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에 듣고 나서 필자의 드림 스피커로 점찍은 스피커가 있다. 바로 미국 드보어 피델리티(DeVore Fidelity)의 Orangutan O/96 스피커였다. 2웨이, 2유닛, 베이스 리플렉스 스피커로 무엇보다 10인치 페이퍼 콘 미드 우퍼와 넓은 배플이 눈에 띄는 스피커였다.
요즘 유행하는 것이 메탈 진동판에 메탈 인클로저, 밀폐형 시스템이지만 드보어 피델리티는 이런 것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유닛도 자사 제작이 아니라 노르웨이 시어스(SEAS)에 특주한 것. 이것저것 감안하면 오랑우탄 O/96은 필자가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스피커였다.
하지만 소리가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버렸다. 해상력과 디테일, 그리고 단단하고 풍성한 저역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해상력과 디테일은 좁은 배플에서 비롯되며, 단단하고 풍성한 저역은 메탈 콘에 밀폐형, 그리고 공진을 추방한 인클로저에서만 가능하다는 필자의 짐작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번에는 Orangutan O/93이다. 겉보기로는 1인치 실크 돔 트위터와 10인치 페이퍼 콘 미드 우퍼, 후면의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 등은 O/96과 동일하다. 전용 스탠드가 있었던 O/96과는 달리, 아주 작은 받침목에 올라선 모습과 작아진 인클로저 용적만이 차이라고나 할까. 만약 O/93마저 소리가 괜찮다면, 드보어 피델리티는 진정 2유닛과 넓은 배플 스피커의 연금술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보어 피델리티와 오랑우탄 시리즈
드보어 피델리티는 존 드보어(John DeVore)가 2000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설립한 제작사다. 존 드보어는 드럼 뮤지션 경력 30년, 스피커 제작 경력 20년, 하이파이 업계 종사 경력 18년을 자랑한다. 1980년대부터 하이엔드 오디오 숍에서 일하며 밴드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다. 학교는 미국 명문 RISD(로드 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를 나왔다.
드보어 피델리티가 처음 선보이는 스피커는 Gibbon(기번). 기번은 우리말로 긴팔원숭이인데, 시청기인 오랑우탄도 그렇고, 예전 인기 모델 이름이 나이 많은 고릴라 수컷을 뜻하는 Silverback(실버백)인 것은 사연이 있다. 존 드보어가 존경하는 삼총 어번 드보어(Irven DeVore)가 저명한 영장류 동물학자이자 인류학자였기 때문. 삼촌에 대한 오마주 차원에서 기번, 오랑우탄, 실버백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드보어 피델리티는 2002년에 출시한 Gibbon Eight로 대성공을 거뒀다. 트위터가 미드 우퍼 밑에 있는 2웨이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로, 리뷰용으로 제공됐던 샘플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리뷰어가 리뷰가 끝난 후 모두 구매했기 때문이다. 기번 시리즈는 이후 Gibbon Super Eight, Gibbon 88, Gibon Nine을 거쳐 3웨이 구성의 Gibbon X로 이어졌다.
DeVore Fidelity Gibbon X
기번 시리즈의 성공 이후 본격적으로 소출력 진공관 앰프와 매칭할 수 있도록 감도를 최대한 높여 나온 시리즈가 오랑우탄이었다. 기번 시리즈도 90dB 안팎의 고감도 스피커였는데 이를 더욱 높인 것이다.
오랑우탄 시리즈 중 먼저 나온 것은 2010년 출시작 O/96이었다. 10인치에 달하는 대구경 미드 우퍼와 넓은 배플 디자인이 특징으로, 감도는 모델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96dB. O/96은 2015~2018년 4년 연속 미국 스테레오 파일 추천 기기 목록 A 클래스에 올랐다. 특히 2017년에는 윌슨 오디오의 Alexx와 함께 올해의 오디오 스피커 부문 공동 우승작으로 선정됐다.
