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디아가 CD플레이어의 제작을 중단하겠다고 한 발표는 중량급 뉴스 중의 하나였다. 이보다 몇 해 앞서 ‘린’에서 똑같은 메시지를 선언했을 때와는 뉘앙스나 영향의 반경이 다르다. 오래 전 LP 제작이 그랬던 것 처럼, CD 산업의 중단이 임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디오파일들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CD 진영의 ‘맹주’라고나 할까? 하이파이 시장에서의 와디아는 CD의 창시자였던 소니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이에 따라 하이엔드 CD플레이어의 기라성들을 천상에 연출한 것도 와디아였고, 그 불꽃의 점멸을 멈추는 동작 또한 와디아에 의해 주도되고 있어 보인다.
디지털 부문에서 와디아가 약 한 세대 가까운 시간에 걸쳐 뿌려놓은 일들은 그 이전까지 그런 게 있는 지 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미증유의 것들도 많았지만(업샘플링, 옵티컬 입출력, 그리고 지터와 가청음질과의 상관관계 등), 무엇보다 시대를 앞서간 고정밀도의 메커니즘과 뛰어난 디자인 감각은 와디아를 알고 모르고에 상관없이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디지털 브랜드들 속에서 CD시대를 격상시킨 와디아의 공로는 여전히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와디아 모제스(Donald Wadia Moses)의 죽음은 ‘와디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CD플레이어의 중단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와디아의 브랜드 칼라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사이클의 반경의 문제일 뿐, 역사의 수레바퀴는 늘 그런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와디아는 출범한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왔음이 사실이다. 우선 제품의 색깔이 실버톤으로 개편되었으며, DAC에 D클래스 증폭단을 추가한 소위 ‘파워 DAC’로 칭하는 앰프 일체형 DAC 들이 출현했다. 와디아 고유의 트랜스포트와 DAC의 미니어춰 처럼 제작된 파일 플레이어와 파워 DAC 조합도 출시되었다. 홍콩 컨벤션 센터 지붕처럼 생긴 ‘올인원’ 제품도 카탈로그를 채워갔다. 마치 스티브 잡스 사후의 애플과도 유사하게 많은 우려가 뒤따르는 일은 불가피했다.
마치 이런 저런 재료를 섞어 조리를 하던 중 생겨난 새로운 스타일처럼 ‘321 Decoding Computer’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새롭다고는 하지만, 80년대 후반 이래의 와디아 사운드의 기조를 담고 있으며 현재의 공기를 호흡하는 트렌디한 컨셉을 품고 있다. 세련미 넘치는 디자인도 이 제품의 관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321’의 정체는 제품의 모습에서 쉽게 드러난다. 로고를 가려놓고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 맞추어보라고 한다해도 그리 크게 쓰여있지도 않은 ‘Decoding Computer’라는 명칭만으로도 우리는 ‘아, 와디아구나…’ 라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플랫한 블랙톤 글라스 마감의 상판은 마치 조리용 인덕션 레인지를 연상시킨다. 심플해 보이지만 꽤나 뛰어난 감각으로 마무리되어 있는 이 제품의 디자인은 복합적인 필터링을 거쳐 최적화된 듯한 인상을 준다. 얼핏 애플의 디자인이 보이기도 하고, 에소테릭의 굴곡도 느껴진다. 물론 기존 와디아 고유의 브랜드 칼라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와디아 고유의 ‘di’로고와 푸른 빛 도트 LED는 물론, 우측에 마름모 배치된 버튼 등이 특히 그렇다. 전면 패널 좌측에 바닥을 향하는 원추형 모양 만곡시켜 깎아낸 호 위에 배치한 와디아 고유의 로고는 상당히 젊고 신선해 보인다. 전원을 올리면 흰 색 로고가 점등하는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우측의 버튼 배치는 와디아의 800 시리즈 플레이어에 사용된 디자인이다.
