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세서리에 대한 불편한 시선
오디오라는 취미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새로운 이론이나 소재가 나오면서, 기존의 선입견이 불식될 뿐 아니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제품이 나오기도 한다. 이번에 만난 소재는 텅스텐이다. 텅스텐은 매우 비싸고 귀한 물질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동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총이라던가 비행기 날개 등에서 이미 써왔고, 최근에 그 장점을 적극 활용한 오디오용 제품이 나온 것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텅스텐 그루브(Tungsten Grooves). 아예 사명에 텅스텐을 넣을 정도로, 이 소재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사실 많은 액세서리나 케이블 혹은 전원 장치를 보면, 대부분 음을 조이고, 포커스를 명료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배경이 정숙해지고, 해상도와 다이내믹스가 좋아지는 현상도 발견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이런 소재를 잘못 활용하다간, 그야말로 빼빼 마르고 경직된 음을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액세서리나 케이블 등에 불편한 시선을 주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 만난 텅스텐 그루브는 달랐다. 오히려 음이 풍부해지고 또 다채로워졌다. 이렇게 정반대의 길을 가면서도, 여러 면에서 괄목할 만한 음질 향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매우 음악적이었다. 대체 피트(Feet) 하나로 이렇게까지 음이 바뀌는 매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폴 파울러(Paul Fowler)라는 디자이너

폴 파울러가 현재 동사의 창업자이면서 메인 설계자다. 그의 아이디어와 다양한 시도가 드디어 최근에 들어서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약간의 언급은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음악광으로 또 오디오파일로 오랫동안 지내왔으면서도 하이엔드 오디오의 가치나 미덕에 무관심했고, 케이블이나 액세서리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애호가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는데, 어떤 계기로 마음이 바뀌어 드디어 이런 제품까지 만들었는지, 그 여정이 흥미롭지 않은가?
어릴 적 그가 주로 즐겼던 기기는 테크닉스에서 나온 레코드 덱이었다. 여기서 패츠 도미노, 버디 홀리, 엘비스 프레슬리 등 주로 로큰롤 스타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비틀즈나 스톤즈 초기를 포함해서, 이 장르의 음악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녹음 자체가 거칠고, 드럼과 베이스의 임팩트도 엄청나다. 샤우트하는 창법도 골칫거리다. 따라서 이런 음악을 튜닝에 썼다고 하면, 나는 좀 이해가 된다.
엔지니어링 전문가

영국에서 출생해서 쭉 자란 폴은 이런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관심 덕분에 자연스럽게 엔지니어링 쪽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다. 특히, 레이다 관련 장비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전기 쪽뿐 아니라 메커니컬 엔지니어링에도 눈을 뜬다. 이 부분은 후일 텅스텐 그루브의 창업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때 그는 아캄과 B&W의 저가 모델을 쓰고 있었고, 알루미늄으로 된 모니터 스피커를 자작하는 등 오디오 취미는 꾸준했지만, 하이엔드 쪽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냥 부자들의 돈 잔치려니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케이블도 마찬가지. 일종의 착시 효과로 봤다. 하지만 우연히 HDMI와 USB 케이블을 고급으로 바꾸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주변에서 전원 장치도 빌리고, 고가의 케이블도 써보는 등,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니 음이 놀라보게 좋아졌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 즈음 친구를 통해 브리스톨 하이파이 쇼를 방문하면서, 본격적인 하이엔드 오디오의 세계를 맛보게 된다. 아, 여태 내가 이런 것을 몰랐구나. 덕분에 기기 바꿈질과 업그레이드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진동 억제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와인 한 병으로 얻은 수확

폴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대충 CAD로 그려봤다. 이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친구와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고충을 들은 친구가 CAD 소프트웨어를 동원해서 제대로 그려주기로 했다. 그 대가는 와인 한 병. 이래서 제대로 된 설계도가 탄생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만든 시제품을 하이파이 숍 딜러에게 보여줬다. 이건 너무 개러지 스타일이야 핀잔을 받았는데, 실은 그는 개러지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 시기에 만든 제품은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피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토요일 아침 5시, 잠이 오지 않아 다시 연구를 하려고 백열전구를 켠 순간, 뭔가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알다시피 이런 전구엔 텅스텐이 들어간다. 그 소재의 특징과 역할에 눈길이 간 것이다.
텅스텐 그루브의 제품 구조
그래, 센터 챔버에 텅스텐을 넣어보자. 진동 흡수에 적합한 물질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제품이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텅스텐 파우더의 양을 결정한다거나, 실리콘 베어링의 개수를 맞추는 등, 무려 18개월을 소비하고 숱한 리스닝 테스트를 감행한 끝에 드디어 제품이 나왔다. 이 기술은 당연히 특허를 취득했고, 폴은 자신이 소유한 코드의 데이브 DAC과 매킨토시 앰프에 넣어서 기분 좋게 쓰고 있다. 드디어 나는 이 제품을 이번에 리뷰하게 된 것이다.
텅스텐 그루브의 제품 철학

