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파이와 CD플레이어의 역사 그 자체
광음(光陰)은 백대지과객(百代之過客)이라고 했던가요? 순식간에 흘러간 2월의 마지막 주 1층에 데논 PMA-2020AE 인티앰프와 DCD-2020AE SACD플레이어가 도착했으니 시청실에 전시하는 겸 테스트를 해보라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자택에서 쓰는 턴테이블에 줄곧 데논 DL-103R MC카트리지만 사용해 왔던 필자임에도 어쩌다보니 데논의 디지털 플레이어와는 그리 인연이 깊지 못했습니다. 중증 하이파이 환자인 필자가 식견을 넓혀줄 절호의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습니다.
PMA-2020AE를 박스 채 4층으로 나르자니 거대한 출력트랜스를 달고 있는 진공관 앰프도 아닌 것이 꽤나 무겁습니다. 모양은 또 어떤가? 포장을 푼 앰프는 웬만한 타 기기 두 개를 겹쳐놓은 것만큼이나 펑퍼짐한 사이즈입니다.
요즘은 AVR-X510BT라는 AV리시버로 국내 홈시어터 시장에서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고 있지만 데논은 원래 SP레코드와 축음기를 제작하면서 시작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뿌리는 하이파이에 있습니다.
특히 원칙적으로 분리형 앰프를 만들지 않는 데논이 세대를 거듭하며 버전업시켜온 인티 앰프야말로 데논 하이파이 테크놀로지의 간판스타라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SACD플레이어로 진화한 CD플레이어는 어떤가? 1982년 Sony, Hitachi, Denon이 동시에 세계 최초의 CD플레이어를 발매하면서 역사적인 CD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더구나, 1세대 메이커였던 소니와 히타치(그리고 CD를 소니와 공동 개발했던 필립스까지)가 하이파이 오디오 분야에 손을 떼거나 거리를 둔 지금에 와선 데논의 CD플레이어들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할만 합니니다.
좀더 속내를 살펴보면 사실 디지털 플레이어 분야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관록의 노포가 30여년에 걸쳐 꾸준히 연마하고 숙성한 세월의 결정체가 오늘 살펴볼 DCD-2020AE라고 하니 사소한 물건이라도 내력을 따지길 좋아하는 호사가적인 취향의 필자에겐 여간 흥미를 돋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PMA-2020AE
데논처럼 인티앰프에 올인하는 메이커도 매우 드물듯 합니다. 중단없이 완성도 높은 음을 추구하는 100년 기업의 축적된 노하우가 결집된 모델이 오늘 살펴볼 PMA-2020AE가 아닌가 싶습니다. 국내 판매되는 데논의 인티앰프 중에선 탑엔드 기종이지만 이 위로 PMA-SA11, PMA-SX1, PMA-SX 등이 포진하고 있으니 미들급 인티앰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기의 가장 큰 특징은 UHC-MOS 트랜지스터를 사용하여 싱글 푸쉬풀 방식으로 출력단을 책임지우고 있다는 점일 텐데, 바이폴라 트랜지스터와 MOS-FET의 장점을 통합한 이 최신형 소자라고 합니다. 높은 정격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고 순간 증폭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좌우 대칭의 전원트랜스와 함께 높은 구동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양표에 적시된 내용을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미들급 인티앰프임에도 고해상도의 음원에 대응할 수 있도록 주파수 특성의 상한선이 100kHz에 달한다는 점은 사실상 하이엔드 오디오의 스펙입니다. 전원 트랜스의 진동을 방지하고 차단하기 위한 곳곳의 재진 설계나 고퀄리티의 부품 투입은 물론, 배선제까지 고순도동선을 사용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SACD 플레이어는 어떤가?
DCD-2020AE
데논이 제시한 기술적인 특장점 중에서 두 가지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디지털 신호처리 품질의 제고를 위한 독자적인 AL32 프로세싱이 하나이고, 다음으로 플레이어 작동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진동과 외부에서 유입되는 진동을 극력 억제하려는 노력이 또 하나입니다.
