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필라스 하우스 치앙마이에서 보낸 시간.
느린 여행
치앙마이는 딱히 할 일이 없는 도시다. 불평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사원은 몇 군데 보고 나면 더 갈 곳이 없고, 카페는 많지만, 불볕더위에 속을 식혀 주는 건 언제나 차디찬 아메리카노뿐. 해가 지면 곧장 조용해진다. 평소보다 짧지만 고요한 밤을 지내고 나면, 새벽같이 눈이 떠진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애매한 치앙마이의 하루가 그렇게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치앙마이의 무료함은 결핍이라기보다 생활에 가깝다. 그 무료한 생활에 매료되어 치앙마이를 안식처로 삼은 여행자가 한둘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고.
느림의 미학을 누리고자 하는 여행지에서는, 호텔이 그 여행의 반이다. 치앙마이가 처음이라면 대부분 올드타운이나 님만해민 쪽으로 알아볼 텐데, 쉼에는 아무래도 강변의 느긋함이 함께 머물러야 하니까. 치앙마이의 중심에는 핑(Ping)강이 흐른다. 갓 내린 커피의 크레마 색처럼 짙고도 진한 황토색의 강. 핑강 유역 주변으로는 온갖 레스토랑과 카페가 늘어서 있는데, 몇몇 곳의 리조트도 함께 섞여 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치앙마이의 우기는 보통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이어지지만, 특히 8~9월에는 며칠씩 강한 호우가 이어져 갑작스러운 홍수나 하천 범람이 발생할 수 있다. 강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고를 일이 아니라, 강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런 계절의 변덕에 대응할 수 있는 시설과 체계를 갖춘 곳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37 필라스 하우스(137 Pillars House Chiang Mai)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SLH(Small Luxury Hotels of the World)에 속한 이 오래된 티크하우스에서라면, 치앙마이의 무료함을 조금 더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07:00
늦잠으로 하루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치앙마이에서 알람을 맞추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 적어도 이 아침만큼은. 새벽 7시, 기어코 날 깨워 발코니로 향하게 만든 소리의 주인공은 ‘아시아 코엘(Asian koel)’이다. 태국의 아침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소리의 주인공. 짧게 끊어지듯 ‘쿠-우, 쿠-우’ 되풀이하는 지저귐은 새벽의 정적을 단숨에 지워 버릴 만큼 집요하다. 오죽하면 현지에서는 이 새를 ‘브레인 피버 버드(Brain Fever Bird)’라고도 부른다.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그러니까 사람을 미치게 할 만큼 끈질기게 울어 붙은 별명이다. 137 필라스 하우스에서 맞이한 첫 번째 새벽은 베란다에 앉아 반쯤 감은 눈으로, 지저귐을 인내하는 시간이었다. 이따금 사방으로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선선한 새벽이었다.
09:00
최대한 단출한 오전을 기대했다.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햇살 좋은 자리로 채워 낸 아침. 호텔 조식은 정중앙에 놓인 티크하우스 뒤편에 붙어 있는 별채에서 제공한다. 별채로 향하는 짧은 길, 늦은 밤에 도착한 탓에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검은 티크하우스의 존재감이 문득 새삼스럽다. 137 필라스 하우스는 애초에 호텔을 목적으로 지어진 공간이 아니다.
티크하우스는 137 필라스 하우스의 근간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2002년, 이 호텔의 창립자인 파니다 윙판러트(Panida Wongphanlert)는 치앙마이 어딘가에 별장을 지을 땅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오래 방치되어 목재가 새까맣게 변한 티크 주택 한 채, 현지에서는 이곳을 ‘검은 집’이라 불렀다. 알고 보니 이 주택은 사실 19세기 후반, 치앙마이에서 벌목한 티크 목재를 영국으로 실어 나르던 영국계 보르네오 컴퍼니의 ‘티크우드 저택’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생활했던 곳이라 온기가 머문다. 이 저택에 마지막까지 살았던 이는 스코틀랜드계 태국인 ‘잭 베인’이라는 사람인데, 그가 이 저택을 받치고 있던 기둥의 개수를 세어 보니 137개였다고 한다. 당시 치앙마이 전통 건축에서 기둥의 수는 곧 그 집 주인의 부와 지위를 가늠하는 척도였으니, 137개의 기둥은 그 자체로 이 집이 누렸던 위세의 흔적이었던 셈이다. 가족 별장을 지으려던 계획은 방향을 틀어, 검은 집을 복원한 부티크 호텔이 되었고 그곳에 137 필라스(Pillars, 기둥)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막상 조식당에 앉으니 메뉴판 앞장을 장식한 카오쏘이(Khao Soi)에 자꾸만 눈이 간다. 카오쏘이는 태국 북부, 치앙마이를 대표하는 국수다. 코코넛 밀크가 들어간 진하고도 보드라운 커리 국물. 거기에 바싹 튀긴 면을 촉촉하게 적셔 먹는 그 맛. 단출한 오전의 다짐은, 카오쏘이의 칼칼함에 무너지고야 말았다.
