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면 깨어나는 제주의 시간. 어둑해진 제주의 원도심, 아홉 개의 밤 풍경을 따라 걸었다.
제주시의 심장, 제주 원도심
1980년대 연동과 노형동을 중심으로 한 신제주가 개발되기 전까지, 제주시의 심장은 단연 관덕정과 칠성로, 탑동, 산지천, 그리고 동문시장 일대였다. 현재 '원도심'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주의 오랜 일상과 문화, 역사가 집약된 공간이다. 한동안 소외된 듯했던 원도심이 다시금 신흥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외국인 여행자들 사이에 먹거리와 쇼핑의 성지로 공유되면서부터다. 게다가 제주 여행 좀 해봤다는 여행자들에게도 필수 코스로 통한다. 변화 속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주다움 때문이다.
Course | 원도심 야경 산책 코스
용담해안도로 → 용연구름다리 → 도두봉 → 관덕정 → 동문야시장 → 산지천 → 칠성로 쇼핑거리 → 사라봉 → 산지등대 & 제주항
■Course 01. 제주를 대표하는 드라이브 코스, 용담해안도로
용두암에서 도두봉까지 이어지는 용담해안도로는 공항 북쪽을 지나는 제주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구간이다. 올레길 17코스의 일부인 이곳은 휴양지의 전형적인 풍광을 가지고 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저마다의 뷰를 뽐내는가 하면, 고도를 낮춘 비행기가 그 위를 오간다.
해안도로의 저녁은 도두봉 위로 저문다. 바삐 움직이던 거리는 차분해지고, 느슨함이 찾아든다. 6km의 길을 따라 가로등이 켜지면 일상을 마친 사람들은 쉼을 찾아 어영공원 일대로 모여든다. 수평선을 촘촘히 채운 고깃배의 불빛들과 은은히 흐르는 버스킹 소리까지. 제주의 밤 풍경은 감성으로 채워진다.
해안 산책로를 걷다 보면 제주의 옛 생활상과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용담동의 옛 지명을 간직한 '다끄내포구'는 주민들에게는 밤낚시 터로 통한다. 희미한 조명 아래 낭만을 드리운 사람들, 옛 포구의 정서에 녹아드는 정다운 장면이다.
해안도로 변에는 자정 가까이 영업하는 대형 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특히 제주공항에서는 차량으로 10여 분 거리다. 여행의 첫날 밤, 혹은 뭍으로 돌아가기 직전, 설렘과 여운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가 없다.
■Course 02. 물이 마르지 않는 곳, 용연구름다리
용담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바닷물과 한천의 민물이 만나는 좁은 계곡, '용연'에 닿게 된다. 제주 사람들은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이곳에 비를 관장하는 용이 산다고 믿었다. 실제로 '고대정'이라는 심방(무당)이 짚으로 용을 만들어 제를 올리자 메마른 제주 땅에 단비가 내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계곡의 양쪽에는 기암절벽 사이를 잇는 용연구름다리가 놓여 있다. 이곳은 밤이 되면 오색의 경관 조명으로 더욱 화려해진다.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고요한 수면에 반사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거 조선시대 목사와 선비들은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단다. 다리를 건너다 보면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진다. 밤하늘 아래 내려다보이는 물은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아득한 긴장감까지 두루 교차하는 이유다.
■Course 03. 제주민들이 사랑하는 전망대, 도두봉
이곳은 조선시대에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도원봉수대'가 설치됐던 곳이다. 동쪽의 사라봉, 서쪽의 수산봉과 교신하며 제주 해안을 방어하는 핵심 통신망 역할을 수행했다. 도두봉은 해발 65m의 작고 완만한 오름으로 10여 분이면 족히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의 장점은 높이에 비해 조망권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정상 전망대에 서면, 용담 앞바다는 물론, 제주국제공항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도두봉 야경의 가장 큰 볼거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행기의 이착륙 장면이다. 활주로 위에 새겨진 유도등을 따라 육중한 기계음이 솟고 비행기의 동체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그뿐만 아니다. 고개를 돌리면 용담해안도로에서 탑동까지 빛의 무리가 촘촘하게 펼쳐진다. 가벼운 걸음으로 제주의 전경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도두봉은 주민과 여행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스폿이다.
■Course 04. 덕을 살피는 곳, 관덕정
관덕정은 '활을 쏘는 것은 훌륭한 덕을 살피는 일'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조선시대 활터와 군사훈련장에 주로 사용됐다. 제주 관덕정은 1448년 제주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세운 건물로, 조선시대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다. 1963년 보물 322호로 지정됐다.
관덕정은 제주 역사의 굵직한 순간마다 늘 중심에 있었다. 이재수의 난 당시 300여 명의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었으며, 4·3 사건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1절 집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 최초의 시장이자 현재 민속오일장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밤이 되어 차량 통행이 줄어든 삼도2동 거리, 목조 건축물 하단에서 쏘아 올리는 황색 조명이 관덕정의 기둥과 처마를 뚜렷하게 부각한다.
5월에서 10월 말까지는 야간 개장도 이뤄진다. 게다가 무료 입장이라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이 기간, 야간산책, 버스킹, 특별공연, 수문장 교대식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제주 신화를 소개하는 미디어아트도 열린다.
■Course 05. 제주 최고의 야시장, 동문야시장
동문시장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형성되어 1965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수산시장, 공설시장 등 총 7개의 시장과 12개의 게이트로 구성된 제주 최대 상설시장이다. 밤이 되면 8번 게이트 주변으로 야시장이 열린다. 화려한 간판과 조명 아래, 빈틈없이 늘어선 수십 개의 매대에서는 흑돼지 철판구이, 전복 버터구이, 딱새우 튀김 등 제주의 특산물을 활용한 다채로운 음식들이 쏟아진다.
