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설립된 플랑 공장은 '도핀'을 시작으로 '르노 4'와 '르노 5', '슈퍼생크', '클리오', '트윙고' 등 르노를 대표하는 모델을 생산해 온 핵심 거점이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자동차 공장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신차 생산이 끝나는 순간 함께 종료된다. 생산 물량이 줄면 설비를 철거하거나 공장을 폐쇄하고, 근로자는 다른 사업장으로 이동한다. 프랑스 플랑쉬르센에 자리한 르노 플랑 리팩토리는 이러한 자동차 공장의 생애주기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 곳이다.
최근 방문한 플랑 리팩토리에서는 더 이상 신차가 생산라인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운행을 마친 중고차와 사고 차량, 전기차 배터리 및 사용한 자동차 부품이 공장 안으로 들어와 다시 상품으로 바뀌고 있었다.
1952년 설립된 플랑 공장은 '도핀'을 시작으로 '르노 4'와 '르노 5', '슈퍼생크', '클리오', '트윙고' 등 르노를 대표하는 모델을 생산해 온 핵심 거점이다. 전기차 '조에' 역시 이곳에서 만들어졌지만 2024년 3월 마지막 조에를 끝으로 70여 년간 이어진 완성차 조립을 종료했다.
르노는 해당 공장의 생산량이 줄어들자 폐쇄하는 대신 차량과 부품, 배터리의 수명을 연장하는 순환경제 거점으로 전환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그리고 이후 르노는 생산량이 줄어든 공장을 폐쇄하는 대신 차량과 부품, 배터리의 수명을 연장하는 순환경제 거점으로 전환했다. 2020년 말 전환 계획을 발표한 플랑 리팩토리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모빌리티 순환경제를 위해 조성된 대규모 산업시설이다.
232헥타르 규모의 부지에는 2025년 말 기준 2212명이 근무한다. 신차 조립 공정은 사라졌지만 기존 생산설비와 숙련 인력은 중고차 재정비와 배터리 수리, 부품 재제조 및 소재 회수 분야에 다시 배치됐다.
공장은 리-트로핏과 리-에너지, 리-사이클, 리-스타트 등 네 가지 영역으로 운영된다. 자동차를 만들고 출고하는 단방향 생산체계에서 벗어나 사용한 차량과 부품을 다시 공장으로 불러들이는 구조다.
중고차 재정비를 담당하는 '리뉴 팩토리'에서는 브랜드와 관계없이 차량을 검사하고 수리한다. 정비와 차체 복원, 도장, 최종 검사뿐 아니라 판매용 사진 촬영까지 한곳에서 처리한다.
해당 공장은 리-트로핏과 리-에너지, 리-사이클, 리-스타트 등 네 가지 영역으로 운영된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개별 정비업체가 차량 한 대씩 수리하는 방식과 달리 신차 공장의 작업 흐름과 표준화 방식을 중고차에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1만 1000㎡ 규모의 시설에서 연간 최대 4만 5000대를 처리할 수 있다.
또한 사고로 손상된 차체와 휠도 폐기하지 않고 복원한다. 이미 특수 장비가 설치된 상용차는 차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연기관 구동계를 전기 구동계로 바꾸는 전동화 개조 작업도 진행한다. 차량 전체를 새로 생산하는 대신 기존 자산의 사용 기간을 늘리는 방식이다.
전기차 시대를 대비한 리-에너지 부문에서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 배터리를 진단하고 수리한다. 플랑 리팩토리는 2025년 약 3000개의 구동용 배터리를 재생했다.
자동차에서 요구하는 성능을 충족하지 못한 배터리는 즉시 폐기하지 않는다. 잔존 성능을 평가한 뒤 고정형 에너지저장장치로 전환한다. 현재 500개 이상의 사용 후 배터리를 연결해 총 15MWh 규모의 전력저장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플랑 리팩토리에선 2025년 기준 약 3000개의 구동용 배터리를 재생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리-사이클 영역에서는 사용한 부품을 신품에 가까운 상태로 재제조한다. 부품 재제조 전문기업 '더 리메이커스'는 엔진과 변속기 등 기계 부품뿐 아니라 메카트로닉스와 전기차 관련 부품까지 사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2025년 재제조한 부품은 약 35만 개로, 대상 품목은 1만 1000종에 달한다. 재제조 부품에는 신품과 동일한 수준의 품질 기준과 보증을 적용해 단순한 중고 부품과 구분한다.
수명이 끝난 차량에서는 폴리프로필렌과 구리, 귀금속 등을 회수한다. 이렇게 확보한 소재는 다시 자동차 부품과 신차 생산에 투입된다. 자동차 한 대를 폐기물로 처리하는 대신 차량과 부품, 원재료의 가치를 단계적으로 회수하는 구조다.
플랑 리팩토리가 환경보호를 위한 비용성 사업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된다. 중고차 재정비와 재제조 부품 판매, 배터리 수리 및 소재 회수는 각각 고객과 시장을 가진 사업으로 운영된다.
르노는 순환경제 사업을 경제적·환경적·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성장 분야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플랑 리팩토리의 구체적인 매출과 영업이익은 별도로 공개하지 않아 현재 수익 규모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르노는 순환경제 사업을 경제적·환경적·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성장 분야로 규정하고 있다(오토헤럴드 김훈기 기자)
사업이 플랑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산업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르노는 튀르키예 부르사와 폴란드 바르샤바, 독일 뒤스부르크, 스페인 세비야와 바야돌리드 등으로 중고차 재정비 체계를 확대하고 있다.
기존 자동차 공장의 인력과 설비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지 않아도 제조 현장에서 축적한 품질관리와 물류, 공정 표준화 기술을 중고차와 부품 재생산에 적용할 수 있다. 리-스타트 영역에서는 순환경제에 필요한 인력을 교육하고 관련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차량 진단과 수리, 해체, 배터리 재사용 및 소재 재활용을 새로운 자동차 산업의 직무로 육성하는 과정이다.
현장에서 바라본 플랑 리팩토리는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 공장을 보존한 장소가 아니었다. 공장의 기능을 신차를 만드는 곳에서 이미 만들어진 자동차의 가치를 다시 살리는 곳으로 바꾼 산업 현장에 가까웠다.
전기차 전환과 생산거점 재편이 빨라지면서 기존 자동차 공장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공통 과제가 됐다. 플랑 리팩토리는 생산이 끝난 공장을 폐쇄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자동차 공장의 두 번째 생애 역시 하나의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훈기 기자/hoon1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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