이미 디지털 플레이어의 아킬레스 건이었던 지터 제어에 대한 난제를 극복했던 데논사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레코딩 과정에서 누락된 데이터의 복원 기술로까지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즉 AL32 프로세서는 녹음 과정에서 사라지는 원래의 음을 복원시켜주는 독자적인 알고리즘으로 업컨버전과 샘플링을 수행하는데, 더욱 정교한 데이터 판독을 위해 음원 데이터를 싱글 스테이지로 처리한다고 합니다. 음향 대역의 벗어난 갑작스러운 튐 현상을 걸러내면서도 에일리어싱과 에일리어싱(aliasing) 노이즈나 고대역 응답의 drop과 같은 역효과를 방지하여 이상적인 주파수 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됩니다. 여기에 24비트에 비해 다이나믹스 특성이 좋은 32비트 192kHz DAC이 조합되어 견실한 음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한편, 데논사는 고속으로 회전하는 SACD의 진동을 제어하는 드라이브 메커니즘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알루미늄 다이케스트 트레이와 공명 특성이 다른 재질을 혼합한 S.V.H(Supress vibration, Hybrid Construction) 로더가 그 핵심. 블록화된 회로와 트랜스포머의 배치, 그리고 삼중의 바닥 섀시와 To 섀시, 이중의 사이드 패널과 바닥면에 장착된 B.M.C(Bulk Molding Compound) 재질의 인슐레이터까지 과도하다고 싶을 정도로 제진 설계에 만전을 기했음이 읽혀집니다. 이 대목에서 어째서 구미의 하이엔드 메이커들이 일본의 픽업과 드라이브 메커니즘을 가져다 쓰는지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캐치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설계 기법은 버전업을 거듭한 데논 디지털 플레이어 제작의 축적된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AL32는 가까이는 Advanced AL24 Processing와 AL24 Processing에 멀리는 1993년 발매되었던 DP-S1과 DA-S1에서 선보였던 20bit 보완 기술인 ALPHA Processing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검증된 원천 기술과 메커니즘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 DCD-2020AE의 강점일 것입니다.
아무리 번쩍거리는 칼과 방패, 투구와 흉갑으로 무장했더라도 결국은 소리로서 인정받아야하는 것이 하이파이 강호(江湖)의 불문율입니다.
청음, 즐겨 듣는 음반으로 인상적인 매칭을 가려내다
데논 PMA-2020AE와 DCD-2020AE의 청음을 위해 선택한 주사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테스트 음반이라고 해보아야 특별한 것은 없고 평소 즐겨 들어서 귀에 익숙한 곡이 담긴 CD입니다. 음이 어떻게 바뀌는지 혹은 저음은 자연스러운지, 안 들렸던 음이 들려오거나 고역의 신장감이 느껴지거나 음색이 생생해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뿐 별다른 선곡의 룰은 없습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발레리 게르기에프, 빈필)/ 하이든, 현악4중주 Op.64 Nos.4,5,6(코다이 현악4중주단)/바흐, Concertos(Janine Jansen)/쓰리 테너 콘서트
비교 시청한 스피커는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 패러다임 시그너처 S.8, 자비안 XN 비르투오자, 아우데스 아다지오, 마그낫 퀀텀 757, 마그낫 퀀텀 807이었습니다.
이중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인 기종은 아래의 삼종.
음장의 스케일, 해상력, 밸런스, 저역 재생 등을 포괄하는 음향의 전체적인 완성도 면에선 1. 자비안 XN비르투오자. 2. 아우데스 아다지오 3.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 순서로 서로간의 레벨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동의 적합성 면에서는 1. 아우데스 아다지오 2. 스피디하고 단단한 발놀림을 보여준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 3. 자비안 XN비르투오자의 순이었습니다.
결국 자비안의 레퍼런스기를 제외하곤 미들급 톨보이 스피커와 상성이 좋았습니다.