DeVore Fidelity Orangutan O/96
이어 2012년에 나온 것이 이번 시청기인 O/93이다. 궤짝형 알텍 Valencia(발렌시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O/93은 유닛 마그넷에 손을 봐서 감도를 93dB로 낮추고 내부 용적도 13% 줄였다. 이에 따라 저역 하한은 O/96의 25Hz에서 30Hz로 높아졌지만 고역 상한(31kHz)이나 공칭 임피던스(10옴)는 동일하다. 전용 목재 스탠드 위에 올려놓은 O/96에 비해 플로어스탠딩 타입으로 바뀐 점도 큰 변화다.
Orangutan O/93 본격 탐구
오랑우탄 O/93은 2웨이, 2유닛, 플로어스탠딩, 베이스 리플렉스 스피커다. 1인치 실크 돔 트위터가 위에 있고, 바로 밑에 10인치 페이퍼 콘 미드우퍼가 있다.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는 뒷면 밑에 2개가 나란히 가로로 나있다. 싱글 와이어링 바인딩 포스트는 그 밑에 있다.
일반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와 비교해보면 키(902mm)에 비해 가로폭(381mm)이 넓은 점이 가장 눈에 띈다. 미드 우퍼 직경이 10인치(254mm)인 것을 감안해도 가로폭이 넓은 스피커인 것이다. 안길이는 254mm. O/96에 비해서는 키는 8mm 작아졌고 가로폭은 79mm 줄어들었으며 안길이는 46mm 짧아졌다.
인클로저 재질은 전면 배플과 나머지 3면이 다르다. 배플은 발트해 연안의 자작나무로 만든 12겹 합판이고, 나머지 측면과 윗면, 후면은 자작나무 합판과 MDF를 섞어 썼다. 마감 역시 배플과 나머지 3면이 다른데, 배플은 마호가니 무늬목, 다른 3면은 피아노 블랙 래커칠을 한 단풍나무 무늬목을 썼다.
1인치 실크 돔 트위터는 존 드보어가 결정한 스펙에 따라 시어스가 만든다. 트위터 둘레의 웨이브 가이드가 비교적 넓고 깊은 것은 이 웨이브 가이드가 혼 역할을 하게끔 설계됐기 때문. 후면파를 소멸시키기 위해 트위터 뒤쪽이 별도 챔버에 수납된 것도 특징이다.
10인치 미드 우퍼 역시 시어스에서 만든다. 물론 설계 자체는 존 드어보가 했다. 서라운드(엣지) 재질은 공개가 안됐지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상당히 탄력적이다. “폼 서라운드처럼 작동하면서도 고무 서라운드처럼 내구성이 좋다”라는 설명이다.
미드 우퍼의 경우 같은 10인치 직경에 페이퍼 콘 진동판이지만 모터 시스템(마그넷 + 보이스 코일)에서 O/96과 차이를 보인다. 보이스 코일은 보다 짧아지고 마그넷 역시 보다 작은 것을 투입했다. 존 드보어에 따르면 감도가 93dB로 떨어진 것은 이 모터 시스템 변화가 가장 크다고 한다.
스피커로서 설계 디자인을 짚어보면 역시 ‘넓은 배플'이 가장 눈길을 끈다. 존 드보어 인터뷰 등을 종합해보면 이 넓은 배플의 존재 이유는 스텝 리스폰스(step response)를 최소화하고 감도(efficiency)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
“The baffle width accommodates the larger driver and pushes the step response frequency lower, increasing the efficiency of the system in the room.” (배플 폭은 보다 큰 드라이버를 장착할 수 있고 스텝 리스폰스 주파수를 더욱 낮출 수 있다. 오디오 시스템의 감도도 높아진다)
존 드보어는 심지어 “좁은 배플이 사운드를 질식시킨다” (A narrow front baffle can stifle the sound)라고까지 말한다.