최근 동문야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외국인 관광객의 폭발적인 증가다. 대만과 태국의 야시장이 넓은 부지에 방대한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면, 동문야시장은 비교적 좁은 전통시장 내에 밀집해 있다. 하지만 에너지만큼은 훨씬 젊고 강렬하게 쏟아진다.
매대마다 퍼포먼스도 화려하다. 토치를 동원한 화려한 불쇼가 벌어질 때면, 관광객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영상과 사진으로 담아낸다. 서툰 한국어로 흑돼지 꼬치를 주문하고 좁은 길가에 서서 음식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에서 제주만의 글로벌한 활기를 느끼게 된다. 경쾌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다양한 언어가 뒤섞이는 동문 야시장, 밤이 깊어 가도 그 열기는 좀처럼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Course 06. 맑은 물이 흐르던 곳, 산지천
한라산에서 발원해 제주항으로 흘러드는 산지천은 오래전 제주도민의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산업화와 함께 심각하게 오염되어 콘크리트로 복개되는 운명을 맞았다. 시멘트 위로 시장, 여관, 식당 등이 들어서며 치열하고 북적이는 삶이 공존하던 이곳은, 2002년 다시 뚜껑을 걷어 내고 자연 하천으로 복원되었다.
밤이 되면 맑은 물길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에 경관등이 켜진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들과 아라리오뮤지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한몸인 양 어우러진다. 또한, 동문야시장에서 산 간식을 들고 수변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까지 정겹게 스며든다. 산지천은 탐라문화광장을 기점으로 임항교까지 600m가량 이어진다. 서부두와 탑동 그리고 칠성로까지, 걷기 동선을 만든다면 원도심의 자취가 물씬한 밤 산책길을 완성할 수 있다.
■Course 07. 제주의 명동, 칠성로 쇼핑거리
제주시 일도1동에 자리한 칠성로는 오랜 시간 도민의 생활과 경제를 지켜 온 거점이다. 이곳의 명칭은 탐라시대에 있었던 '칠성대(七星臺)'에서 기원한다. 제주 건국신화에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을나가 등장한다. 이와 함께 제주에는 북두칠성을 본떠 일곱 곳에 제단을 세워 국운의 융성을 기원했다는 칠성대 전승이 전해지는데, 오늘날 칠성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일대는 한때 '제주의 명동'으로 불렸다. 극장과 다방, 서점 등이 밀집하며 제주민의 주된 만남의 장소로 기능했다. 1990년대 신도심 개발 여파로 잠시 위축기를 겪었으나, 꾸준한 환경 개선을 통해 현대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현재는 '차 없는 보행로'에 아케이드를 설치해 방문객의 편의를 높였고, 인근 동문시장, 중앙지하상가와 함께 구도심 상권의 부흥을 이끄는 중이다. 해가 지면 다양한 브랜드 매장과 편집숍 쇼윈도의 조명이 켜지며 낮과는 다른 생동감이 피어난다. 널찍한 길목 곳곳에서 놓인 조형물 또한 포토존으로 변신한다. 거리의 분위기는 흑돼지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식당들의 널찍한 창을 통해 전해지는 미각적 즐거움까지,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Course 08. 낙조가 아름다운 곳, 사라봉
사라봉은 제주 구도심의 동쪽 경계에 자리한 높이 148m의 오름이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산책로가 잘 정비된 데다 접근성이 좋아 주민들의 생활 휴식처로 사랑을 받아 왔다. 해 질 무렵이 되면 때를 맞춰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예로부터 영주십경 중 하나로 꼽힌 사봉낙조(紗峰落照) 때문이다. 이름마저 '일몰의 붉은 빛이 오름 전체를 덮어, 그 광경이 굽이치는 비단(紗) 같다'고 붙여졌을 정도다.
강렬한 해넘이가 끝나면, 사라봉은 구도심의 밤을 감상하기 위한 최적의 스폿으로 진화한다. 탑동과 칠성로를 비롯한 원도심 일대의 불빛이 점점이 켜지고 먼바다에는 고기잡이 배들의 집어등이 어화(漁火)를 이룬다. 1980년대 후반 바다를 메워 조성한 탑동은 대형 호텔과 마트가 밀집해 한때 원도심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상업 중심지이며, 그 옆의 서부두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횟집 거리가 여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Course 09. 밤을 밝히는 곳, 산지등대 & 제주항
1916년 처음 불을 밝힌 이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제주 앞바다의 뱃길을 안내해 온 시설이다. 현재 가동 중인 등탑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본래의 것은 그 바로 옆에 원형을 유지한 채 서 있다. 높이 18m의 산지등대가 자리한 곳은 해발 약 70m의 사라봉 기슭이다. 덕분에 먼바다는 물론 맑은 날에는 추자도까지 시야에 잡히는 등 그 조망권이 탁월하다.
한편, 11개의 부두로 이루어진 제주항은 1927년 개항 이래 제주의 해상 관문이자 물류의 거점 역할을 해왔다. 낮에는 수많은 여행객과 물류가 오가는 분주한 현장이지만, 해가 지면 여객터미널과 정박한 선박들과 부두의 하역 시설이 일제히 불을 밝히고 웅장한 밤 풍경을 빚어낸다. 산지등대는 그런 제주항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특히, 연 160회 이상 입항하는 대형 크루즈는 야경을 더욱 빛나게 한다.
글·사진 김민수 에디터 강화송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