개인적으로는 321에 와서야 비로소 실버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블랙에서 변경된 직후의 심리적 이질감도 작용했겠지만 실버톤에서는 거친 헤어라인 패턴의 표면이 블랙일 때와는 다르게 강인함이 도드라진다는 인상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21에 사용된 알루미늄 패널 디자인은 매우 고운 입자의 부식처리를 통해 매끈하게 마감되어 있다. 그래서 상단의 글라스패널을 얹은 디자인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어떤 제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주 멋진 밸런스가 생겨나 있다.
본 제품은 24비트/192KHz의 샘플링 레이트로 신호를 처리한다.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상위제품의 경우로 짐작컨대 버브라운사의 DAC 칩을 사용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와디아의 현재 전용 DAC 라인업에는 922이라는 가공할 모노블럭 플래그쉽이 있지만, 일체형으로는 521이 오소독스 와디아의 계보를 유지해온 DAC 라인업의 대표 기종이라 할 수 있는데, 321은 521으로부터 보편적 인터페이스를 지향한 제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제품 칼라가 다르기 때문에 와디아 특유의 탱크탑 섀시와 스파이크를 따라 제작하지 않고 디자인도 그에 따라 트렌디한 모습이 되어 있다.
321은 와디아가 지향하는 신경향을 따라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그에 따른 제품의 설계 또한 지향점이 분명하며, 이에 따라 입출력 인터페이스 또한 심플하다. 출력은 언밸런스와 밸런스 두 가지를 지원하고 있으며, 입력은 옵티컬과 동축이 2개씩, 그리고 USB가 1개 지원된다. 와디아 고유의 BNC나 AES/EBU 등은 생략되어 있다. 전술했듯이 본 제품은 프로용의 심화된 기능과 버라이어티 보다는 범용 인터페이스에 주력한 제품이라는 데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본 제품의 시청은 시청실인 하이파이클럽의 시스템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아발론의 컴파스, 스펙트랄의 메가헤르츠 모노블럭과 레퍼런스 프리, 맥북프로를 소스로 해서 시청했다. 케이블은 모두 헤밍웨이의 신제품(제품명 미정) 프로토타입을 사용했다. 전술했듯이, 본 제품은 오소독스 와디아 사운드의 기조를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 위에 사운드 또한 세련미를 얹어서 제작되었다. 단지 가히 홍수에 비견되는 최근의 군소 DAC 속에서 과련 어떤 세련미가 되어야 하느냐를 놓고 많은 고심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와디아의 선택은 800 시리즈 이전의 25나 15의 스타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무엇보다 가장 반가운 건 선명한 베이스의 이동과 윤곽, 골격의 느낌이 분명한 스테이징의 모습이었다. 아울러, 어느 곡에서나 자연스럽게 뿌려지는 프레즌테이션 또한 만족스러웠다. 앰프의 영향도 의식하면서 시청했지만, 스피디한 진행은 각 대역의 특징을 잘 표현해주었다. 특히 높은 대역에서 에지가 분명하지만 자극성 없이 찰랑대는 미세한 떨림을 유쾌한 느낌으로 잘 들려주었다.
헤레베헤가 지휘하는 바하의 10곡 ‘Qui Sedes’에서는 독창자의 입모양과 각도를 조망하는 느낌이 각별해서 듣는다기 보다 ‘보는 즐거움’이 있다. 솔로 보컬이지만 전후간 레이어링이 모호하다거나 거리감이 애매한 부분이 없이 뛰어난 입체감을 선사한다. 이 구체적인 움직임의 느낌은 동작 뿐만 아니라 독창자의 입김이라도 보일 듯 생생해서 만족스러웠다. 음색에 착색이나 별다른 특이성향이 없는 이 곡 고유의 간결하고 청량한 느낌 그대로를 들려준다.