스텝 리스폰스는 고역과 저역의 시간 차이와 에너지 차이에 의해 응답 특성이 특정 주파수에서 딥(dip), 즉 푹 꺼지는 현상이다. 특히 저역의 경우 후면파에 의한 에너지 감소 현상(위상이 서로 정반대인 정면파와 반사파가 중첩)이 골칫거리였다. 무한 배플이 등장한 것도 이 후면파가 되돌아오는 것을 최대한 넓은 배플로 막기 위한 것이다.
존 드보어는 “코너형이나 벽 로딩 스피커처럼 스텝 리스폰스를 최소화하면서도 현실적인 설치가 용이하도록 넓은 배플을 선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배플의 넓이의 높이, 안길이는 10인치 미드우퍼의 물성에 맞춰 최적화했다는 설명도 잇따른다.
한편 트위터와 미드 우퍼가 바싹 붙어있고 두 유닛이 배플 위쪽에 몰려 있는 것은 회절(diffraction) 저감을 위해서다. 잘 아시는 대로 회절은 유닛과 인클로저 가장자리의 거리가 동일할 때 가장 크게 발생한다.
시청
수입사인 씨웍스의 아날로그라운지 시청실에서 이뤄진 시청에는 크로노스의 Spartan 턴테이블과 Reference Phono 포노 앰프, 퇴레스의 Dual Function 프리앰프와 845 Mono 모노 블록 파워앰프를 동원했다. 845 Mono는 직열3극관 845를 싱글로 써서 20W 출력을 낸다.
Ernest Ansermet, Orchestra of The Royal Opera House & Covent Garden
Andante mosso from La Boutique Fantasque
The Royal Ballet Gala Performance
외관만 놓고 봤을 때 O/93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은 O/96에 비해 수수하고 평범하다는 것. O/96은 전용 스탠드 위에 올라선 자태부터가 독보적이었지만, O/93은 넓은 배플을 제외하고는 일반 플로어스탠딩 스피커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O/96의 소릿결을 유지하면서도 감도와 가격을 낮춘 것이 O/93”이라는 제작사 설명도 그리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첫 음이 흘러나왔다. 소스 기기도, 파워앰프도 지난해 O/96을 들었을 때와 동일했던 터라 차이가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이번 O/93이 O/96에 비해 좀 더 현대적인 사운드를 낸다는 것. '현대적'이라는 의미는 노이즈가 증발되었고, 촉감이 촉촉하며, 무대 위 공간이 활짝 열렸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음에 그림자나 애매하고 흐릿한 구석이 없는 점은 O/96과 비슷했다.
이는 2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O/96에 비해 감도와 배플 면적이 줄어든 탓이다.
우선 O/96의 96dB라는 어마어마한 감도는 스피커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공산이 크다. 높은 감도는 앰프의 소리를 보다 예민하게 반영하기도 하지만, 유닛과 인클로저, 네트워크 회로의 특성이 거의 투명하게 드러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이와는 반대로, 예를 들어 83dB 같은 저감도 스피커는 앰프 출력과 드라이빙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O/93의 93dB 역시 현대 스피커로는 매우 높은 감도이지만, O/96에 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숨길 수 있다.
다음은 줄어든 배플 면적이다. 현대 스피커들이 유닛을 가까스로 얹힐 수 있을 만큼 배플이 좁아진 이유는
- 저역의 긴 파장이
- 배플에 부딪혀
- 음을 왜곡시키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드보어 피델리티가 주장하는 넓은 배플의 최대 장점이 이 배플 반사로 인한 '음의 에너지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O/93은 그 줄어든 배플 면적만큼 반사 음의 폐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Igor Oistrach
Paginini: Introduction And Variations On The G String, On The Theme From Rossini Opera "Moses"
하지만 이 같은 차이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미미했다. 이 같은 차이보다는 오랑우탄 시리즈의 특성, 즉 93dB라는 높은 감도와 넓은 배플, 그리고 혼 타입의 트위터 웨이브 가이드와 10인치 페이퍼 콘 미드우퍼가 빚어내는 사운드 시그니처가 더 강력했다. 그것은 바로 '힘'과 '톤 밸런스', 그리고 '섬세함'이었다.
