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를 진행하다 보면 마을과는 동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뜰 안에 있는 작은 밭에서 무언가를 재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몬스터에게 잡아 먹힐 것만 같은 위험천만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 어떻게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농사꾼'이라는 특징을 제외하면 다른 배경을 알 기회가 거의 없는데, 동일 인물은 아닐지라도 일단 농사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이 게임의 주인공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들의 고충을 참고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을 모두 잃은데다 여러 모로 지쳐 쓰러졌는데 웬 여인이 나타나 연유를 묻고 정신을 차려 빵과 물을 부탁했더니 뜬금 없이 괭이와 물뿌리개를 손에 쥐어주며 농사가 천성인 것 같다는 말을 던진 자그마한 사건이 인연이 되어 카르디아 마을 외곽의 아무도 살지 않는 오두막을 얻고 그 앞에 있는 밭을 일궈 생활하게 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시작된다. 농사로 시작해 다른 많은 일을 하게 되고 익숙해지는 정도에 따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하지만 진행의 중심에 농사를 두고 있어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많다. 근처 마을에 있는 상점에서 씨앗을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농사 외에도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수 있고, 몬스터 중 일부를 포획해 전투와 농사 등에 활용할 수 있고, 던전 안에 있는 돌을 부숴 다양한 광물을 캘 수 있고, 모든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 낚시를 할 수 있으며, 오두막을 정상적인 집으로 증축한 뒤에는 다양한 아이템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자잘한 퀘스트에 마음에 드는 여성과 결혼까지 할 수 있다.
다른 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농사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위험 부담 없는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던전 탐험과 다른 활동에 필요한 룬 포인트라는 것을 획득하는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RPG와 달리 캐릭터의 상태는 체력(HP)과 룬 포인트(RP)로 구분되는데 다양한 활동을 통해 캐릭터 레벨을 높이면 체력만 상승할 뿐 RP는 100으로 고정되어 있게 된다. 이 RP는 전투 시 칼을 휘두르는 것뿐만 아니라 괭이질을 하거나 밭에 물을 뿌리는 일, 광물을 캐고 아이템을 만드는 모든 일에 소비된다.
바꿔 말하면,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그리고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을 제외한 모든 활동에 RP가 필요한데 상한치가 고정되어 있으니 이를 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까지 힘들게 뛰어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목욕을 하면 완전히 회복되지만 그만큼 시간이 소요되고, 던전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던전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던전의 최종 몬스터를 물리치려면 나올 수 없다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며칠 밤을 던전 내에서 버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모든 씨앗은 한 번 뿌리면 3x3 블럭의 총 아홉 칸에 뿌려지고, 모두 자라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는 시기가 되면 한 귀퉁이의 한 칸에 작은 룬 조각이 생성된다. 열매를 수확하지 않는다면 장소 이동을 해도 그대로 남아 있고, 룬 조각을 섭취하더라도 수확을 하지 않으면 다음 날 다시 생성된다는 특징이 있어 보스전에 앞서 체력과 RP를 모두 회복하려면 던전 내에서 재배해야 한다. 종류에 따라 수확까지 4일 정도면 충분한 채소가 있는가 하면 길게는 20일 이상 필요한 경우도 있어 이왕이면 돈벌이가 될만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캐릭터 레벨 상승에 필요한 경험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레벨과는 상관이 없는 개별 스킬의 상승을 위해 해당 분류에 포함되는 일들을 꾸준히 하는 것 역시 RP를 절약하는데 도움이 된다. 개별 스킬은 전투 능력, 농경, 장비와 악세사리 제작, 요리, 물약 제조 등 다양한 분류로 되어 있고 개별 스킬의 레벨을 높일수록 각 활동에 소비되는 RP가 서서히 감소하며, 활동을 계속하다 보면 캐릭터 경험치가 늘어나 레벨이 올라가고 전투에 필요한 공격, 방어 등의 보조 능력치도 높아지는 구성이다.
