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1과 2의 추억
어쿠스틱 에너지라고 하면, 우선 AE1과 2부터 연상할 것이다. 당연하다. 워낙 강력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아직도 그 음과 퍼포먼스가 기억에 생생하다. 저 멀리,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오디오 쇼가 열렸을 때, 화제의 중심은 단연코 와트퍼피와 마크 레빈슨의 조합이었다. 그쪽 부스는 아예 입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긴 대기 라인이 형성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MBL도 나왔고, 던래비도 소개되었다. 아무튼 일거에 빗장이 풀려서, 그동안 사진과 글로만 접했던 명기들을 줄줄이 대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표. 지금이나 예나 얄팍한 호주머니 사정은 애간장만 타게 했다. 현실적인 대안이 뭐 없을까, 하다가 만난 것이 AE1과 2였다. 당시 실제로 여러 장의 CD를 준비해서, 주요 부스마다 죽치고 앉아서 염치불구하고 틀어달라고 했는데, 적어도 그 당시 내 수준에서는 AE1이나 2 정도면 충분했다. 결국 나중에 비록 중고지만 차례로 구입해서 써보기까지 했다. 이때 참 많이 배웠다.
당시의 관념으로는, 무조건 스피커는 크고 무거울수록 좋다, 였다. 당연하다. 스티커는 철저하게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 또 음압(Sound Pressure)이란 개념이 있어서, 같은 대역의 저음이라도 사이즈가 큰 녀석이 더 큰 임팩트를 준다. 오디오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저역의 쾌감을 무시할 수 없는 바, 대형 스피커에 대한 로망은 바로 이런 데 기인한다.
하지만 좀 더 공부해보면, 저역에서도 스피드가 중요하고, 어느 정도의 댐핑도 요구된다. 만일 이런 배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축축 늘어지는 저역만 나올 뿐이고, 당연히 스트레스만 유발한다.
한데 이 제품을 설계했던 필 존스라는 분은 베이스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는 저역에는 이런 스피드와 댐핑이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구경을 줄이되 빠른 반응으로 커버하는 저역을 만든 것이다. 이후 많은 북셀프 스피커들이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동안 어쿠스틱 에너지의 소식이 뜸했다. 필 존스는 나갔고, 회사는 어디론가 팔려가서 PA쪽 관련 일을 했다. 오디오파일로서 참 안쓰러운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영국으로 복귀하고, 매트 스팬들(Matt Spandl)이라는 멋진 디자이너를 영입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서서히 되찾고 있다. 이미 100과 200 시리즈로 충분히 몸을 푼 다음, 드디어 500 시리즈가 2019년에 런칭되었다.
본 기 509는 그 플래그십 모델. 아무튼 국내외 다양한 저널에서 상을 줄 만큼 화제 만점인데, 동사의 역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드디어 AE509로 완전한 복귀를 완성한 것이다. 큰 박수로 환영한다.
AE509의 첫인상
기대를 잔뜩 안고, 본 웹진의 시청실에 들어선 순간, 잠시 당황했다. 어쿠스틱 에너지 특유의 북셀프 스피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스탭을 바라봤더니, 이미 연결을 끝냈다고 했다. 하긴 이미 나직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천천히 둘러보니, 수려한 월넛 마감의 톨보이 스피커가 눈에 들어왔다. 전면 상단에 세 개의 드라이버가 박힌,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수수한 자태. 이게 AE 맞아, 싶었다. 저 화려한 AE2 시그니처의 자태를 회상해 보자. 그를 떠받치는, 마치 그리스의 신전 기둥을 보는 듯한 스탠드는 또 어떤가?
약간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AE의 플래그십 모델인데, 너무 소박하지 않은가 싶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단 설계자가 다르다. 그의 창의성과 의도를 우선 따져봐야 한다. 이렇게 목재 인클로저를 쓰고, 톨보이로 마무리 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외관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일단 음을 들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앰프와 소스기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본 기는 액티브 타입이 아니다. 그냥 통상의 패시브 타입이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앰프가 있지 않을까? 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스피커 사이에, 내가 애용하는 맥북 에어보다 작은 사이즈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웨이버사에서 만든 올인원 제품이라는 설명이 들어왔다. 아니 이걸로 구동이 될까 싶었지만, 이미 정밀한 체크는 마친 상태. 그러니까 이런 조합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작은 물건에 앰프는 물론, DAC와 네트워크 플레이어도 내장되어 있다. 가격도 무척 착하다. 디자인이나 마무리도 나무랄 데가 없다. 맥북 에어와 조합하면, 시각적인 만족감도 상당할 것 같다. 출력은 8옴에 60W. 만일 이 정도로 본 기가 구동이 된다면, 여러모로 추천할만한 조합이 될 것같다.
