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와 프로젝터로 알려진 엡손이 향후 10년간 사업의 무게중심을 산업용 기술로 옮긴다. 현재 전체 매출의 33%를 차지하는 산업 분야 비중을 2035년 50%까지 높이고, 이익 기여도는 45%에서 7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기존 프린팅 사업은 안정적인 수익 기반으로 유지하면서 잉크젯 프린트헤드와 마이크로디바이스, 산업용 로봇, 고성능 소재에 투자를 집중한다.
한국엡손은 22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창립 30주년 및 글로벌 최고경영자(CEO) 방한 미디어 간담회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지난해 세이코 엡손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요시다 준키치 CEO와 모로후시 준 한국엡손 대표가 참석했다. 요시다 대표가 취임 이후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엡손은 장기 비전 ‘엔지니어드 퓨처 2035(ENGINEERED FUTURE 2035)’와 이를 실행하기 위한 2026~2028년 제1차 중기 경영계획을 공개했다.
산업 매출 비중 33%에서 50%로
엡손의 2025 회계연도 글로벌 매출은 1조4133억엔이다. 사업별 비중은 오피스·홈 프린팅이 49%로 가장 크고 산업·로보틱스 21%, 비주얼·라이프스타일 18%,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12% 순이다.
산업·로보틱스와 프리시전 이노베이션을 합친 산업 분야의 현재 매출 비중은 33%다. 엡손은 이를 2035년 50%로 확대한다. 산업 분야의 이익 기여도는 현재 45%에서 70%까지 높일 계획이다.
프리시전 이노베이션에는 프린트헤드를 중심으로 한 잉크젯 솔루션과 타이밍 디바이스 등 마이크로디바이스, 고성능 금속 소재를 생산하는 엡손 아트믹스 사업이 포함된다. 산업·로보틱스 부문은 상업·산업용 프린팅과 산업용 로봇 사업으로 구성된다.
오피스·홈 프린팅과 비주얼·라이프스타일 사업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창출하는 기반으로 운영한다. 프린터와 프로젝터 완제품에서 확보한 고객 기반을 유지하면서 산업용 부품과 소재, 생산 자동화 기술의 매출을 늘리는 방식이다.
요시다 준키치 세이코 엡손 대표이사 사장
요시다 대표는 “엡손은 프린터와 프로젝터 같은 완제품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배경에는 제품을 구현하는 다양한 코어 기술이 있다”며 “정밀 기술과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결합해 산업과 사회에서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구현하겠다”고 말했다.
엡손은 2035년까지 에너지와 자원의 효율적 활용, 정밀 기술을 통한 기술 발전 지원, 생산성과 신뢰성 향상을 통한 인력 부족 대응, 학습·업무·생활 지원 등 네 가지 영역에서 사업을 확대한다.
3년간 성장 분야에 2800억엔 투자
엡손은 2035년까지의 사업 전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눴다. 2026~2028년은 수익 구조와 성장 기반을 바꾸는 ‘트랜스폼’ 단계다. 2029~2031년에는 구축한 기반을 이용해 성장 모델로의 전환을 가속하고, 2032~2035년에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업 구조를 확립한다.
첫 단계에서는 글로벌 사업 운영과 공급망을 재설계하고 고정비와 재고, 자산 효율을 개선한다. 조직과 거점, 조달 및 공급망 관리 체계를 조정해 3년 동안 260억엔 규모의 수익 개선을 추진한다.
여기서 확보한 자금은 잉크젯 솔루션과 마이크로디바이스 등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상업·산업용 프린팅과 로보틱스에 다시 투입한다. 인수·합병을 포함해 2028년까지 성장 분야에 투입할 자금은 총 2800억엔이다.
재무 목표로는 2028 회계연도 매출 1조5000억엔과 투하자본이익률(ROIC) 8% 이상, 자기자본이익률(ROE) 10% 이상, 매출이익률(ROS) 8% 이상을 제시했다.
요시다 대표는 “매출과 이익을 늘리는 것과 함께 투자한 자본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를 경영 판단에 반영하겠다”며 “개별 국가가 아닌 엡손그룹 전체의 투자 효율을 재정비하면서 성장 분야에 자원을 배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시다 준키치 세이코 엡손 대표이사 사장
한국엡손 매출 28% 증가…산업 사업이 성장 견인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은 한국엡손은 2025 회계연도에 매출 227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매출 1776억원보다 약 28% 증가한 수치다.
사업별 매출은 오피스·홈 프린팅 653억원,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541억원, 비주얼·라이프스타일 545억원, 산업·로보틱스 370억원, 기타 168억원이다. 특히 프리시전 이노베이션 매출이 전년보다 205%, 산업·로보틱스는 24% 증가했다.
프리시전 이노베이션에서는 산업용 잉크젯 수요 증가에 맞춰 프린트헤드 사업을 확대했다. 마이크로디바이스 분야에서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통신장비 등에 쓰이는 타이밍 디바이스를 공급하며 사업 기반을 유지했다.
상업·산업용 프린팅은 의류와 굿즈 제작, 주문형 생산 시장을 중심으로 적용 범위를 넓혔다. 국내 중소기업이 엡손의 산업용 프린팅 장비로 제품을 생산해 유럽과 미국 등에 수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것이 한국엡손의 설명이다.
오피스·홈 프린팅에서는 법인 렌탈과 더스트프리 솔루션을 확대했다. 비주얼·라이프스타일 사업에서는 홈 프로젝터 브랜드 ‘라이프스튜디오(Lifestudio)’를 선보이고 파크골프 등 프로젝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시장을 발굴했다.
