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메이드 인 유럽' 규정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에서 생산하고 부품을 조달한 비중에 따라 보조금과 공공조달 등의 지원 자격을 제한하는 제도다. 중국 자동차 브랜드의 공세에 대응하려는 조치지만, 법안이 확정되기 전부터 중국 업체들은 현지 생산을 서두르고 있다. 중국 브랜드의 유럽 시장 점유율이 8월 11.7%까지 오른 가운데 EU는 중국산 하이브리드 수입 상한까지 추진하고 있다.
중요한 건 규제의 실효성이다. 유럽에서 차체를 조립하는 것만으로는 역내 조달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다. 배터리와 핵심 부품의 공급망까지 유럽으로 옮겨야 한다. 중국 업체가 현지 생산을 늘리는 동안 유럽 업체들도 중국의 개발 방식과 생산 역량을 활용하고 있다. 중국차를 견제하려는 정책과 중국 기업을 협력 상대로 삼는 산업 현장의 현실이 맞물려 있다.
결국 승부는 규정 자체보다 실행력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 EU가 역내 조달 기준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느냐, 중국 업체가 현지 공급망을 얼마나 빨리 구축하느냐, 유럽 업체가 경쟁력 있는 가격의 전기차를 내놓느냐가 관건이다. 10월 12일 개막한 2026 파리모터쇼는 이 세 가지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EU 집행위원회는 3월 4일 산업가속화법(IAA) 법안을 제안했다. 전기차의 역내 조립과 부품 조달 비중을 70% 수준으로 맞추고, 핵심 부품은 3년 안에 50%까지 역내 조달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구매 보조금과 공공조달, 기업 차량 지원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판매 자체를 금지하기보다는 지원 자격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법안은 유럽의회와 EU 이사회의 협상을 거쳐야 한다. 프랑스는 강한 보호 조치를 요구하지만 독일은 중국의 보복을 우려한다. 독일 완성차 업체들이 중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파리모터쇼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합의가 임박했다고 밝혔다.
역내 조달 비중을 계산하는 방식도 쟁점이다. 유럽자동차부품협회(CLEPA)는 개별 부품을 기준으로 비중을 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럽자동차제조업협회(ACEA)는 완성차 단위 평가를 요구한다. 평가 방식에 따라 실제로 적용되는 부품 조달 기준과 규제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유럽 업체들도 기준을 맞추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부품 분석업체 A2MAC1이 로이터의 의뢰로 조사한 결과, 폭스바겐 ID.3의 역내 조달 비중은 가치 기준 86%였지만 르노 5는 51%에 그쳤다. 르노 5에서 중국산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41%였다. 배터리를 제외하면 역내 조달 비중은 약 76%로 올라간다. 유럽 자동차 산업도 배터리 공급망에서는 중국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다.
컨설팅업체 롤랜드버거는 별도의 대책이 없으면 유럽의 역내 조달 비중이 75%에서 40%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조달 비중이 1%포인트 낮아질 때마다 일자리가 약 1500개 줄어들 수 있다는 추산도 내놨다.
중국 업체가 유럽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내수시장 둔화와 미국 시장 진입 제한이 있다. 중국의 자동차 판매는 올해 상반기 20% 감소했다. 미국은 커넥티드카 보안 규정으로 중국 업체의 진입을 제한하고 있다. 유럽은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해외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주요 시장이다.
데이터포스에 따르면 중국 브랜드의 8월 유럽 점유율은 11.7%, 판매량은 9만7639대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른 기관의 집계에서도 중국 업체들의 점유율 상승이 확인된다. 집계 범위와 기준은 다르지만 시장 확대라는 방향은 같다.
성장세를 이끈 차종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다. EU가 2024년 10월 중국산 전기차에 상계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관세 부담이 적은 하이브리드 수출을 늘렸다. 중국 브랜드의 유럽 PHEV 시장 점유율은 2024년 2%에서 올해 상반기 25%로 뛰었다(AM). 중국 세관 통계에서도 EU 대상 하이브리드 수출액이 상반기 75억 달러로 세 배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EU는 이 흐름에도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10월 12일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중국과 하이브리드 수입 제한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중국산 하이브리드 수입을 연간 35만 대로 제한하는 방안이다. 올해 예상 물량인 약 80만 대보다 크게 적다. 상한은 이후 매년 6%씩 늘리는 방안이 제시됐으며, 12월 시행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다만 세부 조건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BYD와 체리, MG는 올해 1~8월 중국 브랜드의 하이브리드 판매 가운데 90%를 차지했다. 수입 상한이 시행되면 이들 업체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중국 업체 입장에서는 수출 물량을 늘리는 것만으로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중국 업체들은 수입 규제가 강화될수록 유럽 현지 생산의 필요성이 커진다고 보고 있다. 창안의 자오페이 사장은 파리모터쇼에서 이번 합의에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수입 상한을 현지 생산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창안은 2027년 초 첫 유럽 생산 차량을 선보이고, 2030년에는 연간 35만 대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업체들도 유럽 생산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샤오펑과 GAC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마그나 공장에서 차량을 생산하고 있다. 체리는 스페인 에브로와 합작법인을 설립해 바르셀로나 옛 닛산 공장에서 2027년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BYD는 헝가리 세게드 공장의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눈여겨볼 부분은 현지 생산을 돕는 파트너들이다. 마그나와 닛산을 비롯해 포드와 스텔란티스 등 기존 자동차 업체들이 중국 브랜드의 생산과 개발에 관여하고 있다. 중국 업체를 견제하려는 유럽의 정책과 이들을 사업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유럽 기업의 현실이 교차한다.
