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GV90 네오룬.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모티프로 불필요한 장식을 거둬내고 여백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B필러가 없는 거대한 코치도어가 양옆으로 열리자 광활한 공간이 드러났다. 5.2m를 훌쩍 넘는 거대한 차체에 비해 실내는 의외로 간결했다. 시트는 더없이 고급스럽게 마감했지만 운전석은 소박하고 정갈했다. 요란한 장식과 버튼이 사라지고 필요한 기능만 눈에 들어온다.
시각적인 화려함을 앞세우는 롤스로이스 컬리넌이나 벤틀리 벤테이가와는 사뭇 다른 감성이다. 거대한 차체와 압도적인 크기, 화려한 장식을 과시하기보다 탑승객이 차 안에서 느끼는 공간과 여유, 그리고 이동의 질을 럭셔리의 중심에 놓았다.
제네시스가 18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제네시스 수지에서 브랜드 최초의 초대형 플래그십 전동화 SUV 'GV90 네오룬'과 'GV90'을 세계 최초 공개했다. 2024년 공개했던 콘셉트카 네오룬의 디자인과 철학을 제네시스의 플래그십 전용 'eMP 플랫폼'을 통해 현실로 구현한 모델이다.
네오룬에서 GV90로…콘셉트가 현실이 됐다
GV90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2024년 공개된 네오룬을 떠올리는 것이다. 당시 콘셉트카가 보여줬던 거대한 차체와 단순한 곡선, B필러가 보이지 않는 코치도어, 라운지 같은 실내가 실제 도로를 달릴 수 있는 GV90로 돌아왔다.
GV90는 두 가지 얼굴로 나온다. 일반적인 스윙도어를 적용한 GV90와 세계 최초의 독립 개폐형 히든 B필러 코치도어를 적용한 GV90 네오룬이다. 둘은 기본적인 차체와 파워트레인을 공유하지만 사용자의 경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정도로 실내, 특히 2열 구성이 다르다.
GV90가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플래그십이라면 네오룬은 2열의 구성을 완전히 다르게 하고 승객석과 트렁크 공간을 분리해 제네시스가 추구하는 '환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이다.
B 필러가 없는 제네시스 GV90 네오룬의 코치도어 .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GV90 네오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네오룬 아치 게이트다. 앞문과 뒷문이 서로 마주 보며 열리면서 일반적인 SUV에서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승하차 공간이 만들어진다. 가운데를 가로막는 B필러가 사라지면서 실내가 차체 밖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뒷문은 그냥 뒤로 열리는 방식도 아니다. 새롭게 개발한 듀얼 모션 힌지가 적용돼 문이 먼저 바깥쪽으로 슬라이딩한 다음 회전하는 기술로 앞문과 간섭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허정택 제네시스 외장 프로덕트 디자인팀장은 이를 두고 "세계 최초로 구현된 독립 개폐형 히든 B필러 코치도어인 네오룬 아치 게이트는 기존 SUV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개방감과 특별한 환대의 경험을 선사한다"고 설명했다.
B필러가 사라진 만큼 안전성 확보는 더 까다로웠다. 제네시스는 도어 안쪽에 초고강도 듀얼 스틸 빔을 넣고 차체와 도어를 연결해 충돌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탑승 공간을 둘러싼 골격은 기존보다 1.5배 두껍게 만들고 초고강도 스틸 튜브와 구조용 폼을 추가했다. 눈에 보이는 B필러 대신 차체 안쪽에 히든 롤케이지를 만든 셈이다.
초대형 SUV의 약점까지 파고든 안전 기술
GV90에는 총 12개의 에어백이 들어간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세계 최초의 루프 에어백이다. 전복 사고가 발생하면 루프 글라스 전체를 덮어 탑승객이 외부로 이탈하는 것을 막고 루프와 충돌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상해를 줄인다.
동승석에는 듀얼 뎁스 에어백을 적용했고 시트 쿠션 에어백과 3열 커튼 에어백 등도 적용했다. 차체도 단순히 크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알루미늄 주조·압출 골격을 활용해 무게를 줄이면서 강성을 높였고 측면에는 초고강도 스틸을 사용했다.
제네시스 GV90 네오룬의 1열 시트는 180도 회전해 2열 탑승자와 마주볼 수 있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에는 셀 간 열전이를 막는 TRP를 적용했다. 여기에 클라우드 기반 BMS 사전진단 기능을 더해 배터리의 현재 상태뿐 아니라 잠재적인 이상 징후까지 감지한다.