포획한 몬스터는 거의 곧바로 던전 탐험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 게임의 특징 중 하나이다. 몬스터를 따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주인공을 공격하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자동으로 함께 공격을 하는데 몬스터에 따라 서로 다른 능력을 활용하며 능력 중에는 공격도 하면서 주인공의 체력을 회복해주는 것도 있어 여러 몬스터를 포획해 테스트해볼 필요가 있다. 매일 브러시로 손질을 해주면 애정도가 높아지는데 충분히 높아지면 오두막 앞 마당 밭에서 뭔가를 재배하는 경우 수확이라든가 물을 주는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특징이다.
시간 개념 역시 재미 요소로 꼽을 수 있다. 1시간은 1분으로 하루는 24분, 1주일은 6일 단위로 되어 있고 총 4개월인데 각 달은 계절을 의미한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세 시 직전까지 동일한 화면 색상을 유지하지만 오후 세 시가 되면서 붉게 물든 오후 햇살을 경험할 수 있고 오후 여섯 시가 되면 더 늦은 밤과 동일하게 어둑어둑해지지만 배경 음악이 여전히 재생되며, 아홉 시가 넘어가면 배경 음악마저 사라지고 늑대 울음 소리가 들리면서 늦은 시각임을 알려준다.
시간 개념은 단순히 시간대에 따라 또는 계절별로 숲과 나무의 색상 표현이 달라지는 것을 감상하라고 넣어놓은 것은 아니다. 우선 계절별로 심을 수 있는 식물이 따로 존재한다. 동굴은 정황 상 계절이 바뀌더라도 내부 온도가 유지된다는 설정이어서 특정 계절 기후에 맞는 식물을 1년 내내 재배할 수 있지만 집 앞에 있는 밭은 계절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심을 수 있는 식물의 종류에 신경을 써야 한다. 모든 상점은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시간에 맞춰 방문하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다거나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또 늦잠을 자면 다음날 매우 피곤해 RP가 평소의 두 배 소비되기도 한다.
늑대 울음 소리가 들리는 밤 아홉 시 이전에는 상점이 문을 닫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침실에 들어가지는 않는데 9시 이후 침실에 대기 중일 때 대화를 하러 가면 풍부하게 준비된 것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얼마나 많이 친한지 여부에 따라 평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짤막한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도 있다. 애정도가 매우 높아져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캐릭터가 있다면 최종적으로 구해줘야 하는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이때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초반에 얼마나 부지런하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집을 증축하게 되는 시기가 얼마나 빨라지는지 차이가 생기긴 하겠지만 빠르면 게임 상 2개월 조금 늦으면 3개월 정도면 얻을 수 있다. 증축을 하고 나면 보유하고 있어야 하지만 인벤토리에 항상 넣어놓을 수는 없는 아이템을 보관할 큼직한 상자를 구입할 수 있고 요리 시설이라든가 다른 아이템 제작 설비를 갖추게 되어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일종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뭔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더라도 할 일이 많았지만 더 추가되면서 게임에 포함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아이템 조합에 필요한 참고서를 서점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이쯤 되면 돈 걱정은 거의 없는 시기가 되어 원하는 것은 거의 모두 구입할 수 있게 된다. 요리 관련 여덟 권 등 참고서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는데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의 종류와 수를 보면 어마어마한 수준이어서 작은 크기의 롬팩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무기, 실드, 요리, 다양한 액세서리라는 큰 분류 안쪽으로 다양한 무기군, 익히지 않은 음식, 익힌 음식, 반지, 목걸이 등 세부 분류까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로 보나 각 항목의 세부 내역을 보나 뭔가 상당히 많고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은 편이어서 풍부한 컨텐츠에 비해선 복잡함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면 친밀도를 높이는 부분은 상점 주인인 경우 물건을 사고 파는 창을 지속적으로 여닫기만 해도 된다. 특히 초반에 자주 찾을 수 밖에 없는 목욕탕 주인과는 두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최고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터페이스는 편하게 되어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 조금 더 보완됐다면 좋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을 열람하고 선택할 수 있는 퀵벨트 키조합이 따로 준비되어 있고, 마법을 선택할 수 있는 퀵벨트와 다양한 작업에 사용할 도구를 위한 퀵벨트가 따로 준비되어 있어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일은 매우 편하다. 하지만 퀵벨트는 말 그대로 신속하게 선택하라고 만든 것이어서 별다른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아 같은 모양의 아이템을 2개 이상 갖고 있는 경우 그 차이를 구분할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같은 채소의 씨앗을 두 묶음 갖고 있지만 두 씨앗의 레벨이 다른 경우 이것을 퀵벨트에서 구분할 방법은 없다.
