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사운드의 산실"

단지 기기적 매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이파이 오디오라는 취미는 그리 오래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오디오는 음악이 아닌 그저 소리가 흘러나오는 재미있는 기기일 뿐이다. 따라서 소리보다는 오디오의 기구적 완성도나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정교한 디테일, 스위스 시계가 풍기는 격조와 소름 돋는 물리적 완성도가 관심사다. 음악을 구성하는 소리의 모양과 디테일에 대한 분별보다는 얼마나 돈을 투자해서 얼마나 멋진 모양과 메카니컬 완성도를 이루었느냐가 포인트다. 반대로 음악을 재생하는 도구로서 오디오의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또 다른 부류는 무엇보다 음질에 치중한다. 기구적 완성도나 디자인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음악을 음악답게 재생해주는 기기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한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전자와 후자를 모두 보아왔다. 하지만 대게 전자는 소리소문 없이 오디오를 팔아버리고 자동차나 시계 또는 자전거 같은 곳으로 취미를 옮겨간다. 음악을 원래 그리 자주 즐기지 않는 공통점이 있고 음질보다는 그저 과시용으로 사 모으는데 치중한다. 금전적 가치가 우선이고 유명 브랜드이면서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어야 했다. 명품거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그것들과 다를 바 없는 남자들의 허세 안에 웅크린 여러 물건 들 중 하나가 오디오다. 대개 많은 내 주변의 음악 애호가는 다르다. 오디오는 무조건 그들이 선호하는 음악 재생에 최적화된 음질을 재생 해줄 수 있어야한다. 또한 음질은 오랫동안 들어도 질리지 않아야하며 더 나아가 계속해서 끝없이 음악을 듣게 만드는 무형의 강력한 동기부여를 만들어 내야한다.

린, 사이러스, 레가, 네임 같은 메이커들은 나뿐만 아니라 음악에 목말랐던 시절 음악 애호가들의 가슴을 웃고 울렸다. 작은 도시락 사이즈에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개인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으며 내밀한 울림을 가졌다. 스피커는 프로악이나 하베스, 스펜더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소박한 북셀프가 제짝처럼 어울려 다녔다. 클래식, 팝, 재즈 등 어떤 장르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과장된 몸짓 없이 진실된 음악을 많은 음악 애호가에게 선물했다. 공통점은 모두 영국 브랜드라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중 레가는 브리티시 사운드의 산실 중 하나였다.

"Rega Osiris"

레가 또한 일군의 영국 브랜드로서 일단 턴테이블에서 그 역사를 시작한다. 이미 이 지면에서 작년 한해 줄기차게 다루었던 턴테이블 중 대다수는 레가 턴테이블이었다. 그런데 레가는 턴테이블만 만들지 않는다. 인티앰프는 물론이며 시디피, DAC 그리고 스피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디오를 만드는 종합 하이파이 메이커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성장했고 그만큼 커다란 매출을 자랑하기도 한다. 소박한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대를 지향하지만 레가가 보급한 오디오 규모는 1970년대부터 축적된 레가에 대한 기술과 신뢰를 대변한다.

하지만 최근 만난 레가 오시리스(Osiris)라는 인티앰프는 그들의 제품치고는 꽤 고가의 가격표를 달고 있다. 하이엔드 메이커에 비하면 여전히 매우 합리적인 가격이지만 그들의 제품 라인업 중에서는 레퍼런스급이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사자의 신으로 숭배된 신의 이름에서 따온 모델명이 독특하다. 전면 디자인은 무척 심플하다. 그러나 미니멀 디자인에 그들의 로고와 볼륨 및 셀렉터와 아로새긴 레가 로고 디자인은 차갑고 날카롭지 않으며 대신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레가의 오랜 전통 그대로다.

