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리 모델이라는 표현은 보통 브랜드에서 가장 낮은 문턱을 의미한다. 하지만 벤틀리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토르칼 S의 최고출력은 888마력이다. 이 숫자 앞에 '엔트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부터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도 벤틀리는 토르칼을 브랜드 전동화의 출발점으로 내세운다.
크루의 '드림 팩토리'가 한때 그렸던 그림은 2030년부터 전기차만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벤틀리는 이후 '비욘드 100+' 전략을 내놓으며 방향을 수정했다. 컨티넨탈 GT 스피드와 같은 내연기관 모델은 당분간 라인업에 남고, 2027년부터는 고객이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전기차 가운데 원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전동화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다기보다 시장의 현실을 받아들인 결정에 가깝다.
토르칼은 바로 그 수정된 전략이 만들어낸 첫 결과물이다. 새로운 로고를 처음 달고 나오는 모델이라는 점도 의미가 크다. 벤틀리가 토르칼에 얼마나 많은 상징성을 담았는지는 이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토르칼은 포르쉐 카이엔 일렉트릭과 같은 계열의 플랫폼을 사용한다. 차체 크기도 전장 5m 안팎으로 카이엔과 비슷한 수준이다. 벤테이가보다는 작지만 휠베이스는 더 길다. 전기차 전용 구조가 만들어내는 비율이다.
물론 같은 그룹 안에서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는 일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벤틀리에게는 분명한 과제가 있다. 같은 뼈대를 쓰는 차가 어떻게 다른 브랜드의 자동차로 느껴질 것인가 하는 문제다.
벤틀리는 이 질문에 비교적 정직하게 답하려 한다. 완전 능동형 서스펜션의 기본 하드웨어는 공유하지만, 스티어링을 포함한 세부적인 튜닝은 벤틀리의 방식으로 새롭게 잡았다. 플랫폼 공유가 당연해진 지금의 자동차 산업에서는 하드웨어 자체보다 소프트웨어와 세팅이 브랜드의 성격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토르칼은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차다.
외관은 분명 벤틀리다. 다이아몬드 패턴을 적용한 각진 그릴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롤스로이스를 떠올릴 정도로 위엄이 있다. 헤드램프는 위쪽의 얇은 LED 슬릿과 아래쪽 메인 램프로 나뉘어 있다.
측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크게 부풀린 뒷바퀴 펜더가 눈에 들어온다. 영국에서 흔히 '잠자는 야수'라고 표현하는 자세다. 정지해 있을 때도 힘이 느껴지지만, 필요할 때 언제든 달려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뒤쪽은 얇게 분할된 테일램프가 입체감을 만든다.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분위기를 갖추면서도 지나치게 미래적인 형태로 흐르지는 않는다. 고전적인 벤틀리의 분위기도 남아 있다. 전기차라는 이유만으로 익숙한 문법을 버리지 않은 선택이다. 벤틀리가 어떤 고객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이다.
실용성도 놓치지 않았다. 트렁크 외에 90리터 용량의 프렁크가 마련됐고, 충전 포트는 양쪽에 배치했다.
실내에 들어서면 벤틀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보다 분명해진다. 날개 달린 B를 떠올리게 하는 대시보드 구성에 최고급 소재가 사용되고, 대비색 스티치는 10분의 1mm 단위로 맞춰진다. 아직 본격적인 양산 전 단계였음에도 현지에서 마감 품질은 흠잡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의 폭스 브라더스와 협업한 울 인테리어도 새롭게 적용됐다.