데논 앰프 SACD플레이어 세트와 궁합이 좋았던 자비안 XN비르투오자, 아우데스 아다지오,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에 대해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간 속에 방사되는 대가의 아우라: XN비르투오자와의 매칭
여간해선 분리형 앰프로도 가지고 있는 잠재력 100% 나온다고 말하기 어려웠던 XN비르투오자와의 조합은 이번 청음 테스트의 최대의 수확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가의 앰프로도 쩔쩔 매기 십상이었던 XN비르투오자를 위한 확실한 맞춤 솔루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상큼하기 그지 없는 소편성 앙상블은 어떤가?
낙소스에서 출반한 하이든의 현악4중주는 이 분야의 Naxos 레코딩으로는 최초로 영국의 주류 음반 평론지인 그라모폰 어워드를 거머진 간판 스타와 같은 음반입니다. 필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 음반으로 오디오리서치, 퀵실버, 다이나코 등 진공관 앰프는 물론이고 비올라 포르테, 크렐 KSA-80B부터, KST-100, KSA-100S, LINN LK-240과 스레숄드 S/200, 쿼드 606, 아우디레 포르테같은 구형 파워앰프들 그리고 덴센의 다양한 라인업과 레가, 마란츠, 오늘의 데논까지 수많은 현행 앰프들로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테스트 할 때마다 고역의 뻣침에서부터 윤기감, 그리고 탄력, 전체 악기군의 밸런스, 음색까지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 음반을 재생할 때 귀하의 시스템에서 촉촉한 윤기와 나긋한 탄력이 느껴지지 않고 건조하거나 네 연주자의 위치를 불분명하게 그려낸다면 분명 어딘가 개선해야할 곳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시금석과 같은 테스트 음원에서 보여준 데논 자비안 트리오의 명인기는 현악앙상블 애호가에겐 실연(實演)이상의 이데아적인 음향 미학을 경험케 했습니다.
필자는 청음을 하다가 일전에 XN비르투오자를 제대로 울려보겠다고 B사의 500W의 대출력 파워앰프를 물렸을 때의 엄처와 같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사운드를 떠올리고 피식 실소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울리는 방법이 있는데 돌아돌아 여기까지 왔구먼.....
일단 이 가격대에 XN비르투오자가 지닌 명인기적인 자질을 온전히 표현해낸 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마치 분리형 기기와 일체형 앰프, 하이파이와 하이엔드, 소출력과 대출력, A클래스와 AB클래스 증폭을 신줏단지처럼 이분법적으로 구별짓는 오디오파일의 선입견에 대한 통렬한 일격이라고 할까.....
‘이 참에 번거로운 기기들 다 쓸어내고 PMA-2020AE와 DCD-2020AE로 정리해 볼까?’ 청음중 이런 충동이 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협주곡, 대편성 관현악, 성악을 막론하고 고역의 신장감이 우수하고 데논 하급기의 부드러움 일면이 강조되는 고집이 없어서 딱 하이 피델리티(고충실도)의 음 바로 그것입니다.
XN비르투오자가 들려주는 대편성 교향곡과 협주곡은 크게는 악기군의 분리도 세밀하게는 독주 패시지의 섬섬옥수(纖纖玉手)와 같은 자비안 특유의 한올한올 구분해내는 탐미적이고 오디오적인 쾌감을 맛보게 해줍니다.
풍부한 배음감과 두둑한 뱃심으로 열창하는 쓰리 테너들이 지닌 각자의 개성이 분명하게 캐치됩니다. 여기선 파바로티의 우렁찬 마초적인 일갈뿐 아니라 호세 카레라스의 로맨틱한 가창과 플레시도 도밍고의 리리코 스핀토적인 낭낭한 목소리에 흠뻑 빠져들게 합니다. 영국 앰프들의 적당히 가릴 데는 가려주는 스타일과는 다른, 말하자면 하이엔드 앰프에 다가서는 자질입니다.
아우데스 아다지오
자비안 XN비르투오자가 사뿐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음이라면 아우데스 아다지오에선 유닛을 완벽하게 장악한 결과로서 윤곽감이 뚜렷한 정연한 사운드가 차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현악4중주에서 상대적으로 2웨이 특유의 중역이 강조되는 협대역감이 느껴지기는 하나 4개의 악기간 하모닉한 앙상블의 정취가 듬뿍 느껴지도록 아기자기하고 위트있게 들려줍니다.