현재 동사에서는 네 종의 피트가 생산되고 있다. 텅스텐 그루브의 제품의 모델명과 각각의 사이즈를 고려했을 때, 직경 높이에 따라서 모델명이 작명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직경 50mm에 높이 33.5mm인 W50-H33이 있고, 그 다음으로 직경 70mm에 높이 33mm의 W70-H33이 있으며, 직경 70mm에 높이 47mm의 W70-H47이 있다. W70-H47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일반 버전과 이를 약간 모디파이해서 스피커용으로 만든 W70-H47 스피커 에디션도 있다. 당연히 전체 구조는 비슷하고, 효과 또한 같다. 이 대목에서 이 회사가 추구하는 제품 철학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 원치 않은 진동을 제거한다.
- 계측을 뛰어넘는 리스닝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 일체 컬러링을 배제한다.
-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한다.
- 설치가 매우 간편하다.
- 평생 쓸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한다.
- 순수한 아날로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 디지털 기기의 경우, 보다 음이 부드럽고 스무스해진다.
- 앰프에서 나는 노이즈를 줄여준다.
- 스피커의 퍼포먼스를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 효과적인 발열을 기대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시청
이번에 만난 기기는 W70-H47. 오로지 소스기에만 투입해서 그 효과를 점검해 봤다. 참고로 본 시청을 위해 스피커는 윌슨의 이베트, 프리와 파워는 MBL의 N11 & N15 Monoblock이고 소스기는 역시 MBL의 N31 CD DAC다. 보다 정확한 점검을 위해 시청에는 CD를 사용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이 조합은 그 자체로 빼어난 완성도를 보여줬다. 오로지 피트 하나만으로 어떤 드라마틱한 효과가 이뤄질지 상상이 가지 않았는데, 직접 비교해 보니 정말 놀랄 지경이었다.
-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에릭 쿤젤(지휘)
- 빌 에반스 ⟨My Foolish Heart⟩
- 퀸 ⟨Bohemian Rhapsody⟩
지휘 Erich Kunzel
오케스트라 Cincinnati Symphony Orchestra
곡 Tchaikovsky: 1812 Overture, Op. 49
앨범 Tchaikovsky: 1812 / Beethoven: Wellington's Victory / Liszt: Battle of the Huns
우선 차이코프스키부터. 본 기를 빼고 들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우선 좀 더 음이 풍부하고, 살집이 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비대해져서 주체 못 할 지경이라는 뜻은 아니다. 스피커와 앰프의 급수가 좀 올라간 듯하다고 할까?
고역은 예리하고, 적극적인 표현을 하며, 중역의 디테일과 흡인력이 높아진다. 저역의 다이내믹스는 깜짝 놀랄 수준이다. 전 대역에 걸쳐 속도도 빠르고, 펀치력도 높아진다. 한 마디로, 음악 그 자체에 에너지와 혼이 담긴 듯하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티스트 Bill Evans Trio
곡 My Foolish Heart
앨범 Waltz For Debby
이어서 빌 에반스. 정말 익히 들어온 연주인데, 본 기를 삽입하자마자 넋을 잃고 말았다. 이전 재생음도 뛰어나고 마치 공연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여기서는 그 느낌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빌리지 뱅가드에서도 무대 바로 앞에서 듣는 듯했다.
손을 뻗으면 빌 에반스와 스콧 라파로가 만져질 것 같다. 브러시로 긁는 스네어는 소름이 돛을 정도로 리얼하고, 피아노의 풍부한 울림은 가슴이 미어질 듯하다. 베이스 라인의 깊은 맛은 이 천재 연주자의 놀라운 솜씨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아티스트 Queen
곡 Bohemian Rhapsody
앨범 Queen Special Edition GOLD I
마지막으로 퀸. 역시 전체적으로 힘이 붙었다. 킥 드럼은 바닥을 두드릴 듯 강력해지고, 일렉트릭 베이스의 라인은 보다 풍부하고 또 적극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전에는 다소 연약한 느낌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당당하고 또 카리스마가 넘친다.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노래하는 기백과 힘이 느껴진다. 스튜디오 녹음이지만, 마치 라이브를 듣는 듯하다. 그만큼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결론
이 작은 피트 몇 개로 놀라운 음질 개선 효과를 느꼈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접근이고, 단순히 진동을 억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음악을 보다 음악답게, 생동감과 실재감이 넘치도록 재생하고 있다. 이런 매직은 요즘처럼 기기 바꿈질이 어려운 경우에도 꼭 맛봐야 할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한 액세서리나 피트로 여기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종학(Johnny Lee)
<저작권자 ⓒ 하이파이클럽(http://www.hificlu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