모로후시 준 한국엡손 대표
모로후시 대표는 “한국엡손은 지난 30년 동안 프린팅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상업·산업용 프린팅, 로보틱스, 잉크젯 솔루션, 마이크로디바이스로 역할을 넓혀왔다”며 “한국 고객과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기술을 적용하며 사업을 확대해 왔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한 기술은 잉크젯”…프린터 밖으로 적용 확대
요시다 대표는 엡손의 성장을 이끌 기술로 ‘프리시전코어(PrecisionCore)’ 기반의 잉크젯 솔루션을 꼽았다. 잉크젯 기술이 가정·사무용 프린터뿐 아니라 상업·산업용 인쇄와 제조 공정에도 공통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프린트헤드는 종이와 섬유에 잉크를 분사하는 용도에서 벗어나 필요한 위치에 정해진 양의 액체나 소재를 정밀하게 토출하는 산업 공정에 적용할 수 있다. 엡손은 앞으로 5~10년 동안 프린팅 이외의 제조 영역으로 활용처가 넓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요시다 대표는 “상업·산업용과 오피스 영역 전반에 잉크젯 솔루션이 활용되고 있다”며 “엡손의 여러 사업에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성장 기술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한국엡손은 잉크젯 솔루션과 마이크로디바이스, 로보틱스, 상업·산업용 프린팅을 국내 산업 사업의 네 축으로 설정했다. 특정 분야 한 곳에 투자를 집중하기보다 국내 제조업과 고객 수요에 맞춰 네 사업을 함께 확대한다.
AI 데이터센터 겨냥한 고정밀 타이밍 디바이스
마이크로디바이스 분야에서는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고속통신 장비에 필요한 타이밍 디바이스를 앞세운다. 타이밍 디바이스는 전자기기와 통신 시스템이 같은 기준에 맞춰 작동하도록 정밀한 기준 신호를 생성한다.
AI 연산량과 통신 속도가 높아질수록 장비 간 신호를 동기화하는 정확도가 중요해지고 소비 전력도 증가한다. 엡손은 직접 생산한 인공 수정과 반도체 설계 기술을 결합해 고정밀·저전력·소형화를 함께 구현하는 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엡손은 자체적으로 인공 수정을 성장시켜 수정 디바이스까지 생산하는 업체 가운데 하나다.
요시다 대표는 “데이터 통신과 서버, 데이터센터에서는 고속화에 맞춘 정밀 제어와 함께 소비 전력 및 설치 공간을 줄이는 기술이 요구된다”며 “한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 고객이 밀집한 시장인 만큼 고객이 겪는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면서 매출과 투자 효율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요시다 준키치 세이코 엡손 대표이사 사장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의 외부 고객 확대에 대해서는 급격하게 생산 규모를 키우기보다 고객별 설계와 요구 조건에 맞춰 공급을 늘리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만 현재 협의 중인 국내 고객이나 구체적인 수주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SCARA·6축 로봇에 AI 결합…정밀 작업 범위 넓힌다
로보틱스 사업에서는 SCARA 로봇과 6축 로봇을 중심으로 국내 제조업과 의류산업, 전자기기 및 반도체 분야에 공급을 확대한다.
엡손 로봇은 힘의 크기와 방향을 감지하는 포스 센서를 이용해 조립이나 가공 과정에서 미세한 힘을 조절할 수 있다. 기존 작업자가 반복해서 수행하던 공정이나 정밀한 조립이 필요한 생산라인이 주요 적용 대상이다.
엡손은 센싱 기술에 AI와 피지컬 AI를 결합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작업 대상이나 주변 환경이 달라졌을 때 로봇이 이를 감지하고 동작을 조정하도록 해 정형화된 반복 작업 이외의 공정으로 적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요시다 대표는 “포스 센서를 이용하면 섬세하고 미세한 가공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며 “센싱 기술과 AI, 피지컬 AI를 함께 개발해 정밀 제조뿐 아니라 제조업 이외의 섬세한 작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엡손은 로봇 공급에 앞서 공정 적합성을 검증하고 설치 이후에도 기술 지원과 사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현지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 파트너와 함께 자동화 시스템을 설계해 로봇 본체만 판매하는 방식과 구분하겠다는 설명이다.
구체적인 국내 생산시설 투자 대신 기술지원 인력 확대
한국 시장의 신규 투자 계획과 관련해 한국엡손은 생산시설이나 연구개발센터의 구체적인 신설 일정을 발표하지 않았다. 먼저 산업용 제품을 구매하기 전 진행하는 공정 검증과 고객별 도입 지원, 설치 이후 서비스 역량을 확대할 방침이다.
모로후시 준 한국엡손 대표
이를 위해 산업 장비와 로봇, 잉크젯 및 마이크로디바이스를 지원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국내 기업과의 기술 협력 및 공동 투자 가능성을 검토한다. 세이코 엡손 본사와 한국엡손이 국내 투자 대상과 협력 기업을 함께 발굴하는 방식도 추진한다.
모로후시 대표는 “산업 분야에서는 고객이 제품을 도입하기 전 실시하는 검증부터 개별 구축 지원과 서비스까지 전 과정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업 확대에 맞춰 이를 수행할 인력을 강화하고 국내 파트너들과 투자 기회를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이준문 기자/jun@newsta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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