스텔란티스는 중국식 개발 주기를 도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프모터와 협력해 이탈리아에서 생산할 소형 전기차 플랫폼도 이러한 전략의 일부다. 중국 업체를 경계하는 동시에 이들이 앞선 개발 방식과 비용 구조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다만 공장을 세웠다고 규제를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IAA는 생산 장소뿐 아니라 부품 조달 비중도 따진다. 중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는 70%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 샤오펑과 GAC의 그라츠 생산도 초기 보도에서는 반조립(SKD) 방식으로 알려졌다.
중국 업체들이 현지 설계와 연구개발, 부품 공급망까지 구축해야 하는 이유다. 배터리를 비롯한 핵심 부품의 공급선을 현지에서 확보하려면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딜러망과 애프터서비스망을 갖추는 일도 남아 있다. 현지 생산은 시장 진입의 출발점일 뿐, 경쟁력 확보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IAA가 어디까지를 유럽으로 인정할지도 논쟁거리다. EU 회원국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튀르키예와 영국, 모로코가 제외된다. 이들 지역은 이미 유럽 자동차 산업의 생산 및 부품 공급망과 깊이 연결돼 있다.
튀르키예 자동차산업협회(OIB)는 자국 자동차 산업이 EU 일자리 25만 개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자동차제조판매협회(SMMT)도 관련 교역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기존 공급망을 고려하지 않고 적용 범위를 정하면 유럽 업체들까지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범위를 넓히면 중국 업체가 이를 활용할 가능성도 커진다. 튀르키예처럼 상대적으로 에너지와 인건비가 저렴한 지역에 공장을 세워 역내 조달 기준을 충족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공급망을 보호하면서 규정의 허점까지 막아야 하는 만큼 합의가 쉽지 않다.
올해 파리모터쇼에는 중국 브랜드 약 20곳이 참가했다. 2024년의 두 배다. 창안은 네보와 아바타르를 선보였고, 세레스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 아이토는 유럽용 SUV 4종을 공개했다. 리오토도 i6를 통해 유럽 시장에 데뷔했다. 중국 업체들은 저가차 중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프리미엄 시장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유럽 업체들도 가격 경쟁에 나섰다. 스텔란티스는 신차와 콘셉트카를 대거 공개했고, 시트로엥 2CV 콘셉트는 1만5000유로 안팎의 가격을 목표로 개발되고 있다. 폭스바겐도 ID. 폴로를 앞세워 대중형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유럽이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가격 부담이 적은 전기차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판단이다.
프로스트앤설리번의 사르완트 싱은 경쟁의 승부처를 1만5000~3만 유로 가격대로 꼽았다. 중국 업체들이 비용과 개발 기간에서 강점을 보이는 시장이다. 유럽 업체들이 기존 브랜드와 판매망을 갖추고 있어도 가격과 신차 출시 속도에서 밀리면 시장을 지키기 어렵다.
향후 중국 브랜드의 유럽 점유율 전망은 엇갈린다. 이노베프는 볼보를 제외한 중국 브랜드의 점유율이 2030년 12~15%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파리모터쇼에서는 추가 규제가 없다면 2~3년 안에 20%를 넘어설 수 있다는 업계 경영진의 전망도 나왔다(포브스). EU가 어떤 규정을 확정하느냐에 따라 시장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EU가 추진하는 정책은 중국 업체의 시장 진입을 늦추고 유럽 내 생산과 고용을 지키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중국 업체들은 수출 차종과 생산 전략을 바꿔 왔다. 전기차 관세 이후 PHEV 수출이 늘었고, 하이브리드 수입 상한은 현지 생산 전환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앞으로의 중국 업체들은 배터리를 비롯한 부품 공급망을 유럽에 구축해야 한다. 유럽 업체들은 생산비를 낮추고 개발 기간을 단축해 가격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 어느 쪽도 규제나 현지 생산만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는 없다.
관세와 수입 상한은 유럽 업체들에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을 되찾으려면 소비자가 선택할 만한 차를 내놓아야 한다. 특히 1만5000~3만 유로 가격대에서 상품성과 가격을 모두 갖춘 전기차를 얼마나 빠르게 공급하느냐가 중요하다.
'메이드 인 유럽'의 성패도 여기에 달렸다. 유럽에서 만든 차가 규정에 따라 지원 자격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가격과 상품성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중국차의 공세를 막으려면 규정부터 완성해야 하지만, 그 규정이 효과를 내려면 유럽 업체들도 경쟁력 있는 차를 내놓아야 한다.
사진/ 한국자동차기자협회 현지 취재단 제공
글 / 원선웅 (글로벌오토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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