쓰리테너 콘서트 역시 앞서 XN비르투오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파바로티의 힘있는 가창뿐 아니라 호세 카레라스의 로멘틱한 목소리를 안정감있게 그려내었습니다. 특히 고역의 끈끈한 연결감이 좋아서 목소리에 촉촉한 윤기가 감도는 점이 탐탁합니다.
협주곡과 오케스트라에서 음장의 스케일은 허리춤에 오는 작은 키의 톨보이임에도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 이상의 자연스러운 무대를 펼쳐냈습니다.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
데논의 PMA-2020AE와 DCD-2020AE의 완성도 높은 음색은 때때로 까칠해질 수 있는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에 건강한 혈색이 감돌게 한다고 할까? 팝과 재즈에 강점을 보이는 메탈 재질의 트위터와 콘에서도 이렇게도 낭창거리고 이렇게도 윤기가 흐르며 목젖의 떨림이 느껴지는 성악을 들은 것이 언제였던가 싶습니다.
분명 스케일이 큰 것은 아니지만 각 악기군이 명확기 구분되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 역시 5평 정도의 서재나 청취룸에서라면 오히려 무대 위에 가지런히 악기군이 배열되는 장점을 보여줄 것으로 보였습니다. 클라리넷과 같은 목관 악기군에서 금속성의 음을 고집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음색은 데논 원브랜드의 앰프와 소스기기의 역할이 큰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하이든의 현악4중주의 경우 스케일은 아우데스 아다지오와 비슷하지만 다수의 유닛으로 보다 가지런한 밸런스를 실현하면서 현의 강한 탄성을 느끼게 하는 선연한 음을 튕겨내듯 공간에 뿜어내는데, 유미적인 자비안 XN비르투오자의 하늘하늘한 음이니나 끈끈하고 감칠맛나게 표현하는 아다지오와 대조를 보였습니다.
중형 톨보이 스피커와 상성이 우수
이 밖에 패러다임 시그너처 S.8과 마그낫 퀀텀 757, 마그낫 퀀텀 807을 시도해 보았지만 일단 앞서 보여주었던 발성계 고유의 장점이 오롯이 드러나지 않았던 점은 데논 PMA-2020AE가 좀 더 부하가 많이 걸리는 대형기에 비해서는 중형 톨보이 스피커와 상성이 더 우월하는 점을 암시합니다. 단, 자비안 XN 비르투오자는 제외! 해외 오디오쇼에서 데논 프로모션 팀이 B&W의 802 시리즈로 시연을 하고 있다는 점 역시 본기를 가늠하는 하나의 참고 사항이 될듯 합니다.
결론: 세월을 견뎌낸 노포의 간판 앰프와 CD플레이어
자료 검토와 청음을 통해 필자가 PMA-2020AE에 대해 내린 결론은 Advanced UHC-MOS 싱글 푸쉬풀 회로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음악적인 디테일과 파워를 병립한 인티앰프라는 것입니다.
DCD-2020AE와 어울려 스피커의 대역폭이 허용하는 한 위아랫단이 툭 트인 하이엔드적인 대역감을 선사하면서 농(濃)과 담(淡)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견실한 음조를 지녔다고 보여졌습니다.
DCD-2020AE야 듬직한 외장을 고려하면 아주 무겁다고 할 순 없지만 PMA-2020AE는 뚱뚱한 몸매에 걸맞게 한 무게 합니다. 힘은 좋지만 둔중할 것 같지만 아우데스 아다지오나 패러다임 스튜디오 60 V.5와 같은 제 짝은 만나면 발랄한 풋워크와 쭈웃 뻣치는 상큼한 고역으로 동가격대의 베스트 바이임이 틀림없습니다.
필자의 사견으론 미들급에서 현존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앰프와 CD플레이어중 하나라고 단언합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또 너무 흔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잊고 지낼 때가 많다는 점이 오히려 100년 기업 데논에게 가해지는 망각의 형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파이의 도도한 흐름 한 가운데 그루터기처럼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데논에 부러움과 찬사를 담아 갈채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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