모양이 다르다고 해도 종류가 워낙 많아 이름을 모두 외울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뭔가를 주려고 할 때도 인벤토리를 경유하는 게 편리한 경우도 있다. 또 한 슬롯에 최고 9개까지 축적되는데 퀵벨트에서는 수를 분간할 수 없어 한 개만 준다는 것이 9개를 한꺼번에 넘겨주는 불상사도 발생할 수 있다. 도구를 선택해 사용하면 그것이 인벤토리에서 빠져 나와 손으로 이동한다는 개념이 있어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면 인벤토리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도 불편하다.
편리하라고 만들어놓은 커서 박스 역시 개념이 모호해 초반은 물론 중반까지도 몇 가지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어 조금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채소에 물을 주는 경우와 열매를 수확하는 경우 등 커서의 위치와 해야 할 일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씨를 뿌릴 때는 커서의 위치와 상관 없이 캐릭터 위치를 기준으로 하고,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줄 때는 캐릭터의 위치 조차 애매한 경우가 많아 한 번 떨어뜨리면 주워담을 수 없는 아이템을 잃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파스텔로 그린 것 같은 수수하면서 꼼꼼한 배경 그래픽이 시간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표현이라든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물결이 그림 이상의 느낌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묘사한 2D 그래픽도 매우 잘 만들었지만 처음에 보면 조금 어색해 보이던 3D 캐릭터의 동작이 다양한 편인데다 일부 동작은 귀엽기까지 해 그리 흔치 않은 잘 만들어진 DS 게임 그래픽을 경험할 수 있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음악 등 상황에 맞게 바뀌는 BGM도 들을 만 하지만 각 캐릭터의 몇 마디 말에 음성을 담았다는 점이 재미있다.
거의 모든 대사가 텍스트로 표시되지만 처음 만났을 때 하는 대사와 매일 만날 때마다 하는 아침, 점심, 저녁 인사는 음성으로 담았는데 모든 대사를 텍스트로 처리한 게임들과는 달리 짧은 멘트에 목소리와 분위기, 그리고 어투 등 많은 정보가 담겨 있어 텍스트로 처리되는 대사까지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또한 친밀도가 높아지는 경우, 어조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텍스트로 표시되는 대사가 동일하다고 해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이템 제작에 실패하더라도 재료가 그대로 남기 때문에 그만큼 더 편리하고 포획하는 몬스터마다 서로 다른 이름을 직접 입력할 수 있어 주인공 이름과 목장 이름을 짓는 것보다 애착을 갖게 만드는 요소가 많은데다 채소를 재배하는데 사용하는 물뿌리개와 괭이 등의 도구들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약간의 코믹 요소, 아주 가끔 볼 수 있는 오타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잘 되어 있고 말하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캐릭터의 경우 대사 텍스트까지 다르게 표현한 한글화 등의 요소가 게임을 한층 더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조금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대략 게임 내 시간 1주일 단위로 한 번씩 다운되는 증상이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세이브포인트가 가까이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 편이어서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실수로 잊었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두 개의 세이브 슬롯 중 한 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서로 다른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데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두 캐릭터를 병행 진행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밭을 갈 때 보게 되는 것과 동일한 액션이 재현되는 농기구를 이용한 몬스터 퇴치 액션도 가능한 농사꾼 클래스를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경험할 수 있다. 몇 가지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요소를 모두 덮어버리고도 남을만한 요소들이 있어 엔딩 화면에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DS 게임보다 재미가 유지되는 매우 긴 플레이타임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런 이유로 해외에 기발매된 나머지 후속 버전에 대한 발매를 벌써부터 기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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