그래서 대편성부터, 재즈, 보컬 등 여러 장르를 들어봤는데, 정말 훌륭한 재생음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AE는 내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다. 역시.
카본 파이버 드라이버의 등장
이번에 AE가 전가의 보도로 들고 나온 것은 카본 파이버 드라이버다. 물론 이 자체는 새롭지 않다. 이미 오닥스에서 소니에 이르는 여러 메이커들이 제조한 바 있다. 하지만 같은 소재라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매트 스팬들의 번뜩이는 안목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전까지 AE는 금속제 드라이버, 주로 알루미늄 소재의 진동판을 채용해 왔다. 이것은 빠른 스피드와 강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서, AE가 지향하는 설계 철학에 잘 부합되어 왔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굳이 카본 파이버로 바꾼 이유가 뭘까?
제일 먼저 언급할 것이 트위터 부분이다. 즉, 카본 파이버의 콘으로 만들어진 드라이버는 여럿 있지만, 돔 트위터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카본 파이버 돔 트위터가 나옴에 따라, 여러 가지 강점을 갖게 되었다. 설계자는 바로 이 점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트위터와 미드베이스가 같은 소재로 만들어지게 되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이점을 갖게 된다.
첫째는 타임 도메인. 이게 무슨 뜻일까? 같은 재질일 경우, 입력되는 신호에 따라 반응할 때 그 웨이브의 패턴이 일관성을 갖는다. 마치 하나의 드라이버에서 나오는 듯하다. 풀레인지 드라이버를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고역과 중저역 사이의 시간적인 갭이 없다는 뜻도 된다. 2웨이 이상으로 스피커를 설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부분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둘째는 음색. 이 부분은 당연하다. 어떤 진동판이건 아무리 중립적으로 만들어도, 재질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 까다로운 오디오파일의 귀에는 이런 부분이 분명히 포착된다. 오로지 스펙에만 의존해서 재질이 다른 드라이버들을 섞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것대로 특별한 개성이나 음악성을 갖출 수는 있겠지만, 음색의 통일성이란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미흡하다. 본 기는 이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MTM 방식의 장점
본 기를 보면, 상단에 3개의 드라이버가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그 레이아웃이 독특하다. 통상은 트위터가 맨 위에 있고, 그 밑으로 두 개의 미드베이스가 설치된다. 하지만 본 기는 MTM(Midbass-Tweeter-Midbass)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트위터의 위아래에 미드베이스를 위치시키는 것으로, 일종의 가상 동축형이라 하겠다.
즉, 동축형은 아니지만, 거기에 준하는 퍼포먼스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이렇게 미드 베이스를 두 개씩이나 동원하기 때문에, 마치 우퍼를 두 발이나 쓴 것과 같은 특성을 발휘한다. 32Hz까지 내려가는 저역을 얻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셈이다.
사실 MTM 방식은 작은 구경의 드라이버를 동원하면서 프론트 패널의 폭을 좁히고, 그에 따르는 하이 스피드라든가 반사파의 영향을 피하면서, 동시에 풍부한 저역을 얻을 수 있다. 단, 설계 방식이 까다롭기 때문에,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여기서 새삼 본 기의 가치가 주목된다고 하겠다.
드라이버의 구성을 보면, 트위터는 1인치, 25mm 구경으로, 2.9kHz~28kHz까지 양호하게 커버한다. 이전에 사용하던 알루미늄제 진동판보다 가볍고, 강성이 뛰어난 부분이 여기서 잘 발휘되고 있다.
한편 이와 커플링되는 미드베이스는 5인치, 125mm 구경이다. 32Hz~2.9kHz까지 담당하고 있는데, 매우 와이드한 주파수 특성을 보여준다. 거의 풀레인지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대부분의 음성 신호를 모두 커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피커의 심장이 드라이버임을 감안할 때, 매우 고무적인 내용이다. 정말 이것을 솜씨좋게 요리한 것이다.
특히 고전압을 견디는 폴리프로필렌 필름 캐패시터를 사용하고, 공심 인덕터를 동원하는 등 크로스 오버쪽에도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공진 억제의 인클로저
스피커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진동과 공진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메이커마다 전략이 다른데, 이 부분에서 본 기의 기술력이 빛나고 있다. 이것을 동사는 RSC(Resonance Suppression Composite)라고 부르는데, 얇은 MDF 판을 적층하는 구조로 만든다. 그래서 총 18mm의 두께로 완성하는데, 공신의 억제란 점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한편 카본 파이버의 효과도 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워낙 이 진동판이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에너지를 머금은 시간이 무척 짧다. 따라서 인클로저 자체의 댐핑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드라이버를 교제한 부분에 따른 부가 이득이라 해도 좋다.
하단을 보면 매우 튼튼한 스파이크가 보인다. 단단하게 본체를 지탱하고 있으며, 일정하게 본체를 바닥면에서 띄워놓기 때문에, 그에 따른 명료한 저역의 재생은 특필할만하다.
