자인 필자도 한껏 여유 부리며 걸었을 정도로 난이도 최하의 코스다. 무엇보다 마테호른이 호수에 거울처럼 비치는 리펠제를 비롯해 작은 산악 호수들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
물론 체르마트 시내에만 머물러도 마테호른은 질리도록 눈에 담을 수 있다. 구글맵에 ‘Matterhorn Viewpoint’를 검색하면 아기자기한 지붕들 위로 뾰족하게 솟은 마테호른이 한 프레임에 쏙 들어오는 명당이 나타난다. 사진가들에겐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언덕을 오를 시간도, 체력도 부족하다면 답은 키르히 다리다. 마을 한복판에 자리해 설렁설렁 걸어가기만 해도 근사한 마테호른 인생숏을 챙길 수 있다. 만약 숙소를 다리 바로 앞, 호텔 쿠론 수페리어로 잡는 호사를 누렸다면? 남들 다 새벽바람 맞으며 다리 위로 모여들 때, 따뜻한 이불 속에서 창문만 열고 노랗게 타오르는 ‘황금호른’을 유유히 관람하는 특권을 얻게 된다.
■Blausee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송어 양식장, 블라우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으로 시작하는 수식어는 의심부터 하고 보는 편이다. 기자의 직업병이랄까. ‘가장’이란 단어에는 그만한 무게감이 실려야 한다고 믿는 주의다. 근데 이곳에서만큼은 ‘과연?’이 ‘과연…’이 됐다.
이름부터 투명하다. 블라우제는 독일어로 ‘파란 호수’란 뜻인데 그 이름 참, 지나치게 담백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함, 빛의 각도에 따라 청록색과 파란색으로 시시각각 바뀌는 물색. AI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자연의 시간만으로 빚어낸,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다. 빙하 녹은 물이 지하에서 샘솟아 만들어진 천연 호수는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고, 호수 바닥에는 오래전 수몰된 거목들이 시간을 멈춘 채 잠들어 있다.
더 비현실적인 건 그 태고의 정적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송어 떼다. 블라우제의 별명 중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송어 양식장’이다. 맑은 호수에서 유영하는 송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수식어조차 부족하게 느껴진다.
자연공원 안 ‘레스토랑 블라우제’에서는 이 맑은 물에서 자란 유기농 송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맛볼 수 있다. 그중 특히 바삭하게 튀겨낸 송어 튀김은 잡내 하나 없이 신선하다. 레몬즙 한 바퀴 뿌려 베어 물면 담백함이 입 안 가득 퍼지는데…, 호수에서 평화롭게 헤엄치던 송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질 만큼의 맛이다.
블라우제를 둘러본 뒤에는 칸데르슈텍을 거점으로 아델보덴의 엥슈틀리겐 폭포까지 함께 둘러보면 좋다. 호수와 폭포, 알프스 산골 풍경을 하루에 두루 만날 수 있는 알찬 코스다.
■Gruyères
900년의 풍미를 품은 치즈 마을
그뤼에르
스위스는 발길 닿는 곳마다 엽서다. 그런데 여행 중반쯤 되면 문득, 모든 풍경이 닮아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웅장한 만년설, 푸른 초원, 목에 종을 달고 풀 뜯는 소들. 그 무해하고 무결한 풍경의 도돌이표 속에서, 그뤼에르를 만났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치즈 마을인 그뤼에르의 역사는 놀라울 만큼 까마득하다. 무려 1115년, 12세기 초부터 치즈를 만든 기록이 전해질 정도다. 풍미의 비결은 전통에 있다. 알프스 산기슭에서 신선한 풀과 허브를 먹고 자란 소의 우유, 그리고 계절 따라 높은 목초지로 소를 이동시키는 알프스 특유의 방목 문화가 깊고도 진득한 맛을 빚어낸다. 마을 골목에 들어서면 고소한 퐁뒤와 라클레트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취향껏 다양한 치즈를 맛보고 구매할 수 있는 상점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뤼에르를 여행할 때 지도는 필요 없다. 마을 자체가 워낙 아담하고 오밀조밀해서 숨이 차기도 전에 끝에서 끝까지 전부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자갈길과 아기자기한 중세 건물들. 마을 끝 언덕 위에 자리한 800년 역사의 그뤼에르 성과 성벽 위에 올라 바라보는 붉은 지붕의 마을과 초원까지. 그림책 페이지를 아무 데나 펼쳐도 이보다 더 중세 동화 같은 풍경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Montreux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한 도시, 몽트뢰
‘그’의 선택을 믿어 보기로 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몽트뢰로 오라.’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에 남긴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던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도시라면 결코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몽트뢰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이러한 믿음은 확신이 됐다.
