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그리고 축소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일부를 담는다. 디지털은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으로서 발전해왔고 그래서 그 효용성은 지금에 와서 엄청나게 많다. 효율이 목표라면 아날로그는 너무 불편한 것이다. 당장 스마트폰이 사라지고 아날로그 TV를 사용해야한다고 생각해보라. 사진을 찍으려면 크던 작던 모든 사람들이 별도의 카메라를 사야하고 인터넷에서 글 한 편이라도 보려면 노트북 하나 즈음은 필수다. 이 외에 시계와 계산기 등등 수 KG의 여러 기기를 단 몇 백 그램의 스마트폰이 대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일부만 담을 수 있을 뿐 모두 정확히 현실을 대체할 순 없다. 작게 그리고 편리하게 정보를 주고받고 공유하며 사람의 일을 일부 대체할 뿐이다. 태생적으로 축소 지향의 산물이므로 그 장, 단점을 잘 알고 활용하면 좋을 뿐이다. 음향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이 편리할 뿐더러 현재는 굉장한 성능의 소스기기와 앰프들이 나오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기술로만 만들어진 기기들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도 디지털 소스기기와 아날로그 소스기기를 두, 세 조씩 가지고 있지만 아날로그 쪽에 더 무게를 두는 이유. 과거 아날로그 녹음의 경우 아날로그 매체로 듣는 게 정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런 경향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색스는 그의 저서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종이와 필름, 보드게임은 물론 여러 아날로그 시대의 물건들 사이에서 제일 첫 번째 주제로 레코드를 들어 아날로그의 과거와 현재를 세계의 변화를 통찰하고 있다. 제 아무리 디지털이 발전해도 그 아날로그의 기반이 없는 디지털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일 뿐이다. 축소 지향의 디지털에 맹신을 갖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마치 신기루처럼,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으니까.
이상한 스피커
몇 년 전 만난 드보어(DeVore) 피델리티의 스피커들은 하나같이 이상했다. 디지털 음원을 들어도 마치 엘피 같은 소리를 냈고 엘피로 들으면 그 엘피가 녹음되었던 당시로 시청자를 회귀시켜줄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모두 앞만 보고 최신, 혁신을 부르짖는 시대에 이 스피커들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스피커다. 물론 여전히 전 세계 아날로그 마니아들은 과거의 유물을 보물처럼 전시하고 음악을 즐긴다. 탄노이 오토그라프나 GRF 또는 JBL의 하츠필드, EV 파트리션 혹은 알텍 발렌시아 같은 모델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산다. 이미 20세기 중반 벨 에포크 시대는 끝났다고 믿는다. 심지어 디지털 녹음은 물론 포맷까지 CD로 변화된 이후 음악은 끝났다고 믿는 그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로 엘피를 듣고 간혹 카세트 테이프이나 릴 테이프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엘피는 현재 1~20대에게 가장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는 거의 유일한 아날로그 피지컬 포맷이 되었다. 알텍과 JBL, 탄노이만 붙잡고 있을 순 없는 노릇. 그러나 아날로그 사운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음악에 대한 통찰 가득한 엔지니어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 아날로그의 끝을 붙잡고 수퍼 아날로그 사운드를 직조해내고 있다. 하베스, 스펜더 등은 그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리빙보이스, 오디오노트, G.I.P, 오션 웨이 오디오 등 비범한 메이커들이 산재해있다. 드보어 피델리티는 바로 그 일군의 그룹 중에서도 비교적 최근 들어 떠오른 브랜드다.
오랑우탄 O/96
Gibbon, Orangutan 등 유인원의 이름을 모델명으로 일련의 스피커를 만들어내고 있는 드보어 피델리티는 마치 오디오노트의 AN-E 같은 스피커를 떠올린다. 박스형 스피커로 후면에 포트를 마련한 저음 반사형 스피커지만 전면을 길게 설계하고 깊이를 얇게 만들어 마치 평판형 스피커 같은 인상을 준다. 단순히 보기 좋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다. 전면 배플의 넓이에 따라 저역의 양이 달라지며 포트를 통해 돌아 나와 전면 우퍼의 방사 에너지가 우퍼 전면 방사 에너지와 중첩되는 현상을 고려한 것이다. 그저 복고풍 디자인에 뚝딱뚝딱 만들어 환심을 사려는 디자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우선 전면에서 보면 널찍한 배플이 아름답다. 본사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보다는 열 배는 더 아름다운 무늬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대형 자동화 공정을 통해 일관적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인클로저다. 흥미로운 것은 전면 배플은 자작나무 합판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두 종류 두께의 MDF를 혼합해서 만든 점이다. 인클로저의 공진 관련 여러 실험을 통해 완성한 것. 전체 사이즈는 높이가 전용 스탠드를 포함하면 90cm, 전면 배플은 46cm, 깊이는 30cm 정도로서 중형 플로어스탠딩의 풍채를 보인다.