오이스트라흐의 바이올린 소리는 평소 일반 플로어스탠딩 스피커로 들을 때보다 좀 더 빽빽하게 들렸고, 악기의 울림통 소리는 보다 묵직하게 전해졌다. 덕분에 바이올린의 목향이 더 잘 느껴진다. 무기질의 음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 점도 특징. O/96도 그렇고, 이번 O/93도 그렇고, 저 외모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선명하고 해상력이 가득한 음이 쉬지 않고 나온다. 깨끗하고 잡것이 없는 특급 청정수와도 같은 음이다.
이 밖에 음상이 비대하지 않고 특정 대역에 모가 나지 않은 것은 웰메이드 2웨이 스피커의 위대한 장점. 만약 혼 타입의 깊숙하고 넓은 트위터 웨이브 가이드가 없었고, 미드 우퍼가 페이퍼 진동판 대신 플라스틱이나 알루미늄 계열 진동판을 채택했더라면 이런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Erik Truffaz - Arroyo
The Mask
현대 재즈곡을 재생하자 "이게 뭐야? 재즈 스피커잖아!"라고 내뱉었을 만큼 스피커 성격이 확 변한다. 천연덕스럽게 클래식 스피커의 가면을 벗어던진 것이다. 점점 그 존재를 드러내는 베이스의 음이 육중하다. 재즈 캄보가 지금 필자 앞에서 몰아지경에 빠져 연주하는 풍경이 쉽게 그려진다.
사운드의 또 하나 특징은 사운드 스테이지의 위 공간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것. 분명히 트위터 높이가 1m 정도밖에 안되는 스피커인데 전체 화면, 그중에서 위 화면을 아주 넓게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존 드보어가 증명하고 싶었던 '넓은 배플을 이용한 음의 에너지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증폭의 리니어리티가 좋은 진공관을 포노, 프리, 파워 앰프에 투입하고 이를 감도가 높은 스피커로 연주하니 이런 음과 무대가 나오는가 싶다.
Rage Against The Machine - Take The Power Back
Rage Against The Machine
돌덩이 저역이 작렬한다. 지금이 과연 20W + 페이퍼 콘 조합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메탈 유닛에 밀폐형 뺨치는 음의 촉감이다. 예를 들어 YG 어쿠스틱스의 Hailey 2.2 같은 스피커라면 좀 더 미끈하고 입자감이 고운 소리를 들려줬겠지만, 지금 오랑우탄 O/93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음이 솟구친다. 보컬의 키가 높게 그려지는 점도 마음에 든다. 각 악기의 마이크로 다이내믹스도 잘 구현되고 음의 뒤끝이 상당히 개운하다. 딕션도 선명하고 깨끗하다.
총평
오랑우탄 O/93을 시청하던 날, 비가 왔다. 도어즈의 'Riders On The Storm'을 재생하자 빗소리의 사실감이 장난이 아니다. 음의 에너지감과 연주 공간의 열기, 현장을 떠도는 먼지와 공기감까지 싹쓸이해서 들려준다. 정신이 번쩍 날 만큼 리얼하고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게 이 스피커의 사운드 시그니처다. 오승환의 돌직구를 맞으면 이럴까, 싶다. 거의 2.1채널 스피커를 듣는 듯했다.
굳이 O/96과 비교하자면, O/93은 물린 앰프 성향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준다. O/96이 어느 앰프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색채를 유지하는 스피커라면, O/93은 상대적으로 앰프의 성향이 재생음에 묻어난다. 이날 시청에서 845 출력관의 존재가 몇 번이나 스쳐간 이유다. 원시적인 에너지와 리듬감, 이런 것. 요즘 나오는 스피커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스피커를 찾는 애호가라면 꼭 들어보시길 권유 드린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
Specification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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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quency Response | 30Hz-31kHz |
Sensitivity | 93 dB/W/M |
Impedance | 10 ohms |
Dimensions | 10"d x 15"w x 35.5"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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