눈앞의 레만호는 호수라기보다 아늑한 바다처럼 보인다. 물결 위로 번지는 윤슬 너머, 만년설을 이고 선 알프스의 풍경은 퀸의 음악이 왜 이곳에서 완성됐는지를 말없이 증명하는 듯하다. 여정은 선명하고 단순하다.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이 서 있는 호숫가에서 출발해, 야자수와 다채로운 꽃길을 따라 설렁설렁 걷다 보면 어느덧 물 위에 차분히 떠 있는 요새, 시옹 성에 다다라 있다.
퀸의 팬이라면 몽트뢰 카지노 안에 자리한 ‘퀸 스튜디오 익스피리언스’도 놓치기 아깝다. 퀸이 수많은 명곡을 녹음했던 마운틴 스튜디오를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한 무료 전시 공간으로, 프레디 머큐리와 퀸의 활동을 보여 주는 마이크와 악기, 녹음 장비, 사진과 기록 등이 전시돼 있다.
■Lavaux
1%의 와인을 위하여 라보
생산량의 약 1%만 수출되고 대부분이 스위스 안에서 소비되는 스위스 와인. 그중에서도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애를 태우는 와인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라보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현지에서 비로소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여행자만의 특권 같은 한 잔.
레만호의 가파른 사면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식 포도밭은 '세 개의 태양'이라 불리는 특별한 자연환경을 품는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 호수가 반사하는 빛, 그리고 돌담이 머금었다 내어 주는 열기. 이 독특한 자연환경이 라보를 대표하는 화이트 품종인 샤슬라(Chasselas)를 길러낸다.
라보를 가장 아름답게 즐기고 싶다면 슈브레 마을의 도멘 보비(Domaine Bovy)를 추천한다. 이곳의 작은 테라스 ‘프티트 테라스(Petite Terrasse)’에 앉아 미네랄감이 돋보이는 샤슬라 한 잔을 머금는 순간, 시선은 자연스레 레만호와 호수 건너 프랑스의 에비앙으로 향한다. 이런 풍경 앞에선 나를 취하게 만드는 게 와인인지, 풍경인지 구분하는 일조차 의미 없어 보인다.
그뤼에르에서 벨 에포크 열차를 타고 몽트뢰를 거쳐 라보까지 이어지는 여정. 스위스의 치즈와 레만호, 그리고 와인을 가장 우아하게 즐길 수 있는 일일 코스다.
■Wengen
시간이 느려지는 마을, 벵엔
스위스에서는 자꾸만 지독한 부지런을 떨게 된다. 5분이라도 일찍 첫 차를 타야 하고, 융프라우든 피르스트든 하나라도 더 높은 전망대를 찍고 내려와야 본전을 뽑는 것 같은 기분. 지독한 ‘효율주의’의 여행이랄까. 그런데 해발 1,274m에 걸려 있는 마을, 벵엔에 발을 디디면 기묘하게도 생각의 퓨즈가 툭 끊어진다. ‘야,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절로 느슨해지는 동네다.
상주인구는 1,000명 남짓. 일반 자동차의 출입이 금지된 카 프리(Car-free) 마을이라 오직 산악열차를 타고서만 닿을 수 있다. 매연 대신 알프스의 풀 내음이 골목을 채우고, 19세기풍 목조 샬레들이 느긋한 풍경을 완성한다.
벵엔의 백미는 단연 벵엔 교회 앞 벤치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해도 U자형으로 깊게 패인 라우터브루넨 계곡 너머, 약 300m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슈타웁바흐 폭포가 시야를 채운다. 그 뒤로는 융프라우와 묀히, 아이거가 웅장한 자태로 서 있다. 굳이 전망대 티켓값을 치르지 않아도 알프스의 VVIP석을 독점하는 기분이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곳. 벵엔에서는 누구나 기꺼이 게으른 여행자가 된다.
■Männlichen
아이거와 묀히를 정면에서, 맨리헨
벵엔의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맨리헨이다. 그 시작은 곤돌라부터 특별하다. 벵엔과 맨리헨을 잇는 곤돌라 ‘로열 라이드(Royal Ride)’는 소액의 추가 요금만 내면 캐빈 지붕 위 야외 발코니에 오를 수 있는 이색 체험을 제공한다. 발아래로는 초원이, 눈앞으로는 아이거와 묀히, 융프라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알프스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여느 왕도 부럽지 않은 진짜 ‘로열’한 기분을 누릴 수 있다.