차체 크기는 숫자만으로도 압도적이다. 전장 5285mm, 전폭 2030mm, 축거 3245mm. 특히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가 3m를 훌쩍 넘는다. 국내 경차 한 대의 전장에 가까운 길이다.
이 긴 휠베이스를 바탕으로 플랫 플로어와 슬림 칵핏을 구성했다. 거대한 차체의 공간을 단순히 좌석 수를 늘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탑승객에게 돌아가는 공간으로 풀어냈다.
1회 충전으로 500km... 완벽한 배터리 관리
배터리는 현대차그룹 전기차 가운데 가장 큰 123.5kWh다. GV90 스탠더드 7인승 기준 500km를 달릴 수 있고 350kW급 급속충전기를 이용하면 10%에서 80%까지 22분이면 충전을 마칠 수 있다.
전륜 240kW, 후륜 250kW 모터를 조합한 시스템 출력은 490kW, 최대토크는 800Nm에 달한다. 현대차그룹 전기차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
하지만 GV90의 성격은 숫자만 보고 판단할 차가 아니다. 멀티 챔버 에어 서스펜션과 모노튜브 듀얼 밸브 전자제어 쇽업소버는 큰 차체가 노면을 타는 움직임을 최대한 억제한다. 충격을 받아낼 때는 부드럽게 차체 움직임을 잡아야 할 때는 단단하게 감쇠력을 바꿔 전기차 특유의 이질감, 2열의 승차감을 최적화했다.
제네시스 GV90 네오룬의 2열 암레스트.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여기에 최대 5도 조향하는 능동형 후륜조향을 더했다. 5.2m가 넘는 SUV의 회전 반경을 중형차 수준으로 줄이고 저속에서는 기동성을, 고속에서는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GV90의 주행은 강력한 모터의 힘을 과시하기보다 거대한 차체가 예상보다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데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크다. 800Nm의 힘을 앞세우면서도 탑승객에게는 그 힘이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플래그십 전기 SUV가 추구해야 할 승차감에 가깝다.
여백과 순수함 '달항아리'를 닮은 SUV
GV90의 외관을 보고 있으면 왜 제네시스가 조선 백자를 대표하는 '달항아리'를 이야기하는지 조금씩 이해된다. 거대한 차체인데도 복잡하지 않다. 장식적인 선을 최대한 덜어냈고 앞뒤의 큰 볼륨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연결했다.
허정택 팀장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비례와 곡선만으로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달항아리처럼 GV90는 본질적인 형태, 즉 차량의 실루엣이 하나의 인상으로 남도록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전면은 제네시스 최초의 윙 페이스 MLA 헤드램프가 가로로 길게 펼쳐진다. 레이저 미세가공을 이용한 컷리스 공법으로 램프와 차체 사이의 경계를 줄이고 두 줄의 보석 같은 그래픽을 넣었다.
제네시스 GV90 기본형. 외관상 네오룬과 큰 차이는 없지만 휠 디자인이 다르고 2열 도어를 일반적인 차량과 같은 개폐형이 적용됐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측면은 긴 보닛과 낮게 떨어지는 루프, 두툼한 펜더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덩어리가 핵심이다. 24인치 대형 단조 휠은 차체 크기에 걸맞은 비례를 만든다.
후면으로 돌아가면 더욱 과감하다. 리어 스포일러를 없애고 불필요한 라인을 줄였다. 차체 뒤쪽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곡면으로 만들었다. 면발광 방식의 두 줄 리어램프와 제네시스 레터링만으로 마무리했다. 화려하게 꾸미는 대신 형태 자체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운전석마저 화려하지 않다…‘럭셔리 라운지’의 실체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외관에서 느꼈던 인상이 그대로 이어진다. 대시보드에는 수많은 버튼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지 않다. 시트와 콘솔, 디스플레이가 마치 가구처럼 배치돼 있고 소재와 조명의 질감이 공간을 채운다.
오재호 제네시스 내장 프로덕트 디자인팀장은 "플래그십이라고 해서 고가의 기능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비싼 자동차 이미지를 주지 않도록 했다"며 "럭셔리 라운지 같은 이미지를 주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계기판이 보이지 않는 제네시스 GV90의 실내. 시동버튼이 없고 변속 레버가 운전대 너머에 위치해 있다. 운전자가 탑승하면 3시 방향으로 회전하고 중앙의 디스플레이도 일반적인 크기로 조절된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천연 우드와 리얼 스톤, 울 캐시미어 같은 자연 소재가 리얼 글라스와 알루미늄의 차가운 감성을 눌러준다. 직접 조명을 줄이고 넓은 면적에 간접조명을 사용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소재의 질감이 달라 보이도록 했다.
