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몬터레이 카 위크에서 전동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맥라렌은 1992년 전설적인 F1 출시 이후 34년 만에 3페달 수동변속기를 탑재한 슈퍼카 ‘McL 6GT’를 선보였다. 포르쉐 역시 911 카레라 S에 6단 수동변속기를 다시 이식한 ‘MT 패키지’를 발표했다.
페라리 또한 12칠린드리에 클러치 페달과 H-패턴 시프트 레버를 결합한 ‘마누아레(Manual) 버전’을 출시하며 아날로그적 조작감을 재해석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 배터리와 소프트웨어가 자동차 산업의 중심 과제로 자리잡은 지 오래지만, 가장 비싸고 첨단화된 슈퍼카 시장에서는 오히려 엔진과 변속기, 페달이라는 원형의 기계 감각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완성차 업계 전반에 걸친 전동화 로드맵 재조정이 자리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최소 12개 이상의 글로벌 완성차 제조사가 북미와 유럽 내 친환경 정책의 후퇴 및 전기차 수요 둔화를 이유로 전동화 추진 속도를 다각도로 조정하는 중이다.
포드는 미국 테네시주에 건설 중이던 대규모 전기차 전용 공장을 내연기관 기반 트럭 생산 시설로 전환하며 약 20조 원 규모의 손실을 장부에 반영했다. GM과 스텔란티스 역시 순수 전기차 비중을 줄이는 대신,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다시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유럽연합(EU) 또한 2035년 내연기관 신차 판매 금지 방침을 완화하여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와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의 판매 여지를 열어두었다.
럭셔리 및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전략 수정은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롤스로이스는 2030년 이후에도 가솔린 V12 모델 생산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벤틀리와 로터스, 포르쉐 역시 기존의 '100% 또는 80% 전동화' 달성 시점을 미루고,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판매 기간을 늘리는 현실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람보르기니는 2030년 출시를 예고했던 브랜드 최초의 순수 전기 차종 '란자도르'의 양산 계획을 철회하고 PHEV 라인업으로 대체했다. 스테판 빙켈만 람보르기니 CEO는 순수 전기 슈퍼카에 대한 고객층의 거부감이 예상보다 크다고 지적하며, 엔진의 진동과 스티어링 휠의 정교한 핸들링, 제동 감각, 그리고 내연기관 고유의 사운드 상실이 가장 큰 거부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전동화 전환의 속도 조절과 맞물려, 운전자의 직관적인 조작감을 극대화하는 수동변속기 수요 역시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해외 주요 매체들은 포르쉐와 맥라렌, 스바루, 토요타, 포드, BMW 등을 '3페달'을 포기하지 않는 핵심 브랜드로 꼽는다. 포르쉐는 911 카레라 S용 MT 패키지를 발표하며 PDK 적용 모델 대비 약 2,600만 원 이상 높은 가격대임에도 불구하고 판매를 재개했다. 맥라렌은 McL 6GT를 통해 2028년 양산을 확정 지었다.
기존 메커니즘을 부활시키거나 고객 요청에 맞춰 전략을 바꾼 사례도 늘고 있다. 스바루는 WRX를 위해 정통 기어박스인 TY85를 다시 적용했다. 고든 머레이 오토모티브(GMA)는 수동변속기를 향한 고객 반응이 예상치를 뛰어넘자 2페달 개발 계획 자체를 취소했고, 파가니 역시 2페달에서 3페달로 방향을 선회했다. 쾨닉세그는 9단 자동과 6단 수동의 특성을 오가는 하이브리드 변속기 시스템을 새로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아날로그 회귀 전략은 기계식 연결 대신 바이와이어(By-Wire) 기술을 통해 조작감을 전자적으로 재현하는 절충안과 같은 맥락이다. 포르쉐 911 GT3처럼 순수 기계식 구조를 고수하는 방식과 함께, 변속 과정에서의 리듬감, 실수에 따른 위험 부담, 그리고 정확한 조작 시 얻게 되는 쾌감을 소프트웨어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동시에 진행되는 셈이다.
이처럼 내연기관과 수동변속기가 슈퍼카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는 배경은 '감성적 가치'와 '자산 가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동차 평가·보증 전문업체 해거티(Hagerty)의 분석에 의하면, 수동변속기가 채택된 고성능 퍼포먼스 모델들은 출고 후 7년이 지난 시점에도 자동변속기 모델 대비 최대 15% 이상 높은 잔존가치를 기록했다. 포르쉐 911 GT3, 쉐보레 콜벳 Z06, 혼다 시빅 타입 R 등 수동변속기 옵션을 갖춘 차량들이 컬렉터 시장에서 독자적인 프리미엄을 형성하는 사례는 갈수록 늘고 있다.
희소성이 곧 자산 가치로 연결되는 하이퍼카·슈퍼카 시장의 특성상, 대량생산 시대에 사라져가는 조작 방식일수록 소장 가치는 오히려 높아졌다.
다만 이 현상은 투자 논리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래된 캬브레터 방식의 V12 페라리를 직접 운전해 본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매력은 ‘속도’가 아니다. 왼발로 클러치를 깊게 밟고, 엔진 회전수(RPM)를 맞춘 뒤, 시프트 레버가 게이트에 정확히 들어가는 순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직관적인 쾌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엔진 사운드와 스티어링 휠의 묵직한 무게감, 차체의 움직임이 운전자의 감각과 하나로 연결되는 그 압도적인 경험은 현재의 전동화 기술로 대체하기 어렵다. 배터리와 모터가 만드는 가속력은 제원표상의 숫자로서는 우월할지 몰라도, 운전자가 기계와 소통하며 느끼는 성취감까지 재현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아날로그 감성으로의 회귀 흐름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가에 있다. 글로벌 배출가스 및 연비 규제, 첨단 안전 기준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으며, 신규 수동변속기를 개발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 역시 여전히 막대하다. 페라리가 바이와이어 방식을 도입한 배경에도 800마력을 넘는 V12 엔진 출력을 버텨낼 순수 기계식 변속기를 새로 개발하는 비용적·기술적 한계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라렌과 포르쉐, 스바루 등이 보여주는 행보는, 적어도 럭셔리와 고성능 퍼포먼스 영역에서 '순수 전동화 일변도'의 단일 로드맵만이 유일한 해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규제와 기술적 타협 속에서도 전동화와 내연기관,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이 공존하는 다변화된 라인업이야말로, 앞으로 슈퍼카 시장을 이끌어갈 새로운 기준(New Normal)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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