오시리스는 기존 레가 제품과 달리 거의 30KG에 육박하는 중량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커다란 토로이달 트랜스포머와 꽉 찬 내부 기판 그리고 무엇보다 알루미늄 빌렛을 CNC 머신으로 정교하게 절삭해 만든 섀시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바라보면 좌/우 섀시를 깎아 멋진 히트싱크를 만들어놓았다. 오시리스는 듀얼 모노 타입 설계로 400VA 용량의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채널당 한 개씩 탑재해 안정적이며 풍부한 전원공급을 꾀하고 있다. 더불어 각 채널당 40,000µF 용량의 커패시터 뱅크를 설계해 스피커에 낮은 로딩 임피던스가 걸려도 너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인 설계는 AB클래스 증폭에 프리단에서 어떤 음질적 관여를 꾀하지 않고 파워앰프에서 증폭한 시그널이 스피커로 바로 입력되도록 하는 구조다. 일단 프리앰프를 보면 알프스 블루 벨벳 포텐셔미터를 사용했으며 패시브 프리앰프 회로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프리앰프에서는 어떤 증폭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신호 경로는 매우 짧아 순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오시리즈의 신호 경로엔 고급 부품들로 채워졌다. 예를 들어 니치콘 그리고 문도르프 Mcap 폴리프로필렌 커패시터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음질적 특색과 스피커 제어 능력의 관건이 되는 출력단은 2백와트급 출력 트랜지스터를 사용해 설계했다. 채널당 총 여덟 개의 산켄(Sanken) 출력 트랜지스터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설계 또한 기존 레가 제품과는 사뭇 다른 구성을 취한다. 기본적으로 푸쉬풀 작동을 기본으로 하지만 캐스코드 증폭을 택해 파워앰프에서 높은 증폭률을 자랑하고 있다. 이로서 오시리스에서 얻은 출력은 8옴 기준 채널당 162와트, 4옴에서는 250와트 정도다.

레가 오시리스는 최근 인티앰프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다. 예를 들어 DAC 나 네트워크 스트리밍 기능 또는 블루투스, 에어플레이 등 그 어떤 디지털 관련 섹션도 탑재하지 않고 있다. 오직 아날로그 입력을 받아 순수하게 증폭, 스피커로 출력하는 앰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입력은 총 네 조의 RCA 입력 그리고 XLR 입력 한 조를 가지며 녹음을 위한 RCA 입/출력단 각 한조를 마련해놓고 있다. 또한 홈시어터 시스템과 연동을 위해 한 조의 바이패스 입력단을 마련해놓고 있다. 최근 복잡해져가는 인티앰프에 비하면 전통적이 노선을 그대로 견지한 모습이다.

"셋업 & 리스닝 테스트"

지나친 비약일 수 있으나 앰프를 영국과 영국제가 아닌 것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평범하고 소박해 보이는 영국의 전통 앰프 메이커들은 일부 현대적인 트렌드에 적응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오서독스 디자인과 음질을 공고히 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의 그것에 비하면 상당히 전통적인 면모를 고수하며 보수적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소박하면서 일면 평범해 보이는 외모 안에 풋풋하고 진한 음의 세계가 시대를 건너 여전히 오늘날의 음악 애호가를 감동시킨다. 기기가 바뀐다고 해서 음악 자체가 변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모는 레가의 레퍼런스 인티앰프 오시리스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편견 속에 자리 잡은 ‘영국 앰프는 영국 스피커와’ 같은 케케묵은 레토릭에서 벗어난 매칭에서도 그렇다. 버클리 알파 레퍼런스 DAC 와 오렌더 W20 뮤직서버 그리고 YG 어쿠스틱스 Hailey를 선택한 것은 레가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내팽개치고 현존 최고 수준의 하이엔드 시스템에서 오시리스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Livingston Taylor - Isn't she lovely

Ink.

리빙스턴 테일러의 ‘Isn’t she lovely’(24/96, Flac)에서 모든 대역과 그 대역을 오가는 음악 신호를 일일이 분해하지 않고 응집력 있게 통합해 유기적으로 운용한다. 비올라 프리/파워앰프에서 바꾸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달콤하게 귀에 감기는 보컬과 기타의 중고역 섹터 표현력이다. 마치 부드러운 크림소스 같은 느낌의 담백한 중역은 고해상도 소스기기의 음색을 매우 부드럽게 어루만져 스피커로 전달해준다.