본 기의 마감에는 세 가지 옵션이 제공된다. 블랙, 화이트 그리고 월넛. 당연히 월넛이 제일 인기가 높겠지만, 화이트에 대한 수요도 기대해볼만하다. 특히 여성 고객을 생각하면.
본 기의 감도는 양호한 편에 속한다. 6옴에 89dB. 통상의 인티 앰프로 충분히 구동이 된다. 이번 매칭 앰프의 출력이 60W임에도 훌륭하게 구동된 점을 볼 때, 이 부분은 큰 강점으로 지적할 만하다.
후면 상단에 얇은 슬롯으로 덕트를 대체한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기본적으로는 베이스 리프렉스 타입이지만, 교묘하게 이런 부분에 배치함에 따라, 뒷벽의 영향을 상당히 피했다. 다시 말해, 설치에 있어서 그리 큰 제약은 없다는 뜻이다. 보다 바싹 뒷벽에 붙여서 사용해도 무방하다.
시청평
이번 시청에서 웨이버사의 W슬림 라이트가 워낙 소스와 앰프까지 다 커버했기 때문에, 오로지 타이달로 선곡만 하면 되었다. 참, 편한 세상이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슈베르트 ‘교향곡 8번 1악장’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마일스 데이비스
-사라 본
Carlos Kleiber
Beethoven: Symphony No. 7
우선 베토벤부터. 개인적으로 클라이버를 무척 좋아하는데, 여기서 그 매력이 듬뿍 발휘된다. 유연하고, 리드미컬하며, 단아하다. 음색 자체도 아름답고, 어디 모난 데가 없이 매끈하게 처리한다. 여기서 소출력으로 충분히 대편성을 대음량으로 커버하는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대역이 고르게 반응하고, 밸런스도 뛰어나다. 이 조합으로 오케스트라가 해결되면, 그야말로 감사할 따름이다.
Leonard Bernstein
Schubert: Symphony No. 8
그래서 교향곡을 하나 더 골랐다. 슈베르트의 이 작품은 묘한 매력이 있다. 뭔가 신비하고, 음울하면서 동시에 광폭하다. 그 천변만화의 변화를 번스타인은 교묘하게 포착하는데, 그 솜씨가 일목요연하게 포착된다. 현은 가벼운 깃털처럼 약동하지만, 저역의 펀치력은 무시무시하다. 치고 빠지는 스피드에 연신 탄복한다. 음색은 브리티쉬 사운드 특유의 충실한 중역대와 온화한 느낌이 살아있어서,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Miles Davis - Just Squeeze Me
마일스 데이비스의 작품은 모노 녹음인데, 정말 흡인력이 대단하다. 뮤트 트럼펫의 날카로운 음향이 이쪽으로 쭉 전달되고, 워킹 베이스의 사뿐사뿐한 리듬감은 절로 발 장단을 하게 만든다. 일체 엉키거나 뒤틀림이 없이 정교하게 묘사하면서도, 뮤지션들의 기백과 즐거움을 절대로 잃지 않는다. 이 슬림한 사이즈에서 마치 혼 타입을 듣는 듯한 박력이 재생되고 있다.
Sarah Vaughan - Misty
Sarah Vaughan's Golden Hits
마지막으로 사라 본. 정말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수능란하게 노래한다. 화려한 오케스트라의 반주 위로, 마치 거친 파도를 노련하게 타는 서퍼처럼, 때로는 정박으로 때로는 엇박자로 자기 마음껏 휘젓고 있다. 달콤함과 중후함이 뒤섞여,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역시 보컬에서 본 기는 마지막 정점을 찍고 있다. 드디어 AE가 완전히 복귀한 것이다!
결론
과거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모델이라 본다. 드라이버의 구경은 크지 않지만 충분히 저역이 내려가고, 대편성도 무리 없이 소화한다. 고역의 개방적이면서 중립적인 음색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적합하다. 무엇보다 작은 출력으로도 충분히 제 실력을 발휘하는 점이 중요하다. 진심으로 AE의 복귀를 환영한다.
이 종학(Johnny Lee)
Specific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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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Unit |
125mm carbon fibre cones |
Tweeter |
25mm carbon fibre dome |
Frequency Range |
32Hz - 28kHz (+/- 6dB) |
Sensitivity |
89dB |
Peak SPL |
115dB |
Power Handling |
175w |
Crossover Frequency |
2.9kHz |
Impedance |
6ohms |
Design |
2 way |
Grilles |
Slim, cloth magnetic fit |
Dimensions (WxDxH) |
185 x 260 x 310 mm |
Weight |
22kg (each) |
Acoustic Energy AE509 Speak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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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사 |
샘에너지 |
수입사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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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82-9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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