흥미로운 것은 굳이 조수석에 디스플레이를 추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넓게 펼쳐진 대시보드에서 고객이 직접 고른 장식 소재를 바라보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화면을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최근 자동차 업계의 흐름과는 반대 방향이다. 디지털 기능을 줄인 것이 아니라 럭셔리의 기준을 다른 곳에 둔 셈이다. 화면의 크기보다 소재와 공간,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느껴지는 질감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곡면 터치스크린과 계기판 뒤쪽의 일부 조작부는 그룹 내 공유 부품이다. 컨티넨탈 GT와 플라잉 스퍼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회전식 디스플레이도 빠졌다. 벤틀리는 그 이유로 인체공학을 들었다. 다만 회전식 디스플레이가 있었다면 실내의 독창성은 한층 더 짙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토르칼은 앞뒤 차축에 각각 하나의 모터를 배치한다. 코어 모델만 해도 최고출력 821마력, 최대토크 1,194Nm를 발휘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초다. 토르칼 S는 최고출력 888마력, 최대토크 1,350Nm다. 시속 100km까지는 2.9초 만에 도달하고 최고속도는 260km/h다. 최대토크 1,350Nm는 벤틀리 역사상 가장 높은 수치다.
하지만 제원만 놓고 보면 포르쉐 카이엔 터보 일렉트릭이 더 빠르다. 토르칼은 이 부분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애초에 벤틀리가 강조하는 것도 가속 성능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2,795kg에 달하는 차체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무거운 전기 SUV를 얼마나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벤틀리 특유의 승차감과 주행 감각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배터리 용량은 113kWh다. 10년 보증이 제공되며 주행 가능 거리는 최대 600km다. 800V 전기 시스템을 바탕으로 최대 400kW 급속 충전을 지원한다. 기본적인 기술 사양은 카이엔 일렉트릭과 사실상 같은 수준이다.
결국 숫자만으로는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같은 플랫폼과 비슷한 배터리, 같은 충전 성능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최종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세팅과 감성이다.
토르칼은 특히 사운드에 많은 투자를 진행했다. 대부분의 전기차는 스피커를 통해 내연기관의 배기음을 흉내 낸다. 벤틀리는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6.75리터 V8의 질감을 드럼으로 재현하는 방식이다. 벤틀리는 이를 '추진음'이라고 부른다.
처음 들으면 꽤 낯설 수밖에 없는 접근이다. 하지만 실제 차 안에서는 의외로 사실적으로 들린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인위적으로 만든 소리보다 진짜 기계음이나 전기차 특유의 정적을 더 선호하는 만큼 이 점은 특히 기대가 된다.
그럼에도 가짜 변속 충격까지 만들어 넣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눈여겨볼 만하다. 스포츠 모드라고 해서 억지로 감각적인 요소를 덧붙이지 않았다. 이런 절제는 오히려 벤틀리다운 선택처럼 느껴진다.
이중 접합 유리를 사용한 덕분에 실내 정숙성 역시 인상적이라는 평가다. 벤틀리는 토르칼이 플라잉 스퍼보다 더 편안하면서도 컨티넨탈 GT 스피드보다 더 스포티하다고 설명한다. 표현만 놓고 보면 상당히 대담하다. 다만 이 부분은 실제 도로에서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
토르칼이 출시된다고 해서 기존 벤틀리 라인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벤테이가와 컨티넨탈 GT, 플라잉 스퍼는 계속 남는다. 벤틀리는 이를 '선택의 자유'라고 부른다.
기존 고객을 놓치지 않으면서 전기차에 대한 수요도 천천히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고급차 시장에서는 모든 고객이 같은 속도로 전동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 선택이기도 하다.
다만 이 전략에는 분명한 부담도 따른다.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전기차를 동시에 운영하려면 개발과 생산 과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제품 전략부터 부품 조달, 생산 설비까지 관리해야 할 영역이 늘어난다.
그럼에도 초고급 시장의 고객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전동화 속도를 결정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모든 고객에게 한꺼번에 같은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선택권을 남겨두는 것. 벤틀리가 강제 전환 대신 병행 전략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결국 토르칼의 성패는 카이엔과 같은 뼈대를 공유하면서도 벤틀리만의 주행 감각을 완성했느냐는 것이다. 또한, 기존 벤틀리 고객이 전기 벤틀리를 단순한 두 번째 차가 아니라 첫 번째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느냐는 점이다.
2027년 여름 출시될 퍼스트 에디션은 그 답을 처음 보여줄 차다. 888마력이라는 숫자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 힘을 벤틀리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에 있다.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저작권자(c) 글로벌오토뉴스(www.global-auto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