12:00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거대한 가든 월(Garden Wall) 아래 펼쳐진 25m의 수영장. 한참을 물장구치다 보니 수영장 끝으로 반얀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이 간다. 과거 코끼리를 저 고목에 묶어 두었단다. 과거 치앙마이에서 티크를 벌목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코끼리는 벌목된 티크나무를 실어 나르는 아주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다. 137 필라스 하우스는 티크 주택 아래, 피트니스 옆쪽으로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 역사박물관을 마련해두었다. 복원 공사에서 나온 자재와 장비들, 그리고 당시 티크가 왜 그토록 귀한 자원이었는지, ‘티크 왈라’라 불렸던 벌목 노동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큐레이션 해뒀다. 박물관 사방에는 이 집을 지탱했던 옛 기둥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세월에 삭아 끊긴 기둥들을 새 철근 안에 그대로 세워 둔 채 전시해 둔 것이다.
15:00
호텔의 근간인 티크하우스, ‘반 보르네오(Baan Borneo)’로 향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는 하염없이 책이라도 읽을 심산이었다. 티크하우스는 현재 라운지 겸 레스토랑으로 사용 중이다. 자리에 앉아 둘러보니 지붕과 기둥 곳곳에 새겨진 문양들이 예사롭지 않다. 티크는 습기와 해충에 유독 강한 목재라 열대 지역에서도 오래 버틴다는데, 그 말대로 100년이 훌쩍 넘은 목재인데도 결이 여전히 단단하고 정갈했다. 벽면 곳곳에는 치앙마이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걸려, 오래된 목재의 결과 낯선 색채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오래된 것들 사이에 앉아 있다 보면 무심한 안정감에 기대 문득 편해지곤 한다.
18:00
다시 객실. 137 필라스 하우스는 넓은 부지에 단 30개의 스위트 객실로 이루어져 있다. 각 스위트는 높은 천장과 우드 플로어, 치앙마이 북부의 란나 스타일과 유럽풍을 버무린 콜로니얼 스타일로 꾸몄다. 각 객실은 라자 브룩 스위트(Rajah Brooke Suite), 이스트 보르네오 스위트(East Borneo Suite) 등 호텔 역사와 관련이 있는 이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 집을 거쳐 간 누군가의 이름에 기대 투숙하는 것이다. 하루를 다 돌아 다시금 객실 발코니에 앉았다. 치앙마이는 여전히 할 일이 없는 도시다. 그리고 나는, 그 무료함을 사랑하기 위해 다시 이곳에 올 것이고.
■CHIANG MAI MUST VISIT PLACES
A Ride Through Time
어 라이드 스루 타임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했던 모터사이클 브랜드 로열 엔필드 클래식 사이드카를 타고 치앙마이의 오래된 골목과 역사적인 공간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액티비티. 약 90분간 진행되며 137 필라스 하우스 치앙마이에서 신청할 수 있다. 16세기 란나 왕조 시대에 세워진 왓 두앙 디(Wat Duang Dee)를 거쳐 캄 빌리지(Kalm Village) 등을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는 투어.
Kalm Village Chiangmai
캄 빌리지 치앙마이
치앙마이에서 가장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예술(Art), 크래프트(Craft), 문화(Culture)를 주제 삼은 공간. 입장료는 무료. 도서관, 레스토랑, 카페를 비롯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스토어들도 입점해 있다. 요가클래스, 쿠킹클래스도 이곳에서 팝업 형태로 진행되며 전망대에서는 올드타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사원인 왓 체디루앙을 조망할 수 있다.
Maadae Slow Fish Kitchen
마데 슬로 피시
미쉐린 빕 구르망에 올라간 생선 구이집, 시간으로 요리하는 곳이라 마음을 넉넉히 가지고 방문할 것. 현지 어부가 당일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받아 하루 종일 은은한 숯에 구워 낸다. 생선에서 나온 기름이 불에 떨어질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는 생선을 훈연시킨다. 그날그날 들어오는 재료에 따라 메뉴가 조금씩 달라진다.
AKHA AMA Phrasingh
아카 아마 프라싱
치앙마이 올드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 치앙마이 3대 커피로도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 아카 아마 프라싱은 치앙마이 내에서도 여러 지점이 있는데 그중 올드타운에 위치한 분점이 가장 인기가 좋다. 원두를 직접 볶아 내는 로스터리 카페이기 때문이다. 매장 내에서 하이엔드급 에스프레소 머신인 ‘키스반더웨스턴 스피릿’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
글·사진 강화송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