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은 선명한 빨강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매일 거리를 누비는 2층 버스부터 지하철역의 표지판, 근위병의 제복, 영국 국기 유니언 잭까지 도시의 상징 곳곳에 빨강이 들어 있다.
런던 사람들도 이 강렬한 색을 꽤 능숙하게 다룬다. 코트와 신발, 헤어스타일, 가방과 작은 소품에 빨강 하나를 더해 무채색의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번 런던 여행에서는 그 색을 따라 걸었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하나씩 나타나는 ‘런던의 빨강’을 쫓았다.
거리를 채우는 런던의 빨강
거리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빨강은 단연 2층 버스다. 빨간 버스가 오래된 벽돌 건물 사이를 지나고, 관광객을 태운 오픈톱 버스도 런던 풍경에 선명한 색을 보탠다. 길모퉁이의 빨간 우체통과 전화 부스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우체통은 자세히 볼수록 재미있다. 앞면에 새겨진 ‘왕실 문장(Royal Cypher)’을 보면 어느 왕 또는 여왕의 재위 시기에 설치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VR’은 빅토리아 여왕, ‘E VII R’은 에드워드 7세, ‘GR’은 조지 5세, ‘E VIII R’은 에드워드 8세, ‘G VI R’은 조지 6세, ‘E II R’은 엘리자베스 2세를 뜻한다. 최근에는 찰스 3세의 ‘C III R’도 등장했다.
여기서 R은 라틴어로 왕을 뜻하는 Rex 또는 여왕을 뜻하는 Regina다. 오래된 우체통 하나가 런던의 시간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제는 통화보다 사진 배경으로 더 친숙한 빨간 전화 부스도 런던에서는 훌륭한 포토 스폿이 된다.
버진애틀랜틱이 사랑한 색
빨강을 향한 애정은 하늘에서도 이어진다. 인천과 런던을 잇고 있는 버진애틀랜틱은 로고와 항공기 디자인은 물론 기내의 작은 물건까지 특유의 빨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어메니티의 빨간 양말, 빨간 수영복을 입은 캐릭터 같은 장난스러운 디테일도 여행의 기분을 끌어올린다. 어퍼 클래스와 프리미엄 좌석에서는 토마토 색감의 시그니처 칵테일 '블러디 메리'도 만날 수 있다.
런던 히스로공항 클럽하우스(라운지)에 들어서면 빨강은 더욱 대담해진다. 라운지에서도 버진 특유의 과감하고 유쾌한 디자인 감각을 이어가고 있는데, 먼저 강렬한 빨간색 유니폼 전시가 시선을 붙잡는다. 또 특별한 고객을 위한 프라이빗 공간 ‘The Royal Box’에서는 소파와 소품까지 붉은색으로 통일한 공간이 인상적이다.
버진의 마지막 빨강은 쇼디치(Shoreditch)의 버진 호텔에서 만났다. 런던에 처음 문을 연 버진 호텔답게 간판부터 객실의 빨간 SMEG 냉장고까지 브랜드의 색이 곳곳에 이어진다. 특히 버진 레코드의 음악적 뿌리를 담은 바 ‘히든 그루브(Hidden Grooves)’가 재미있다.
빨간 의자와 턴테이블, 시선을 단번에 붙드는 붉은 벽까지. 이쯤 되면 알게 된다. 런던에서 빨강은 단순한 포인트 컬러가 아니라 도시와 브랜드의 성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말이다.
런던의 빨강을 입은 사람들
런던의 빨강을 이야기할 때 근위병의 제복도 빼놓을 수 없다. 검은 베어스킨 모자와 붉은색 군복 상의 스칼렛 튜닉(Scarlet Tunic)은 버킹엄궁과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영국군의 붉은 제복 전통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고, 오늘날에도 근위 임무와 국가 의전에서 그 색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다.
특히, 버킹엄궁 근위병 교대식은 런던에서 이 빨강을 가장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현재 근무 중인 근위병들이 새로 도착한 이들에게 궁전 경비 임무를 넘기는 의식으로, 세인트 제임스궁에서 군악대와 함께 버킹엄궁으로 행진한다. 재미있는 건 모두 비슷해 보이는 붉은 제복에도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행진이 시작되고 붉은 제복의 행렬이 궁전 앞으로 들어서는 순간, 런던이라는 도시가 왜 빨강으로 기억되는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예술과 무대에도 번졌다
런던의 빨강은 거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우스뱅크센터 헤이워드 갤러리에서는 아니시 카푸어의 대규모 개인전(10월 18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가의 시그니처 컬러인 강렬한 빨강이 단번에 시선을 붙잡는다.
특히 붉은 안료로 뒤덮인 신작 ‘HaMakom(2026)’은 거대한 암석이나 땅덩어리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풍경과 건축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카푸어는 이번 전시에서도 빨강을 통해 육체와 공간, 깊이에 대한 감각을 극적으로 끌어낸다.
웨스트엔드에서도 빨강은 존재감이 확실하다. 1999년부터 뮤지컬 <라이온 킹>이 공연되고 있는 라이시엄 시어터에 들어서면 붉은 커튼과 객석, 화려한 금빛 장식이 어우러져 클래식한 극장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릴 때 마주치는 광고에서도 빨강은 흔한 선택이다. 공연 포스터부터 패션과 브랜드 광고까지, 런던에서는 가장 평범한 일상의 장면조차 선명한 빨강 한 조각을 품고 있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sage@traveltime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