시트는 고급 가죽으로 마감했고 15개의 공기주머니와 펄스 모듈을 이용한 마사지 기능을 넣었다. 1·2열 콘솔과 도어 트림에는 열선을 넣어 손이 닿는 부분까지 따뜻하게 만들었다.
네오룬의 2열은 더 특별하다. 앞좌석이 180도 회전한다. 정차 상태에서 시트를 돌리면 앞뒤 승객이 서로 마주 앉을 수 있다. 자동차라기보다 움직이는 거실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시동을 걸 필요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GV90에는 시동 버튼이 없다. 도어 핸들을 당기면 전원이 켜지고 도어가 자동으로 열린다. 차에 올라 문을 닫으면 회전형 변속 레버가 움직이고 크리스탈 스피어 통합 컨트롤러가 회전한다.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선택하면 그대로 출발한다.
운전석 앞에는 25인치 HUD가 놓이고 센터 디스플레이는 정차하면 위로 올라온다. 주행 중 23.6인치였던 화면은 정차 후 24.6인치로 확장된다. 플레오스 커넥트와 글레오 AI도 탑재된다. 단순히 명령을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 차량 제어와 정보 검색 등을 대화 방식으로 처리한다.
제네시스 GV90의 실내. 수평형 레이아웃에 사용 빈도가 높은 기능 조작 버튼을 배치하고 과도한 장식을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정갈한 구성을 하고 있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실내의 정숙성도 플래그십답게 챙겼다. 전면 윈드실드부터 비전루프, 테일게이트까지 5mm가 넘는 두께의 차음 유리를 적용하고 차체 곳곳에 흡차음재와 고발포 방음 충진재를 사용했다.
그 위에 뱅앤올룹슨 프리미어 3D 사운드 시스템을 올렸다. 25개 스피커와 7.1.4채널 돌비 애트모스로 음악을 듣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공연장처럼 만들었다.
4인승 이그제큐티브 스위트, 그리고 퍼스트 에디션
최상위 공간은 네오룬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다. 2열에는 천연 우드 베니어 플로어와 온돌에서 영감을 받은 복사열 난방 시스템을 적용했다. 트렁크와 승객 공간 사이에는 컴포트 파티션을 설치해 외부와 적재공간에서 들어오는 소음을 차단한다.
6개 영역으로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스마트 비전 루프, 세미 아닐린 가죽 시트, 2열 타워 콘솔, 냉장고와 테이블까지 갖췄다. 자동차가 이동을 위한 공간에서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바뀌는 구성이다.
GV90 네오룬 퍼스트 에디션은 이런 성격을 더욱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투톤 외장과 24인치 단조 휠, 울 캐시미어 가니쉬, 전용 로고를 적용한 최상위 한정판이다.
제네시스가 만든 ‘한국식 럭셔리’의 시험대
GV90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것은 '크다'는 감정보다 의외로 '차분하다'는 느낌이다. 5285mm의 거대한 차체, 24인치 휠, 490kW의 출력, 123.5kWh 배터리만 놓고 보면 모든 것을 과시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 모습은 정반대다.
문을 열면 공간을 보여주고, 실내에 앉으면 소재를 보여주고, 시동 버튼을 없애고 거대한 센터디스플레이까지 필요한 순간에만 기능을 드러낸다. 달항아리에서 출발한 디자인처럼 덜어내면서도 그 안에 더 많은 것을 담았다.
제네시스 GV90 네오룬의 후면부. 달항아리의 곡면이 가장 잘 표현돼 있다. (오토헤럴드 김흥식 기자)
제네시스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만든 럭셔리카가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상품과 디자인으로 답해왔다. GV90는 그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면서 이제부터는 질문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 모델이다.
전기차 시대의 럭셔리는 더 이상 배기량이나 화려한 장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얼마나 조용한지, 얼마나 편안한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사람을 배려하는지, 그리고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을 얼마나 특별하게 만드는지가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
GV90는 바로 그 지점을 겨냥했다. 윤효준 본부장이 "GV90는 단순히 새로운 자동차의 등장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제네시스가 쌓아온 모든 것을 담아낸 결정체"라고 표현한 이유다.
제네시스의 새로운 10년을 여는 첫 차가 가장 크고 가장 비싼 차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차를 통해 제네시스가 자신만의 럭셔리를 얼마나 명확하게 정의했느냐에 있다. 화려하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한 번 보면 오래 기억되는 방식으로 GV90를 다듬고 또 다듬은 정성이 보였다.
김흥식 기자/reporter@autohera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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