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첨단 기능을 결합한 자동차에 결함과 오작동이 발생하면,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급발진 사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동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고 유형도 천차만별입니다. 전기차 전환을 맞아 새로 도입되는 자동차 관련 법안도 다양합니다. 이에 IT동아는 법무법인 엘앤엘 정경일 대표변호사(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와 함께 자동차 관련 법과 판례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는 [자동차와 法] 기고를 연재합니다.
편도 3차로 도로에서 주행 중이던 승용차가 내비게이션의 우회전 안내를 뒤늦게 듣고 우측차로로 차선을 변경합니다. 마침, 우측차로 뒤에서 주행하던 배달 오토바이는 승용차를 피하기 위해 급제동하다 중심을 잃고 도로에 미끄러집니다. 승용차 운전자는 룸미러로 넘어진 오토바이를 봤지만, “내 차와 닿지는 않았네. 놀라서 혼자 넘어진 거지”라며 구호 조치 없이 현장을 그대로 떠납니다. 며칠 뒤, 이 승용차 운전자는 경찰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도주치상), 이른바 '뺑소니' 피의자로 출석하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로서 상담하다 보면, 이와 유사한 '비접촉 교통사고' 사례를 빈번하게 접합니다. 상담 온 운전자들은 대체로 '부딪히지 않았으니 교통사고가 아니다'라는 생각, '그러니 굳이 차를 세울 필요 없이 그냥 가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묻는 것은 '접촉'이 아니라 '인과관계'
법이 책임을 묻는 핵심 기준은 물리적인 접촉 여부가 아니라 '상당인과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운전 행위가 상대방 차량의 제동이나 조향에 불가피한 영향을 미쳐 사고를 유발했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내 차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면죄부가 되지 못합니다. 충돌하지 않았더라도 위협적인 주행 때문에 상대 차량이 시설물을 들이받거나 미끄러져 넘어지게 만들었다면, 접촉 사고와 동일한 법적 책임을 집니다. 법원 역시 직접 부딪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흔적이 없고 몰랐다"는 변명…디지털 증거 앞에서는 무용지물
접촉사고는 파손 부위와 도색 흔적, 스키드마크라는 증거가 남습니다. 하지만 비접촉 사고에는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차량의 사고기록장치(EDR)는 충돌이나 에어백 전개를 계기로 기록을 남기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은 원인 차량의 EDR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해 오토바이의 블랙박스와 헬멧 캠, 뒤따르던 차의 전방 영상, 주변 CCTV 등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같은 순간을 찍습니다.
방향지시등이 언제 켜졌는지, 차선을 넘은 시점에 두 차량의 간격이 얼마였는지, 제동등이 들어온 순간과 오토바이가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이 그대로 계산됩니다. 예전에는 "갑자기 끼어들었다"와 "충분히 거리가 있었다"로 분쟁이 생겼다면, 지금은 ‘과학적인 분석’으로 원인을 추정합니다.
운전자를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급차로 변경이 아니라, 사고를 유발하고 그냥 간 행동에 있습니다. 주행 중 차로변경 자체는 보험처리로 끝나고 형사처벌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고를 알고 떠나는 순간, 보험은 소용이 없어지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이 성립합니다. 피해자가 다쳤다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기본이고, 운전면허가 취소되며 4년간 면허를 다시 딸 수 없습니다.
쟁점은 사고를 알았느냐인데, 블랙박스에 급제동 마찰음과 넘어지는 소리, 놀라서 내뱉은 혼잣말이 녹음돼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뒤차 영상과 CCTV에 사고 직후 켜졌다 꺼진 브레이크등, 잠시 속도를 줄였다 다시 가속하는 부분이 확인된다면, 도주의 고의가 인정됩니다.
같은 데이터가 억울한 운전자도 구합니다
내 차 근처에서 누군가 넘어졌다는 사실만으로 무조건 가해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법원은 상대가 법규를 어겼는지, 두 차의 속도와 거리는 어땠는지, 급제동이 불가피했는지, 회피가 위험에 비해 지나치지 않았는지를 따집니다. 이 판단도 바로 데이터의 영역입니다. 접촉이 없었다는 이유로 원인 차량의 책임이 줄지 않듯, 피해 차량이 넘어졌다는 이유로 책임이 전부 상대방 쪽으로 가지도 않습니다.
시스템 개입으로 인한 회피 기동, 책임은 누구에게?
자율주행 기술과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의 보편화로 비접촉 사고의 새로운 유형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방 충돌 방지 보조나 차선 이탈 방지 보조 시스템이 그림자나 작은 낙하물을 오인해 급제동을 걸거나 차선을 급하게 틀어, 이로 인해 놀란 옆 차가 사고를 내는 경우입니다.
시스템의 개입으로 사고가 발생했더라도, 즉시 차를 세워 구호 조치를 해야 할 책임은 운전석에 앉은 운전자에게 있습니다. 시스템의 판단을 탓하며 현장을 벗어나면, 결국 도주치상과 사고후미조치죄의 책임은 고스란히 운전자가 짊어지게 됩니다.
마치며
비접촉 교통사고는 파손 흔적이 없기에 오로지 디지털 증거와 데이터로 실체를 다퉈야 합니다. 따라서 억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당장 실천해야 할 수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운전 직후 상대방이 넘어지거나 충돌한 정황이 있다면 즉시 정차해 피해를 확인하고, 구호조치와 인적사항을 제공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 112·119에 신고도 해야 합니다.
현장 조치 후에는 이벤트 영상뿐만 아니라 사고 전후의 전·후방 상시 영상과 음성도 원본 파일로 보존해야 합니다.
교통사고의 기준은 '부딪혔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제공했는가'에 있습니다. 차체에 흔적이 없어도 데이터에는 남고, 그 데이터가 가해자를 찾아내기도 하고 억울한 운전자를 구하기도 합니다.
최선은 사고 자체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운전자들의 안전운전 습관이 데이터 시대의 비접촉 교통사고에서도 가장 확실한 대비책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정경일 변호사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제49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수료(제40기)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교통사고·손해배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IT동아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