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7만 8천명. 서담시라는 도시의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워 수입니다. 이 도시에는 시청이 있고, 중학교가 있고, 워터파크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상현상에 대응하는 TF팀까지 운영 중이죠. 조사1팀부터 4팀까지, 배치 기록과 현장 영상이 차곡차곡 아카이빙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지도 어디에도 이 도시는 없습니다. 서담시는 AI로 만들어진 가상의 도시입니다. 지난 몇 달간 국내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을 점령하며 ‘K-백룸’이라 불렸고, 릴스 한 편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까지 AI 영상의 가장 큰 약점은 ‘어색함’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뭉개지고, 공간의 물리법칙이 어긋나고, 표정이 미세하게 비어 있었죠. 우리는 그것을 ‘AI 슬롭’이라 부르며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서담시에서는, 바로 그 어색함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불쾌한 골짜기가 무기가 될 때
아날로그 호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낡은 비디오테이프, 깨진 화질, 끊기는 신호. 기술의 결함 자체를 공포의 재료로 쓰는 문법입니다. 서담시는 여기에 AI를 얹었습니다.
AI 영상이 가진 미묘한 이질감. 사람들이 ‘가짜 같다’고 지적하던 바로 그 지점이, 이 장르에서는 ‘이상현상’이 됩니다.
워터파크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딘가 어긋나 있을 때, 시청자는 ‘AI 티가 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낍니다. 제작자는 여기에 낮은 화질과 노이즈, 흔들리는 1인칭 캠을 더해 AI의 흔적을 장르의 질감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기술의 한계를 감춘 것이 아니라, 그 한계 위에 세계관을 지은 겁니다.
완결하지 않는 기술
서담시의 영상에는 결말이 없습니다. 2024년 9월 6일 서담중학교 축제에서 학생 한 명이 사라졌고, 조사2팀은 복귀 시각을 넘긴 뒤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기록은 거기서 끊깁니다. 원인도, 괴이의 정체도, 대응 방법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이 이 콘텐츠의 첫 번째 설계입니다.
그래서 댓글창이 두 번째 창작의 장이 됩니다. 등장인물이 어떤 금기를 어겼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추론하고, 사건의 시간순서를 재구성하고, 다음 이상현상이 일어날 장소를 예측합니다. 나무위키에는 이미 서담시청·서담중학교·서담워터파크의 연표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만든 사람이 파편을 던졌고, 본 사람들이 도시를 완성했습니다.
도시라는 이름의 브랜드
주목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서담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감독의 이름도, 스튜디오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브랜드는 살아 남았습니다.
올여름 극장을 휩쓴 영화 <백룸>의 출발점도 다르지 않습니다. 2019년 4chan에 올라온 노란 벽지 사진 한 장. 주인이 없었기에 누구나 설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집단 창작에 불을 댕긴 건 열일곱 살 유튜버 케인 파슨스였고, 그가 VHS 질감으로 올린 첫 파운드 푸티지 영상은 8천만 조회를 넘겼습니다.
A24는 그를 최연소 감독으로 데려왔고, 제작비 1천만 달러짜리 데뷔작은 2억 달러를 넘기며 A24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습니다. 익명의 사진이 모두의 세계관이 되고,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해석한 한 사람이 브랜드를 가져간 것입니다.
관심경제에서 브랜드가 반드시 사람 이름일 필요는 없습니다. 일관된 세계관과 규칙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는 도시 하나도 브랜드가 됩니다.
에필로그
서담시는 레거시 관점의 걸작은 아닙니다. 서사는 파편적이고, 인물은 얕고, 러닝타임은 1분 남짓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가지 관점을 증명했습니다. AI 영상의 결함은 언젠가 고쳐야 할 버그가 아니라, 어떤 장르에서는 이미 완성된 문법이라는 것.
우리는 대개 AI가 인간만큼 잘 만들게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 사이에 서담시는 AI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냈습니다. 두꺼운 편견의 자리에, 아무도 손대지 않은 기회가 있었던 셈입니다.
당신이 AI를 쓰면서 가장 답답해하는 지점은 어디입니까?
혹시 그 결함이, 당신만의 장르가 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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