12곡 ‘Cum Sancto Spiritu’가 시작되자 마자 동시에 여러 입자들의 집합체가 달려드는 느낌이 독특하다. 코러스 파트별로 미세하게 이동하는 추이의 느낌도 유연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 필자가 321의 사운드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코러스 파트가 이동하면서 위치와 음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감소하는 장면인데,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보여주어 만족스러웠다. 스피커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지만, 321 스스로가 기본적으로 사운드의 골격과 음색을 결정하고 음파의 진행 중심에 서서 전체 사운드를 지휘하고 있어 보인다. 낮은 대역에서도 짧고 간결한 임팩트를 잘 처리해서 누구의 소리가 더 큰 지 비교가 가능할 수도 있어 보였다. 이 곡을 듣다가 문득 떠오른 이전의 dCS 드뷔시 시청시의 경우와 비교를 해본다면, 드뷔시에서 느꼈던 단단한 입자와 다이나믹스와 상당히 유사한 소리를 들려준다. 참고로 드뷔시는 필자의 공간에서 시청했었는데, 반면에 음의 윤기는 드뷔시에 비해 다소 덜하게 느껴진다. 음상 또한 드뷔시에 비해 다소 왜소한 편이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미사탱고> 도입부의 약음 팀파니는 존재감이 분명하고 듣기 좋은 느낌을 만들어 준다. 반도네온 울림 끝에서 약음으로 변해가는 떨림도 거의 놓치지 않고 들려준다. 표정이 풍부하다거나 윤택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립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다음 소절 준비를 하는 듯한 표정이 느껴진다. 짧은 순간 이동하는 공기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포착된다. 종종 이런 느낌은 사람의 목소리 등이 이동하는 것과는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무대를 구체적으로 조망시켜 주기 때문이다.
장 미셸 자르의 ‘Equinox 4’는 베이스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이 역동적이다. 중역대 이상으로 가면서 느껴지는 뛰어난 분해력과 다이나믹스는 자극성이라고는 남기지 않는다. 선명하지만 음의 주변에서 미세한 디스토션이 느껴지지 않아서 투명한 느낌을 주고 서로 다른 대역에 걸쳐 악기수가 늘어나도 화려한 인상을 주지 혼탁해지는 경우는 없었다.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는 뭐랄까… 맞춤 옷의 느낌과 유사하다. 외곽선을 허투루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일 없이 접합 부분의 주름이 다 보이는 느낌이다. 구김이 변화하는 움직임과 연주자가 이동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You Look Good To Me’와 같은 곡에서의 스테이징도 정교하고 포커싱이 분명하다. 외곽이 덜 선명하다거나 에너지가 약화되는 일 없이 뛰어난 마이크로 다이나믹스를 들려주어서 미세한 에너지의 변화포착에서도 장점을 발휘한다. 포용력 있는 재생 특성이다.
필자가 가장 깊이 애용한 와디아의 제품은 8+15 의 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한 번 자리를 비운 후 다시 필자의 시청실에 돌아오며 꽤 오랜 동안 품격 높은 CD 재생을 선사했다. 다른 조합을 생각해 보는 게 당연했지만, 일단 결국 와디아가 되어야 했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듯이, 와디아가 CD 플레이어의 생산을 중단하든 안하든 많은 오디오파일들의 시청실에서 와디아는 CD의 가치를 빛나게 해주고 있을 것이다. 꽤 오랜 동안 말이다. CD를 포기한 와디아의 결정을 잠시 고려해본다면, 그리고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성이 시도되고 있는 현재의 와디아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부터의 와디아는 보편화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공공연하게 CD를 포기할 만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세개 가까이 앞서 갔던 전설과도 같은 오리지널 와디아의 라인업은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퍼블릭 라인업을 넓혀갈 것이라는 것 뿐이다.
Decoding Computer 321은 오소독스 와디아와 트랜디 와디아의 중간에 서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된다. 가슴 속엔 와디아의 90년대 정신을, 이성과 생김새는 2014년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이상적인 제품이라고 생각된다. 와디아의 오랜 팬들과 DAC 애호가들 모두가 반길 수 있는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어 보인다. 사운드와 디자인에서 이제껏 가장 세련된 와디아가 생겨난 것이다. 와디아가 본 제품으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을 굳혀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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