유닛은 중앙에서 위쪽으로 위치시켜 놓고 있는데 상단의 1인치 실크 돔 트위터 그리고 바짝 붙은 10인치 페이퍼 콘 우퍼를 사이좋게 배치해놓았다. 요컨대 2웨이 저음 반사형 플로어스탠딩 스피커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스탠드가 있지만 높이를 약간 높이는 정도다. 트위터는 진동판을 외부 프레임 안쪽으로 깊게 위치시킨 모습이다. 그리고 웨이브 가이드를 마치 혼 타입으로 설계해 고역의 자연스럽고 빠른 방사를 돕고 있다.
1인치 트위터와 10인치 우퍼의 결합. 요즘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조합이지만 사실 몇십 년 만 돌아가면 이런 유닛 간 커다란 구경 차이를 종종 볼 수 있다. 아마도 전형적인 엔지니어링을 배운 사람이라면 미드레인지와 베이스 우퍼를 분리하고 우퍼의 구경을 줄였을 테지만 10인치는 오랑우탄 시리즈를 규정짓는 징표 같은 것이다. 이보다 작은 유닛은 Gibbon 시리즈에서 마주칠 수 있다.
10인치 우퍼의 진동판 소재는 다름 아닌 나무 섬유로서 보기만 해도 무척 감성적이고 자연적인 울림을 내줄 듯하다. 그리고 과거 실버백 레퍼런스라는 스피커에서 개발된 모터 시스템을 탑재해놓고 있는 모습. 보기만 해도 부드러우면서도 요즘 스피커에서 쉽게 맛보기 힘든 웅장하고 질감 좋은 중, 저역을 예상하게 만든다.
시청평
오랑우탄 O/96이라는 이름에서 96은 다름 아니라 스피커의 감도 96dB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동생 O/93은 능률이 93dB 임을 예상할 수 있다. 현대 하이파이 스피커들의 감도가 85dB에서 90dB 정도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마치 대출력 트랜지스터 앰프가 나오기 이전 스피커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애초에 싱글 엔디드 진공관 앰프로도 제어가 쉽도록 설계한 스피커다.
Clifford Curzon - Beethoven: Eroica Variations
Beethoven: Eroica Variations / Schubert: Moments Musicaux
그러나 이 스피커의 주파수 응답 구간은 25Hz에서 31kHz에 이른다. 겉으로 보기엔 주파수 구간이 좁고 능률이 한없이 높아 제어가 쉬운 회고적 스피커로 보이지만 사실 어떤 고해상도 음원에도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광대역 스피커다. 실제 초저역부터 초고역까지 막힘없이 재생해 주었는데 특히 엘피를 듣기에 좋은 매력을 보여주었다. 아날로그 사운드의 재림이랄까? 예를 들어 클리포트 커즌의 베토벤 ‘Eroica Variations’를 들어보면 음폭이 넓고 표면 질감이 잘 살아난다. 가공식품이 아니라 싱싱한 날 것의 질감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음영이 뚜렷하면서 둥글고 모나지 않은 모습인데 앰프와 친화성도 좋지만 반대로 나름의 기개와 주장을 가진 스피커다.
사실 오랑우탄은 구면이며 이전에 리뷰를 했던 적도 있어 친근하다. 하지만 이전에 845를 사용한 토레스의 20와트짜리 저출력 진공관 앰프를 사용했던 것과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번엔 에어타이트의 ATC3 프리앰프에 ATM300R 파워앰프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300B 싱글 구성으로 진공관은 Takatsuki 제품을 사용했고 이번엔 채널당 고작 9와트에 불과했다. 더불어 턴테이블은 크로노스 Sparta에 블랙뷰티 톤암 그리고 직스 Ultimate Omega 저출력 MC 카트리지를 활용했다. 포노앰프 역시 크로노스 레퍼런스 포노앰프.