곤돌라에서 내리면 해발 2,343m의 맨리헨에 닿는다. 융프라우 지역을 대표하는 전망산인데, 정상 전망대로 향하는 ‘로열 워크(Royal Walk)’도 멋있지만 맨리헨이 품은 정수는 정상 그 너머에 있다. 맨리헨에서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 트레일이 그 주인공. 약 4.5km, 1시간 30분 남짓 완만하게 이어지는 이 길은 ‘알프스를 걷는다’는 아득한 로망을 가장 완벽하고 다정하게 실현해 주는 하이킹 코스다. 경사가 험하지 않아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코스 내내 들릴 정도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길의 가장 눈부신 특권은 클라이네 샤이덱을 향해 걸으며 아이거와 묀히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화 속 거장들이 조각해 둔 듯한 거대한 암벽으로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되고, 구름 그림자가 만년설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풍경은 끊임없이 새로운 표정을 만들어 낸다. 스위스의 대자연이 오롯이 나에게만 쏟아져 내리는 이 감각은, 가히 ‘인생 경험’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다.
■Grindelwald
융프라우 여행의 거점, 그린델발트
맨리헨 하이킹 코스의 종착지인 클라이네 샤이덱역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약 40분간 내려가면, 거대한 암벽 아래 자리한 그린델발트에 닿는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마을 중 하나다. 성수기에는 기차역에 내리는 순간부터 한국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유는 명확하다. 베란다 문만 열면 손에 잡힐 듯 거대하게 솟아 있는 아이거 북벽의 압도적인 비주얼. 푸른 구릉 위로 장난감처럼 흩어져 있는 목조 샬레들. 이 모든 풍경들이 ‘스위스적 환상’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린델발트는 융프라우 일대를 여행하기 가장 편리한 거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을에서 곤돌라를 타고 피르스트에 올라 하이킹과 각종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고, 그린델발트 터미널에서는 아이거 익스프레스를 타고 아이거글레처와 융프라우요흐로 향할 수도 있다. 클라이네 샤이덱과 맨리헨으로 이어지는 교통 역시 편리하다. 풍경은 엽서 같고, 동선은 효율적이다. 많은 여행자가 그린델발트를 융프라우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선택하는 이유다.
■First
짜릿한 액티비티 천국, 피르스트
‘액티비티의 성지’이자 해발 2,168m의 짜릿한 천국. 피르스트로 향하는 방법은 단순명료하다. 그린델발트역에서 알프스풍 골목길을 따라 10여 분쯤 걷다 보면 피르스트 곤돌라 승강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6인승 곤돌라에 몸을 싣고 약 25분간 초록빛 낙원을 날아가듯 오르면 끝이다.
피르스트에 도착하자마자 여행자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단연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 이름 그대로 깎아지른 암벽을 따라 철제 보행로를 설치해 놓았는데, 발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멍 숭숭 뚫린 격자형 바닥이 특징이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감탄과 스릴이 번갈아 터진다. 하이라이트는 절벽 허공을 향해 45m나 뻗어 있는 아찔한 전망대. 이곳 끝에 서면 아이거 북벽을 포함한 알프스의 거봉들이 묵직한 존재감으로 지평선을 압도한다.
그러나 피르스트를 완벽하게 정복하는 방법은 내려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올라올 때 탔던 곤돌라를 그대로 타고 내려가는 건 이 다이내믹한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짚라인처럼 허공을 가르는 ‘피르스트 플라이어’와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글라이더’로 짜릿한 비행을 즐긴 뒤, ‘마운틴 카트’로 현실판 카트라이더를 찍고, ‘트로티 바이크’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며 그린델발트까지 내려가는 액티비티 4종 세트가 기다리고 있다. 특히 트로티 바이크는 아이거 북벽을 코앞에 두고 알프스의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짜릿함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Bachalpsee
잔잔한 거울 호수, 바흐알프제
피르스트가 심장을 뛰게 하는 동적(動的) 천국이라면, 그 반대편엔 영혼을 송두리째 평온하게 만드는 정적(靜的) 낙원이 숨어 있다. 온갖 액티비티의 유혹을 잠시 뒤로하고 꼭 발걸음을 옮겨야 할 곳, 바로 ‘거울 호수’로 불리는 산정호수 바흐알프제다.
