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마음으로 영주의 안빈낙도 권역을 여행했다.
선비의 고장, 영주 안빈낙도
경북 영주, 소나무 사이로 흐르는 죽계천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낮게 앉은 한옥들. 그 사이에서 걸음을 늦추면 이 도시가 오랫동안 지켜 온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많이 갖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중요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정신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선비의 도시, 영주의 정신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즐긴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궁핍한 삶을 견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질적인 풍요에 휘둘리지 않고 학문을 닦고 수양하며 자신의 뜻을 지키며 살아가는 태도다. 이런 뜻을 담아 영주는 주요 관광지를 하나의 여행길로 엮은 '안빈낙도 권역'을 선보인다. 과거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고 삶의 태도를 가다듬었던 공간에서부터,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 영주의 전통과 문화를 오늘의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까지. 서로 다른 장소를 하나의 가치로 연결한 여행이다. 영주가 제시하는 안빈낙도 여행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변화가 있다. 권역의 이름에는 '가난할 빈(貧)'이 아닌 '손님 빈(賓)'자를 쓴다. 손님을 편안하게 맞이하고 즐겁게 머물게 한다는 의미다.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배려와 품격, 느긋한 여유를 오늘날의 여행 가치로 풀어낸 것이다.
Course
소수서원 → 소수박물관 → 선비세상 → 부석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154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리고 나라의 서적과 토지 등을 지원한 기관을 뜻한다. 소수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물보다 숲이다. 오래된 소나무가 길을 따라 늘어서고, 그 아래로 죽계천이 흐른다. 서원이라고 하면 으레 엄숙한 강학 공간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소수서원은 의외로 자연과 건축의 경계가 부드럽다. 공부하는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며 쉬는 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소수'는 학문을 이어 닦는다는 뜻이다. 2019년에는 소수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서원 안에서는 강학당과 문성공묘, 경렴정, 취한대를 눈여겨볼 만하다. 강학당은 공부를 하던 공간이고, 문성공묘는 안향(安珦, 고려 후기 유학자)을 비롯한 선현(先賢)을 제향(祭享)하는 공간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은 경렴정의 주변이다. 정자에서 죽계천 쪽을 바라보면 바위에 새겨진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경'은 마음을 삼가고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이 지향했던 선비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입구에 남아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통일신라시대 불교 유적)도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흥미롭다. 소수서원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당간지주(돌기둥)는 그 흔적이다. 유교의 서원이 불교 사찰의 옛터에 들어선 셈이다.
소수서원의 역사,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은 소수서원의 역사와 영주 지역에 뿌리내린 유교 문화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서원과 관련된 고문서와 현판, 서책, 유물 등을 통해 조선시대 선비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 준다.
특히 소수박물관에서는 소수서원의 시작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2년 고려 말 성리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세운 데서 출발해, 1543년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1550년 명종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서원이 단순히 공부하는 공간을 넘어 지역의 학문과 교육, 제향의 중심으로 기능했다는 점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 그대로, 선비세상
선비세상은 2022년 문을 연 선비문화 테마파크다.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선비문화를 한복, 한식, 한지, 한글, 한음악 등 일상의 문화로 풀어내고, 전통과 현대적인 콘텐츠를 결합해 다양한 체험을 선보인다. 전시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입고, 만들고, 맛보며 선비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 여행지로도 잘 어울린다.
소수서원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배우고 가르치며 지켜 온 학문과 정신을 만나는 곳이라면, 선비세상은 그 문화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체험하는 공간에 가깝다. 소수서원에서 선비정신의 배경을 이해한 뒤 선비세상을 찾으면, 같은 전통문화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재미가 있다. 역사와 정신을 먼저 보고, 생활과 체험으로 이어 가는 것이다.
선비촌까지 함께 둘러보면 흐름은 더욱 자연스럽다. 소수서원에서 선비의 정신을 만나고, 선비촌에서 옛 생활상을 살펴본 뒤, 선비세상에서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식이다. 영주가 자랑하는 선비문화가 과거의 유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여행 콘텐츠로 이어지는 과정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사찰, 부석사
부석사는 역사와 건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절이다. 이곳은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화엄종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구성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통도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와 함께 한국 불교 산사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 주는 7개 사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부석사의 백미는 '무량수전'이다. 고려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건물 자체의 비례와 구조뿐 아니라 산의 경사를 활용한 배치가 인상적이다. 특히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영주의 풍경이 하나의 거대한 액자처럼 들어온다.
무량수전 내부에는 국보로 지정된 '소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 건축과 불상, 공간 전체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외에도 조사당과 조사당 벽화, 석조 유물 등 중요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소수서원이 사람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장소라면 부석사는 자연과 건축, 신앙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만나 왔는지를 보여 준다. 그래서 영주 여행에서 두 곳을 함께 놓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유교의 공간, 다른 하나는 불교의 공간이지만 둘 다 결국 산과 물, 건축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글·사진 강화송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