Kari Bremnes - A lover in Berlin

Norwegian Wood

감미로운 중역과 그 주변 대역은 살짝 솟아 있으며 레가 특유의 보플이 텍스처 표면을 일렁인다. 예를 들어 카리 브렘네스의 ‘A lover in Berlin’(16/44.1, Flac)에서 Hailey는 레가 사운드의 많은 특성을 무척 정확히 드러낸다. 최근 윌슨, 매지코, 비비드와 함께 미국 하이엔드를 대표하는 메이커 중 가장 플랫한 주파수 응답특성을 보여주는 YG 어쿠스틱스다. 마치 악기 소리를 촉촉하게 반죽한 듯 유기적으로 융합해낸 결과는 무척 탄력적인 물리적 촉감으로 귀결된다. 카리 브렘네스의 보컬은 속이 꽉 차오른 듯 육감적으로 들린다.

Rage Against the Machine - Take the power back

Rage Against the Machine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R.A.T.M)의 ‘Take the power back’(16/44.1, Flac)에서는 낮은 중역 근방의 특성에서 약간 솟아 오른 에너지가 포착된다. 이 부분이 집중되면 음악은 무게감이 확장되고 반대로 그 대역 악기가 마스킹되어 흐릿해질 수 있으며 심하면 비대하고 둔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약간 부풀어 오른 더블 베이스는 고해상도의 에지를 선사하진 않지만 적당히 육중하게 Hailey의 허리 부분을 튼튼하게 감싼다. 또한 일사불란하게 기계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느낌은 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질척이는 느낌 없이 레가다운 리듬감을 적당히 살려준다. 정곡을 찌르는 쾌감보다는 약간은 관대한 보편적 증폭의 여운이 편안한 감상을 유도한다.

Hans Zimmer - The Dark Knight Main Thene

The Classics

한스 짐머의 ‘다크 나이트’ 메인 테마는 고역에서 저역까지 모두 광대역으로 소화할 수 있는지 체크하기 좋은 레코딩. 이 곡에서 오시리스의 단점은 물론 장점을 모두 드러낸다. 확실히 오시리스는 광대역에 걸쳐 하늘이 열리는 고역이나 바닥을 찢을 듣한 저역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레가의 여타 제품군처럼 보편적 가청 한계 구간 안에 더 집중한다. 쭉쭉 뻗어 올라가는 초고역의 앰비언스는 쉽게 느끼기 힘들지만 촉촉하고 유연한 중역의 질감은 오직 오시리스만의 것이다. 바닥이 움푹 패일듯한 깊은 저역 하강은 레가의 몫이 아니나 꽤 묵직한 양감과 함께 온도를 머금은 저역이 담백하고 정갈하게 공간을 감싸 안아준다. Hailey와 레가는 상보적 관계 안에서 서로의 약점을 어루만져준다. 더불어 음악을 낱낱이 분해하기 보단 하나의 일체화된 실체 안에 새롭게 구성한다.

"총평" 

골드문트, 다즐, 그리폰, 매킨토시 등 유명 메이커에서 새로운 기함급 인티앰프가 출시되지만 YG 어쿠스틱스의 Hailey는 현지에서 오디오넷이나 CH 프리시전 등의 앰프와 자주 시연된다. 그런데 레가라는 영국 하이파이 메이커를 매칭했을 경우 결과는 상당히 이채롭다. 비올라, 오디오넷, 크렐 같은 앰프와 매칭해 테스트해보았던 나의 기억을 소환해보면 레가는 의외로 선전하고 있다. 두서없이 모든 대역 안에 담긴 모든 것들을 드러내기 바빠서 결과적으로 고해상도, 초스피드에 제멋대로 스피커를 흔드는 앰프가 아니다.

레가 오시리스는 Hailey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영역에 도달시키진 못하지만 적어도 어설픈 하이엔드 앰프들이 자주 겪는 ‘쾌감 이면의 피로감과 그로 인한 질서와 음악성의 퇴색’이 없다. 자칫 산만하고 차가울 수 있는 스피커의 단점을 살포시 감춰주면서 중립적인 밸런스와 코히어런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이엔드 오디오에 대한 기구적 탐욕과 매칭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들린다. 오시리스는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를 닮았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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