여정은 피르스트 곤돌라 승강장 이정표에서 시작된다. 코스에는 기분 좋은 ‘밀당’이 있다. 초반 20분 정도는 숨이 살짝 차오르는 오르막이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거짓말처럼 평탄한 능선길이 수면 앞까지 부드럽게 이어진다. 왕복 약 6km, 2시간 남짓 걸리는 초급 코스로, 거창한 장비 없이 가벼운 운동화 한 켤레만으로도 알프스의 속살에 파묻히기 충분하다. 목적지도 근사하지만, 걸음걸음마다 겹겹이 밀려드는 설산의 실루엣이야말로 이 길을 기꺼이 걷게 만드는 진짜 이유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시야가 탁 트이며 해발 2,265m에 조용히 고여 있는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흐알프제의 하이라이트는 볕이 맑은 날 비로소 완성된다. 바람마저 숨을 죽여 물결이 거울처럼 잔잔해지는 순간, 슈렉호른을 비롯한 알프스의 거대한 봉우리들이 물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정교하게 투영된다. 호숫가 잔디밭에 자리 잡고 앉아 물끄러미 그 풍경을 가슴에 담는 시간. 웅장한 산맥과 푸른 수면이 선사하는 사치는 아득할 만큼 눈부시다.
■Rosenlaui
SNS 바이럴의 주인공, 로젠라우이
여행에도 일명 ‘홍대병’이란 게 존재한다. 나만 알고 싶은 비밀스러운 장소를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작은 우월감. 한국인에겐 아직 낯설지만, 해외 SNS를 뜨겁게 달구며 여행 고수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 곳이 있다. 해발 1,330m에 자리한 로젠라우이다.
도착하면 가장 먼저 계곡이 시선을 빼앗는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초원 사이를 가르고, 그 너머로 거대한 암봉이 시선을 압도한다. 수많은 숏폼 영상의 첫 장면을 장식한 바로 그 풍경이다. 화려한 전망대도, 특별한 연출도 없다. 자연이 빚어낸 한 장의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카메라를 들어올리게 된다. 운이 좋으면 암봉을 배경으로 초원을 느긋하게 누비는 소떼도 만날 수 있다. 더 운이 좋은 날에는 목동들이 수십 마리의 소를 이끌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장면과도 마주친다. 여름 방목을 위해 소를 고산 목초지로 올리거나, 계절이 끝난 뒤 다시 마을로 데려오는 알프스의 오랜 풍습이다.
사실 로젠라우이는 요즘 SNS가 처음 발견한 비경은 아니다. 1779년에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그로스 샤이덱(Grosse Scheidegg)을 넘어 이 계곡을 찾았고, 18세기 후반부터 여행자를 맞아온 ‘호텔 로젠라우이’는 스위스 알프스 관광의 초창기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화려한 시설 대신 오래된 호텔과 목초지, 빙하수가 흐르는 계곡만 남아 있는 풍경. 수백 년 전 여행자가 감탄했던 장면과 오늘날 SNS 속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로젠라우이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로젠라우이를 오갈 때 빼놓을 수 없는 교통수단은 포스트버스(PostBus)다. 과거 우편마차에서 유래한 노란 버스로, 기차가 닿지 않는 알프스 산간 지역을 촘촘히 연결한다. 하이라이트는 로젠라우이에서 그로스 샤이덱을 넘어 그린델발트까지 달리는 128번 버스. 좁은 산악도로를 달리는 동안, 포스트버스는 특유의 ‘뿌뿌~’ 하는 경적을 울리며 굽이진 길을 헤쳐간다. 창밖으로는 기차에선 만날 수 없던 알프스의 깊숙한 풍경이 꿈결처럼 펼쳐진다.
■Spiez
툰 호수를 품은 마을, 슈피츠
인터라켄이나 그린델발트의 숙박비와 북적이는 인파가 부담스럽다면, 눈을 돌려 슈피츠에 짐을 풀어 보자. 툰 호수(Lake Thun)를 품은 작은 마을이지만, 스위스 여행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한다. 사방으로 이어진 철도망 덕분에 툰과 베른, 인터라켄은 30분 안팎, 그린델발트도 1시간 남짓이면 닿는다.
낮에는 알프스의 명소를 마음껏 누비고, 저녁이면 호숫가로 돌아와 붉게 물드는 석양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유. 스위스를 좀 더 효율적으로, 좀 더 깊이 즐기고 싶다면 슈피츠만 한 선택도 드물다.