Shelby Lynne - Just A Little Lovin'
Just A Little Lovin'
셸비 린의 ‘Just A Little Lovin'’을 엘피로 재생하자 낮은 중역과 높은 저역 구간이 두툼해 음상이 크고 묵직한 기운이 발밑까지 전해졌다. 아무래도 중역대 두께가 크고 배음이 풍부해서인지 보컬 음상이 큰 편이며 에너지가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더 중후하고 농염한 톤으로 노래하는 셸비 린은 앳된 청춘에서 노련해진 중년을 바라보는 듯하다. 육감적인 보컬 톤 하나만으로 이 스피커의 매력은 뚜렷하게 떠올랐다. 앰프의 변경으로 이 정도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는 스피커는 요즘 들어 처음 본다.
Yuko Mabuchi - All Blues
Yuko Mabuchi Plays Miles Davis
이어 유코 마부치가 연주한 마일스 데이비스 헌정 앨범 중에서 ‘All Blues’를 들었다. CD는 한 장으로 나왔지만 얄룽 레코드에서 LP는 특별히 45RPM, 2LP로 발매한 작품. 미드/베이스 우퍼를 뚫고 나오는 중, 저역이 화끈하다. 연기 자욱한 어느 재즈 클럽에서 이제 막 시작한 재즈 밴드의 연주를 듣는 듯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로 LP를 듣다 이쪽으로 옮겨오면 전혀 다른 세상으로 전이된 음악과 조우하게 된다. 풍부한 음량과 펑펑 쏟아지는 음결이 거침없이 공간을 휘어잡는다.
Hugh Masekela - Stimela (The Coal Train)
Hope
Takatsuki 300B 출력관을 채용한 ATM-300R은 9와트라는 출력이 무색하게 오랑우탄 O/96을 어르고 달랜다. 이런 형태의 스피커를 보면 중역 중심에 대역폭이 좁은 소리로 솔로 악기나 스탠다드 보컬 정도만 좋을 것 같지만 휴 마세켈라의 ‘Stimela’같은 곡을 들어보면 놀라운 반전을 보여준다. 초반부터 점점 고조되어가는 타악은 한 방 묵직하게 펀치를 날리며 커다란 타격 이후에도 이어지는 잔향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다이내믹스 폭은 거시적인 부분에서 매우 높은 폭으로 하강하고 상승한다.
Alexander Gibson, Royal Opera House Orchestra
Carmen Suite
Gounod: Faust Ballet Music / Bizet: Carmen Suite
무대 또한 전혀 좁지 않다. 전/후 거리감은 요즘 하이엔드 스피커처럼 깊지 않지만 좌/우로 충분히 넓게 펼쳐진다. 그뿐만 아니라 물리적 촉감이 부드러운 가운데 힘 있게 치고 빠지는 스타일이라 굵직한 쾌감이 시종일관 음악에서 멀어지지 않게 꼭 붙들어 맨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깁슨 지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비제 ‘Carmen Suite’에서 쏟아지는 악기의 움직임은 다이내믹하다. 뮤지션과 나 사이의 어떤 장벽이 해체되고 녹음 당시의 고간으로 흘러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본래 특성에 더해 에어타이트의 기백과 중략감이 스며들어 더욱 당당하고 역동적인 연주를 펼쳐 보였다.
총평
베릴륨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나노 그래핀, 이런 것도 아니라면 알루미늄과 카본 등 고가의 인클로저로 중무장한 스피커들이 활개 치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싼 소재와 유닛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소리로서 방증하고 있다. 누구나 같은 곳만 바라보고 있을 때 비슷한 길을 가기보단 좁지만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론 꽤 공을 많이 들인 유닛과 인클로저를 사용해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제작한 스피커다. 따라서 생산량이 정해져 있고 주문해도 완성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
전혀 가공하지 않은 천연의 빛깔과 세공하지 않은 현장의 열기를 구현하는 것은 지난한 시간의 굴곡이 필요한 법이다. 많은 중견급 메이커들이 과거 벨 에포크 시절을 추억하며 자기 복제를 하는 동안 드보어 피델리티는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오랑우탄 O/96은 그 확실한 증거로서 과거 선배 브랜드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실로 ‘수퍼 아날로그 사운드의 재림’이라 할 만한 명기며 아마도 오랫동안 그 반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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