■Aareschlucht
알프스의 숨은 치트키, 아레 협곡
스위스에서 연신 산만 바라보다 감흥이 살짝 무뎌질 때쯤, 아레 협곡은 치트키처럼 꺼내 들어야 할 비장의 카드다. 억겁의 세월 동안 빙하 녹은 물과 아레강이 단단한 석회암을 야무지게 파내어 완성한 천연의 작품이다.
아레 협곡 동역(Aareschlucht Ost)에 내려 10분쯤 걸어가면 비밀의 문 같은 동쪽 입구가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된다. 암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나무 데크와 어두컴컴한 동굴 터널을 통과하는 약 45분간의 탐험 시작! 깊이 최대 200m, 가장 좁은 곳은 폭이 불과 1m 남짓한 협곡이 양옆을 압도한다. 절벽 틈새로 포효하며 내달리는 아레강을 발밑에서 직관하다 보면 웅장함을 넘어 기묘한 경외심마저 든다. 맑은 날에는 물빛이 햇빛을 받아 ‘뽕따색’으로 빛나니, 전 세계 사진가들이 수백 번씩 카메라를 들었다 놓는 이유가 다 있다.
■Brienz
토파즈 빛을 항해하는 일, 브리엔츠
슈피츠역에서 몸을 실은 기차가 인터라켄 동역을 지나 호수 동쪽 끝 브리엔츠역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0분. 기차 플랫폼을 빠져나오자마자 선착장이 나타난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브리엔츠를 찾는 9할의 이유가 이 브리엔츠 호수 유람선에 있는데, 한번 탑승하고 나면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브리엔츠 호수의 물빛은 스위스의 그 어떤 호수와도 결이 다르다. 거대한 토파즈 보석을 아낌없이 짓깨뜨려 호수 위에 흩뿌려 놓으면 딱 이런 색이 나오려나. 알프스 빙하가 오랜 세월 암반을 갈아 만든 미세한 암석 입자가 햇빛을 산란시키며 만들어 낸 자연의 작품이다.
항해하는 동안,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전 세계적인 핫플이 된 이젤트발트(Iseltwald) 마을과 거대한 기스바흐 폭포(Giessbach Falls) 등 보석 같은 호숫가 마을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어쩐지 목적지보다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이 더 오래 기억되는, 그런 유람선이다.
■Luzern
감탄부터 터지는 도시, 루체른
미(美)의 기준만큼 주관적인 게 또 있으련만, 이 도시만큼은 예외다. 함께 여행했던 일행들이 여행이 끝난 후 일제히 입을 모아 ‘가장 예뻤던 도시’로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꼽은 곳. 감탄부터 터져 나오는 도시, 루체른이다.
도시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게 되는 건 루체른의 심장이자 도시의 영원한 상징인 카펠교. 14세기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지붕이 있는 다리로,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순식간에 중세 시대로 데려간다.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단연 무제크 성벽이다. 구시가를 감싸 안은 성벽 위로 날카로운 탑들이 호위하듯 이어진다. 가파르고 오래된 계단을 숨 차게 오르는 수고쯤이야…, 붉은 지붕 얹은 구시가지와 호수가 어우러진 절경을 마주하는 순간 한 번에 날아간다.
성벽을 내려와 발걸음을 옮기면 마크 트웨인이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 극찬했던 빈사의 사자상이 나타난다. 프랑스혁명 당시 튈르리궁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리는 조각으로, 창에 찔린 채 왕실의 방패를 끌어안은 사자의 모습은 끝까지 임무를 지킨 이들의 충성과 희생을 묵직하게 전한다.
바로 옆 빙하공원에 들르면 수만 년의 세월을 품은 빙하의 흔적이 반기는데, 솔직히 이곳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전망대다. 사방으로 막힘없이 터지는 루체른의 절경에 마음과 시선을 모조리 빼앗긴다.
남들 다 가는 뻔한 코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드라이린덴 공원(Dreilindenpark)을 강력 추천한다. 우연히 구글맵을 뒤지다 발견한 곳인데, 알고 보니 현지에서 만난 루체른관광청 직원의 ‘최애’ 플레이스이기도 했다. 언덕 위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공원에선 루체른 호수 너머 거칠게 솟구친 필라투스(Pilatus) 산과 웅장한 능선의 궤적을 오롯이 독점할 수 있다.
해 질 무렵 루체른 호숫가 산책으로 하루를 낭만적으로 마무리했다면, 숙소는 호숫가에 위엄 있게 자리 잡은 그랜드 호텔 유럽을 추천한다.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의 분위기를 간직한 호텔로, 높은 천장과 앤티크한 인테리어, 루체른 호수를 바라보는 객실이 클래식한 매력을 더한다.
■Rigi
여왕님이 하사하신 선물, 리기산
루체른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산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리기산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리기산의 최고봉인 리기 쿨름(Rigi Kulm)은 해발 1,798m. 정상에 서면 루체른 호수를 비롯해 추크호수와 라우어츠호수, 맑은 날엔 알프스의 수많은 봉우리까지 360도로 펼쳐지는 압도적인 파노라마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리기산을 즐기는 숨은 꿀팁 하나. 정상의 풍경만 담고 황급히 내려오지 말고, ‘리기 칼트바트-피르스트(Rigi Kaltbad-First)’역에 내려 발걸음을 옮겨 보자.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눈부신 초록빛 초원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루체른 호수와 알프스의 영봉들이 다채롭게 시야를 채운다.
기분 좋게 거닐다 보면 어느새 절벽을 따라 이어진 ‘클리프 워크(Cliff Walk)’에 다다른다. 울퉁불퉁한 바위 암벽이 어깨에 닿을 듯 바짝 다가섰다 이내 확 트이는 호수의 전경.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알프스의 거대한 품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는 순간이다. 정상의 북적임을 뒤로한 채 옥빛 호수를 굽어보며 걷는 그 고요한 발걸음이야말로, ‘산들의 여왕’님께서 여행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영광스런 선물이다.
Editor’s Tip
스위스 여행의 치트키 모음
이동부터 쇼핑까지, 스위스를 더욱 현명하게 누리는 실전 치트키 4.
1. AIRLINE
스위스 국적기인 스위스항공(SWISS)은 인천-취리히 직항 노선을 주 3회(월·수·토요일) 운항한다. 환승 없이 알프스의 관문에 다다른 뒤, 공항 기차역을 통해 스위스 전역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동선이다. 한 번의 환승을 덜어낸 직항편의 매력은 생각보다 크다. 선명한 고화질 모니터와 풍성한 기내 엔터테인먼트 덕에 지루할 틈이 없고, 종류별로 탄탄한 기내 간식 라인업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도착이다. 긴 비행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첫 페이지를 제법 가볍고 달콤하게 넘길 수 있다.
2. SWISS TRAVEL PASS
스위스 자유여행의 필수템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스위스 트래블 패스다. 기차, 버스, 유람선 등 눈앞에 보이는 대중교통을 자유이용권 끊은 놀이공원마냥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다. 여기에 500여 개 박물관 무료입장에 산악열차 할인이라는 든든한 덤까지 얹어 준다. 환율 계산하며 매번 표 끊느라 머리 싸매는 대신, 패스 한 장 구매해 두면 복잡한 동선 고민은 끝. 비로소 창밖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평화가 찾아온다.
3. CLOTHING
스위스 날씨에 방심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스위스 연방기상청 메테오스위스(MeteoSwiss)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고도가 100m 높아질 때 기온은 평균 약 0.65℃ 낮아진다. 도심이나 낮은 지대에서는 따뜻하고 선선하다가도, 산악열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고산 전망대에 오르면 기온은 물론 바람의 영향으로 체감온도까지 크게 낮아질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얇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는 레이어링 룩과 바람을 막아 줄 재킷 한 벌. 기능성과 활동성, 스타일까지 두루 챙기고 싶다면 1862년 스위스에서 출발한 산악 아웃도어 브랜드 마무트(Mammut)를 눈여겨볼 만하다. 로프 제조업체에서 출발해 오랫동안 산악 장비를 개발해 온 브랜드답게, 방풍성과 활동성을 고려한 제품군이 다양하다.
4. SOUVENIRS
스위스 여행의 마침표는 양손 가득 든 쇼핑백에서 완성된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스위스의 자존심 ‘린트(Lindt)’ 초콜릿과 1908년에 설립된 스위스 보틀 브랜드 ‘지그(SIGG)’ 보틀은 회사 책상 위에서도 알프스 감성을 되살려 줄 아이템이다. 여기에 ‘맥가이버 칼’로 친숙한 빅토리녹스(Victorinox)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짱짱한 실용성을 자랑한다. 마지막으로 엄선한 허브 추출물을 활용한, 135년 넘는 전통의 ‘라우쉬(RAUSCH)’ 샴푸까지 야무지게 챙겨 보자. 캐리어는 묵직해질지언정, 여행의 여운은 그만큼 오래 남는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